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장면이 있다. 대형 홀의 문이 열리자 진행자의 안내에 따라 순식간에 400여 명의 사람들이 들어선다. 남한에서 온 가족 100 여 팀, 북한에서 온 가족 100 여 팀이다. 이들은 최소한 65년 이상 남과 북으로 나뉘어 헤어져 살아온 부모형제를 만나러 왔다. 자신의 번호표가 놓인 테이블로 가서 서로의 이름을 묻고 옛 사진을 보여주며 신원을 확인한다.

맞다. 그렇다. 내 어머니다.

평생 동안 보고 싶어서, 단 한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은 그리움에 시달리고 지쳐서, 이제는 그 한을 새기며 죽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던 아버지와 어머니. 이것이 꿈이냐, 생시냐, 몸이 부르르 떨려오는 순간에 이들이 가장 먼저 해야 할 것, 아니 저절로 가장 먼저 하게 되는 것은 무엇일까. 부모님께 드리는 큰 절일까?

아니다. 큰 절보다 우선하는 것이 있다. 뭔가 하면, 바로 우는 것이다. 이제야 제대로 한 번 울어보는 것이다. 울음은 저절로 꺼이꺼이 터져나와서, 어깨와 팔다리를 흔들며, 전신을 소스라치게 하며 목 놓아 대성통곡으로 터지고 만다. 대형 홀은 순식간에 울음바다로 변한다. 400여 명이 일시에 사무치게 울어버리는 장면, 한국의 역사가 아니면 만들어낼 수 없는 이런 기막힌 만남을 보며 누군들 울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보냐.

18세기 실학자 연암 박지원은 청나라 건륭제의 70회갑 잔치를 기념해 조선사절단으로 한 달이 넘게 연경(지금의 북경)으로 가는 길에 요하(遼河)를 건너 망망하게 펼쳐진 요동벌판(약 470km)을 만나자 그 끝 간 데 없는 벌판을 보는 감격에 겨워 울고 말았다 한다.

『…… 말을 세우고 사방을 돌아보다가 나도 모르는 사이에 손을 들어 이마에 얹고, “아, 참 좋은 울음 터로다. 가히 한 번 울 만하구나.” 하였다. 정 진사가 이렇게 천지간의 큰 안계(眼界)를 만나서 별안간 울고 싶다니, 웬 말씀이오, 하고 묻는다. (…) “우리는 비로봉 산마루에 올라가 동해를 바라보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고, 장연(長淵) 바닷가 금모래밭을 거닐면서 한바탕 울어볼 만하며, 이제 요동 벌판에 와서 1천 2백 리 사방에 도무지 한 점의 산도 없이 고금에 오가는 비구름만 창창할 뿐이니, 이 역시 한바탕 울어볼 만한 곳이 아니겠소.”』 (박지원 열하일기)

장담컨대, 그 연암이 오늘날의 남북 이산가족 상봉장면을 보았더라면 민족의 이런 수난 앞에서, 인륜을 막아 세우고 70년 만에 만나게 하는 이 비정성시에서 요동벌판보다 더 기막힌 울음을 울었으면 울었지, 그렇지 않고서는 배기지 못했으리라.

연전에, 평양 만남에서 아내를 만났던 안산의 이몽섭 할아버지를 기억한다. 손수레 행상을 하고, 빈병을 주어다 파는 가난한 이 할아버지는 신혼 때 첫딸을 낳고 곡식을 장만하려고 집을 나왔다가 이산가족이 돼 혼자 살아온 사람이었다. 50년을 훌쩍 넘기고 만난 아내도 결혼 하지 않고 수절하여 할머니가 된 사람이었다. 못난 할아버지는 아내에게 한마디도 건네지 못하고 의자 모퉁이에 걸터앉아서 숙맥처럼 한숨만 쉬었다. 아내도 그런 남편이 섭섭해서 울기만 했다. 보다 못한 딸은 아버지의 등에 얼굴을 대고 울기만 했다. 그렇게 상당한 시간이 지나고, 할아버지가 주섬주섬 선물 보따리에 든 케이스에서 금반지를 꺼냈다. 신혼에 헤어져 50년 만에 만난 아내에게 말로는 표현할 수가 없어서, 다만 그 슬픔을 세월의 탓으로 돌리고, 빈 병 팔아 모은 돈으로 마련한 금반지를 아내의 손가락에 끼워줄 때 그 가락지가 아내의 약지에 맞았었을까?

세월의 그림자는 모질기만 했다. 반지는 할머니의 약지에 맞지 않았다. 남편이 평생 그리워했던 아내는 거친 50년을 살아내면서 옛날의 섬섬옥수가 갈퀴손 같이 변해있었다. 이제 너무 먼 길을 흘러와 다시는 맺지 못할 삶처럼, 가락지는 백년가약의 주인이 되기를 포기하고 새끼손가락으로 들어갔다. 북한의 가족들이 선물로 준 사탕을 가슴에 안고 남한으로 돌아온 이 할아버지가 한 말이 지금도 생각난다. “가족들이 생각날 때마다 이 사탕을 한 알씩 먹으려고 합니다.”

이 나라에 전체 이산가족의 수는 1000만명이 넘는다고 한다. 대한적십자사에 13만 5천여 명의 이산가족 상봉 신청을 했지만 이제는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서 5만 6,000명이 남았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는 일 년에 다섯 번씩 만나도 100년도 더 걸리는 셈이다. 우리는 참 슬프지만, 잔인하게 살아왔다. 뭔 수를 내야 한다. 이산가족들이 손쉽게 만날 수 있도록 하는 새로운 인도주의적 방식을 찾아내야 하고, 그런 방법을 바탕으로 남북관계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아야 한다. 이렇게라도 살아온 서로가 고맙고 감사하다.

 

<필자 약력>

언론인·전 국민일보 편집인, 편집국장

저작권자 © 뉴스로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