‘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는 “가장 훌륭한 의사는 바로 햇빛과 공기, 그리고 운동이다.”라고 말했다 21세기를 맞이하는 인류에게 당면한 과제는 난치병을 극복하고 ‘생명 연장의 꿈’을 실현시킬 토대를 구축하는 것이겠으나 무엇보다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촌 환경을 제대로 지켜나가고 보존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과제일 것이다.

의학의 역사는 예술과 과학 그리고 전쟁의 역사이기도 한다. 그 역사를 통해 인류가 걸어온 길을 조명해본다. <한권으로 읽은 의학 콘서트>는 의학계와 역사학계 철학자 등 여러 분야의 전문가들이 공동으로 집필에 참여했다. 저자는 말한다. “우리에게 완벽한 세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불안정한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우리의 목적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에워싸고 있는 것들과 조화를 이루며 사는 것이다.”

 

나일강변에 피어난 의술

고대 이집트는 피라미드와 스핑크스 등 웅장한 고대 건축물로 유명하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사학자 헤로도토스(Herodotus)는 이집트를 둘러보고 돌아온 후 오히려 이집트를 ‘질병의 나라’라고 칭했다. 헤로도토스의 저서 《역사 Historiae》에는 그가 보고 들은 이집트 의학 관련 내용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집트 의사는 여러 질병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의 질병만 정확하게 치료할 수 있으면 된다. 지금은 도처에서 의사를 쉽게 접할 수 있으며 의료업은 그 영역이 매우 엄격하게 분류되어 있다. 눈만 치료하는 사람, 치아만 치료하는 사람, 심지어 위만 치료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전문화되어 있다.”

또 다른 그리스 사학자 디오도루스 시쿨루스(Diodorus Siculus)는 이집트에는 이미 초보적인 의료제도가 확립되어 있었다고 기록한 바 있다.

“이집트에서는 전쟁 또는 여행 중에 무료로 치료를 받을 수 있다. 의사들이 정부로부터 보수를 받기 때문이다. 그 옛날 덕망이 높았던 한 의사에 의해 정해진 이 규정은 매우 엄격하게 시행되었으므로 의사들도 도의상 절대 환자를 거절하지 못했다.”

고대 이집트에는 안과, 치과를 비롯해 두통, 복통, 수족 이상 등 진료과목이 매우 세분되어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의학서 가운데 하나인 ‘에버스 파피루스(Ebers Papyrus, BC 1500년경 제작)’에는 진료과목별 의사 외에도 주문을 외우는 자, 부적을 그리는 자 등도 의사로 간주되었다. 이 세 부류의 의사들은 모두 수도원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성서에 기록된 방법에 따라 의술을 익혔다. 당시에는 특정 질병의 경우 인간이 범한 죄에 대한 신의 처벌이라는 인식이 보편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의사와 점술가의 구분이 모호했다. 따라서 점술가는 기도, 제사, 속죄 등의 의식을 통해 ‘인간에 노한 신’에게 용서를 구했다. 이 방법으로 환자가 완치되지 않아도 의사에겐 큰 책임이 없었다. 그러나 만약 의사가 성서에 위배되는 방법으로 치료를 했거나 환자가 의사에 의한 처방약을 먹고 목숨을 잃으면 의사도 자신의 목숨을 내놓아야 했다.

진료를 할 때는 주문이 가득 담긴 책과 불에 타서 검게 그을린 흙을 부적처럼 지녔다. 일부 의사들은 소아 질병 치료의 최후 수단으로 죽은 쥐를 사용하기도 했다. 기원전 4000년경 발견된 어린 미라의 소화기관에서 껍질을 벗긴 쥐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당시 이 방법은 의사와 환자 모두 수긍했던 치료방법으로 추정된다. 고대의 약물 투여 및 치료 행위는 마치 신성한 법칙처럼 여겨져 누구 하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전통이 관례로 굳어진 후엔 의사들도 복종을 강요당했다. 만약 이러한 전통에 저항하다가 환자가 죽으면 의사는 심각한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전통적인 방법 가운데는 옳은 것도 있고 어리석은 것도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옳은 방법 대신 어리석은 방법을 택하기 일쑤였다.

내과 치료에는 다양한 약물이 사용되었다. 의사는 손을 환자 머리에 대고 환자에게 각종 음료를 마시게 했다. 식물성 약으로는 회향(茴香, Foeniculum vulgare), 센나잎(Sennae Folium), 천선자(天仙子, Hyoscyami Semen), 피마자유, 독미나리(Cicuta virosa), 오르니토갈룸(Ornithogalum), 양귀비 등이 있으며, 동물성 약으로는 꽃게, 양의 지방, 오리 지방, 도마뱀, 박쥐의 피, 고양이의 자궁, 당나귀 고환 등이 있다. 그 밖에 사람의 대소변, 파리똥과 같이 혐오스럽고 비위를 상하게 하는 것들이 마귀를 몸 밖으로 쫓아낸다고 믿기도 했다. 광물성 약으로는 마그네슘, 아연, 구리, 소금, 유황, 석고 등이 사용되었다. 당시 의사들은 질병의 예방과 치료를 위해 내장의 부패한 독소를 배출시키는 방법, 즉 관장을 실시했다. 관장 치료는 환자의 몸을 정화시키는 동시에 환자와 의사 사이의 신뢰를 높여주었다.

의사는 진료도 하고 약을 조제하기도 했으며 약탕에서 환자를 목욕시키기도 했다. 또는 상처에 직접 약을 발라주고 지압 치료를 실시했으며 관장은 물론 수술까지 집도했다. 그러나 아무리 간단한 수술이라도 수술은 반드시 수도원 부근 외과에 가서 의사가 직접 집도하도록 했다. 종기 제거, 고름 짜내기, 포경수술, 상처 꿰매기, 고약 바르기, 소의 뼈로 만든 판목으로 골절 부위 고정하기, 상처 부위 붕대 싸매기, 불로 지지기, 사혈(瀉血)처럼 피를 내는 치료도 모두 수술에 속했다. 당시의 제한적인 외과 지식으로 이 같은 시술을 했다는 것이 놀라울 따름이다.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에는 거머리로 치료하는 모습이 벽화로 남아있다. 고대 인도에서도 외과수술 후 거머리 치료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피부염이나 상처가 난 곳의 염증을 완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이집트 파라오의 무덤에는 거머리로 치료하는 모습이 벽화로 남아있다. 고대 인도에서도 외과수술 후 거머리 치료가 성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피부염이나 상처가 난 곳의 염증을 완화시켜 주는 역할을 한다.

그 시대에 자궁염은 매우 흔한 병이었다. 의사는 환자를 뜨거운 숯 위에 서게 한 후 향기로운 밀랍을 숯 위에 부어 그 연기를 쬐도록 함으로써 염증을 완화시켰는데, 이는 상당한 효과가 있었다. 특히 이집트에서는 이미 관장약이 발명된 상태였다. 전설에 따르면 의술의 신 토트가 나일 강변에서 고위 성직자들에게 직접 시범을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한 마리 백로로 변신해 수면 위에 내려 앉아 부리에 물을 머금은 후 자신의 항문에 삽입했다. 이 장면을 본 의사들이 관장의 개념을 터득한 것이다.

이집트인들은 인체의 가장 중요한 기관이 심장이라고 생각했으며 이곳에 지각 능력이 있다고 여겼다. 또한 손발의 맥을 짚어 심장의 운동을 감지할 줄 알았다. 그러나 당시에는 심장의 펌프운동만 인식하고 있었을 뿐 혈액순환에 대한 개념은 아직 확립되지 않았다. 대뇌 표피 구조를 상당 수준 이해하고 있었지만 이곳에 바로 ‘지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그들은 인체에 기, 혈액, 분비물을 운반하는 관(管)이 있다고 믿었다. 예를 들어 “코에는 관이 네 개 있는데 두 개는 혈액을 운반하고 두 개는 공기를 운반한다. 고환에 있는 관은 정액을, 그리고 간장의 관은 물과 공기를 운반한다. 오른쪽 귀에 있는 두 개의 관으로는 살아있는 기가 들어가며 왼쪽 귀에 있는 두 개의 관으로는 죽은 기가 들어간다.” 이러한 사실들을 종합해 볼 때 당시 의사들은 해부학과 생리학의 기초 지식을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수 세기가 흐르도록 신의 권위가 지배하는 사회에서 치료는 여전히 신의 계시로 여겨졌다. 이집트인들은 의술의 신 토트가 신들만이 알고 있던 치료의 비밀을 몰래 기록해서 의학교에 보관해 놓은 것이라고 믿었다. 토트는 과학과 예술을 발명했을 뿐 아니라 신들의 비밀, 그리고 질병의 발생과 치료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으며 마귀를 물리치는 주문을 발명했다고도 전해진다.

그렇다면 당시 사람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어떻게 의사에게 치료비를 지불했던 것일까? 이집트인들은 특별히 이발에 민감해서 평소에는 두발 관리를 철저히 했다. 하지만 질병에 걸리면 병상에 누워 있어야 하므로 이발을 할 수 없었다. 이에 병이 나으면 그들은 이발사를 집으로 불러 이발을 했는데 당시 잘라낸 머리카락의 양으로 의사에게 지불할 비용을 산출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대머리 환자는 어떻게 했을까? 억울함을 무릅쓰고 의사가 달라는 대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즉, 그들은 맘 놓고 병에 걸릴 수도 없는 가련한 처지였다고나 할까?

 

파라오를 위한 궁정의학

이집트제국의 의사들은 이집트에서는 물론 동방 전체를 통틀어 신분과 지위가 매우 높았다. 각국의 국왕들은 모두 이집트 의사를 데려오기 위해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페르시아의 키루스 대제(Cyrus the Great)는 안과 의사를 이집트로 보내 수학하도록 했으며, 아키메네스의 왕 다리우스(Darius)도 이집트에서 데려온 의사에게 자신의 모친의 눈을 치료하도록 했다. 또한 이집트의 각종 약재도 주변 국가의 약학 서적에 등재되었으며 이후 중동국가로까지 전파되었다. 그리스의 의학 역시 이집트 의학과 지식에 의존해 크게 발전했다. 로마시대 유명한 의사였던 갈레노스도 종종 이집트 약을 처방해 환자들을 안심시켰다. 18세기 런던 거리에는 ‘이집트 의사’란 간판을 건 수많은 떠돌이 의사들이 등장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집트는 세계 최초로 ‘전문의 제도’를 시행한 나라였다. 특히 파라오 왕의 주변에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의사들이 왕의 건강과 장수를 책임지고 있었다. 이 의사들은 ‘약품 보관’, ‘마취 주관’ 등 일정한 직책을 맡았는데, 그중에는 현대인의 예상을 뛰어넘는 직책명도 있다. 예컨대 기자(Giza) 피라미드 부근에는 기원전 2500년 전에 건축된 파라오 주치의의 무덤이 있는데 비석에 ‘항문 전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일부 파라오 왕들은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을 관리하는 의사를 각각 따로 둘 정도였다.

이집트의 궁정 의사들은 모두 성직자 신분이었기 때문에 대개 수도원 근처에 있던 학당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수도원의 대전(大殿)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으로 그 주변에 교실과 약품창고가 자리하고 도서관도 인근에 위치했다. 당시 견습 성직자들은 성서에 나오는 의학을 반드시 익혀야 했다. 그리고 일정 기간이 지난 후에야 ‘기적의 전당’에서 중·고위 성직자들이 주재하는 진료에 참가할 수 있었다.

이집트인들은 참된 의학지식은 모두 신의 계시라고 굳게 믿었으며 질병은 마귀가 들어와 신체를 망가뜨리는 것이라고 여겼다. 의사가 신에게 기도하며 주문을 외어 마귀를 쫓았는데 환자의 몸을 주무르거나 밟기도 하고 환자에게 구토제를 복용하게 한 후 “마귀야 물러가라! 호루스의 주문이 너를 부른다. 그가 너를 갈기갈기 찢어 버리리라!”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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