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바다 남해

한 여자 돌 속에 묻혀 있었네/ 그 여자 사랑에 나도 돌 속에 들어갔네/ 어느 여름 비 많이 오고/ 그 여자 울면서 돌 속에서 떠나갔네/ 떠나가는 그 여자 해와 달이 끌어주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가에 나 혼자 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나 혼자 잠기네 -이성복 ‘남해 금산’ 전문

산을 비단으로 둘러치지 않아도 발밑으로 펼쳐진 산자락은 온통 비단이었고, 부득불 ‘금산’이라 부르지 않아도 산은 이미 비단 산이었다. ⓒ유성문
산을 비단으로 둘러치지 않아도 발밑으로 펼쳐진 산자락은 온통 비단이었고, 부득불 ‘금산’이라 부르지 않아도 산은 이미 비단 산이었다. ⓒ유성문

 

이성복의 남해 금산을 오른다. 상주해수욕장 인근에서의 일박과 아침은 제법 쾌청했는데, 복곡저수지를 지나 보리암 주차장에 이르렀을 때, 날은 언제 그랬냐는 듯 흐려졌고 산은 길게 누워버렸다. 오히려 잘됐다. 돌 속에 묻혀 있고, 돌 속에서 떠나고, 돌 속에 남아 있는 남해 금산의 ‘그 여자’와 ‘그 여자 사랑’을 만나러 가는 길은 이렇듯 흐리고 젖어서 가는 것이 훨씬 더 어울린다.

날이 흐려서 더 풋풋한 신록을 타고 산에 오르니, 보리암 뒤편의 망대가 선뜻 가까워 보일 즈음, 이번에도 산은 급하게 바다로 쏟아져 내린다. 제발 이성계의 일화 따위는 잊어버렸어야 했는데.

태조 이성계는 나라를 차지하기 위해 백두산과 지리산에 올라 천운을 빌었다. 그러나 두 산은 그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보광산(금산의 옛 이름)에 올라 마지막으로 빌었더니, 산신은 연민으로 허락해주었다. 감복한 이성계는 자기의 뜻이 이루어지면 산 전체에 비단을 둘러 보은하겠다고 약속했다. 막상 나라를 차지한 후 어떻게 약속을 지킬지 고민하는 이성계에게 한 신하가 지혜를 냈다.

그 남자 돌 위에 서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 위에 홀로 서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다에 홀로 잠기네. ⓒ유성문
그 남자 돌 위에 서있네. 남해 금산 푸른 하늘 위에 홀로 서있네. 남해 금산 푸른 바다에 홀로 잠기네. ⓒ유성문

“산 전체를 비단으로 둘러싸기는 어려운 일이니, 대신 산 이름을 ‘금산(錦山)’으로 바꿔 부르면 어떻겠습니까?”

다 부질없는 짓이었다. 산을 비단으로 둘러치지 않아도 발밑으로 펼쳐진 산자락은 온통 비단이었고, 부득불 ‘금산’이라 부르지 않아도 산은 이미 비단 산이었다. 울울한 난대림은 드문드문 측백나무의 짙푸른 음영으로 수를 놓았고, 바위마저 아련한 바다물결 따라 침묵으로 넘실거렸다.

금산이었다. 해수관음상이 아니더라도, 아유타국에서 온 불사리가 모셔졌다는 심층석탑이 아니더라도, 쌍홍문의 움푹한 두 눈이 아니더라도, ‘그 여자 사랑’ 담은 상사바위가 아니더라도, 산은 그저 아무 말 없이 거기 있어 금산이었다.

가천마을 다랭이논이 계단을 타고 바다로 내려간다. ⓒ유성문
가천마을 다랭이논이 계단을 타고 바다로 내려간다. ⓒ유성문

마침내 오래 참아온 눈물처럼 뚝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제 별 수 없이 다시 산을 내려가야 한다. ‘그 여자’ 역시 울면서 돌 속을 떠나가리라. 문득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가 소름처럼 돋아 올랐다가, 이윽고 남해 금산 푸른 바닷물 속에 잠기고야 말았다.

남해도는 굴곡이 심한 해안선과 가파른 비탈을 지고 산다. 비록 나라에서 네 번째 큰 섬이라고는 하지만 유달리 산세가 뚜렷해 널따란 들판은 만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어딜 가나 바다로 쏟아져 내리는 산자락을 타고 계단식 논밭이 이루어져 있으니, 이른바 ‘다랭이논’이다. 마늘 농사가 주종을 이루는 다랭이논들은 푸른빛을 띤 채 마치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계단처럼 놓여 있다. 하늘의 블루스카이는 그 계단을 밟고 내려가면서 초록 물감을 더하니, 마침내 바다에 이르러 딥블루가 된다.

이런 남해만의 독특한 풍광은 남면의 가천마을에서 절정을 누린다. 응봉산 자락은 어김없이 바다로 급격히 떨어지면서 사람이 발붙이고 살 만한 땅뙈기를 쉬 허락하지 않는다. 그래도 그 비탈에라도 달라붙어 기어이 삶을 이루고야 마는 사람들을 채 떨구지는 못한다. 어차피 바다는 벼랑 끝에 면해 있으니 기댈 곳 없는 사람의 살림살이는 필사적일 수밖에 없다.

‘암’은 누워있고, ‘수’는 솟아있다. 그래도 미륵이니 ‘성’과 ‘속’이 예 다 있다. ⓒ유성문
‘암’은 누워있고, ‘수’는 솟아있다. 그래도 미륵이니 ‘성’과 ‘속’이 예 다 있다. ⓒ유성문

그래도 나는 보았다. 여느 바닷가 마을답지 않게 많은 아이들이 비탈지고 좁은 골목길을 활기차게 뛰어다녔고, 경운기에 쇠풀을 가득 싣고 돌아온 젊은 농사꾼을 맞는 아기 업은 아내는 연신 살가운 미소를 보냈다. 노인들조차 지게를 지거나 지팡이를 짚고서라도 부지런히 고샅길을 오르내리고 있다. 강파른 터전은 그렇게 억척스러운 삶을 촉발해냈다.

가천마을에는 독특한 민속의 자취가 남아 있다. 마을 한복판의 ‘밥무덤’과 바다로 가는 길목에 있는 ‘암수미륵’이다. 일종의 마을 서낭당인 밥무덤은 제삿밥을 얻어먹지 못하는 무연고의 혼령에게 밥을 주어 풍작과 풍어를 비는 곳이다. 암수미륵 역시 발기한 남자 성기와 임신한 여자의 형상을 닮은 자연석을 미륵으로 모시고 마을의 안녕과 다산(多産)을 기원하던 민속신앙의 현장이다.

성(性)과 식(食),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이 여기 다 있다. 시들지 않는, 결코 시들 수 없는 인간의 삶은 이렇듯 비탈진 곳에서까지 터전을 이루었고,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눈물겨운 시선은 다랭이계단을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필자 약력>

-여행작가

-편집회사 투레 대표

-한국기록문화연구협동조합 이사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 간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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