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조선노동당위원장 사이의 정상회담이 결국은 커다란 결실을 맺을 모양새를 만들어가고 있다. 결국은 뭔가를 만들어낼 것 같다는 얘기다. 지난 4월 27일 판문점 첫 만남 이후 엄청나게 달아올랐던 북핵폐기→북미수교→남북공동번영의 기대는 북미정상회담 이후 북한과 미국의 줄다리기속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냉엄한 국제정세의 질서 속에서 아무래도 오랜 세월이 걸리거나, 어쩌면 그런 과정 속에서 시들어가는 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한 측면도 있다. 그러나 남북의 두 정상이 만들어가는 그림을 보면 그런 기대는 결코 꿈이거나 머나먼 무지개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렬한 인상을 준다.

국가의 앞날이 좌우될 만큼 중대한 이런 사안을 놓고 흐트러짐 없는 논리적인 방식으로 분석해도 모자라는 판에 모양새나 그림을 이야기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는 지적이 있을 줄로 안다. 그렇더라도, 그렇지만은 않을 것이다. 워낙 변수가 많고, 관련국들이 이해관계가 복잡해 결코 논리의 틀에만 갇히지 않는 이런 대형 이슈는 모양새가 중요하기 마련인데, 남북의 두 정상이 만들어가는 그림은 한반도는 물론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가 막힌 형태로 드로잉 되고 있기 때문이다.

세계인들의 머릿속에 강렬하게 남은 첫 번째의 그림은 판문점 회담 당시 보여준 도보다리의 대화다.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건물과 그 동쪽에 있는 중립국감독위원회 캠프 사이에 위치한 50m 길이의 작은 다리, 그곳이 그렇게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무대가 될 지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친교를 겸한 산책을 마치고 간이테이블에 앉아 30여 분간 나눈 단독대화는 당초 예상보다 훨씬 더 길고 진지하게 진행되면서, 아 저기엔 뭔가 숨은 그림이 있다는, 숨은 그림만이 아니라 세계의 어떤 정상회담에서도 볼 수 없었던 기막히고 진정한 가슴이 전달되고 있다는 메시지를 세계인들에게 심어주었다. 세계적인 휴양도시도 아니고 그렇다고 세계인들의 눈길을 끌만한 어떤 구경거리도 없는, 지금까지는 통행이 금지됐던 쓸쓸한 산간이었다. 남북한 병사들의 무수한 피를 부른 비극의 씁쓸함이 전해지는 거기, 간이테이블에서의 진지한 대화는 얼마나 강렬한 스토리텔링이었는가.

두 번째 세계인들이 주목하는 두 사람의 그림은 5월 26일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북측 구역 내 통일각에서 있었던 두 정상의 포옹장면이다. 일체의 형식 없이 만나고 싶다는 김 위원장의 제의에 의해 12시간 만에 즉석으로 이루어졌다고 하는 정상회담에서 김 위원장의 저리 우악스럽게 끌어안고 또 끌어안는 인사는 지구촌 정상 간의 만남에서는 어디서도 보도듣도 못했을 만큼 다급해 보였고, 그래서 그 선연한 반가움의 포옹은 그 진실성을 의심하지 않아도 안심할 만한 것이었다.

세 번째의 그림은 이번 평양의 정상회담에서 남북 두 정상이 백두산 정상에 오른 장면이다. 국가의 바쁜 정상들이 두 차례의 회담을 마치고 불원천리 백두산 정상까지 올라가 서로 얼싸안고 손을 맞잡은 저런 그림은 다른 나라의 어떤 국가원수도 그리지 않는다. 혹시 골프라운딩이나 대통령의 별장 같은 곳에 가서 하룻밤을 보내는 것이라면 몰라도 높고 추운 산꼭대기에 올라가 감개무량해 하는 저런 짓은 하지 않는다. 아니, 할 수 없다. 남쪽 사람으로서는 그저 마음속으로 바라보기만 했던 그리움의 산, 중국 땅을 거쳐 갈 기회는 많았지만 우리 땅으로 가고 싶어 마다했다는 문 대통령의 진득한 마음 씀씀이에 김 위원장이 화답하지 않으면 만들어질 수 없는 그림이다.

바로 이런 그림들이 결국은 뭔가를 만들어낼 것이다. 하드보일드 문체와 스토리텔링의 대가로 꼽히는 미국 작가 어니트스 헤밍웨이는 빙산이론(Iceburg theory)에서 “빙산 이동의 위엄은 오직 팔 분의 일에 해당하는 부분만이 물 위에 떠 있다는 데 있다”며 물속에 잠긴 부분이 많으면 많을수록 스토리텔링은 강렬하고 위대해진다고 말했다. 문·김 두 사람이 만들어낸 저 대단한 그림은, 더구나 그 그림 속에 숨겨져 있는 빙산의 드러나지 않는 부분은 지금까지의 북한이 참으로 신뢰하기 어려웠을지라도, 앞으로의 국제정세가 아무리 냉정하더라도 저 드러나지 않은 힘으로 민족의 염원에 부응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한다. 근년에는 볼 수 없었던 세기적인 장면을 신선하게 지켜본 세계의 시민들이 그 증인이고, 세계인들의 마음속에 새겨진 그림은 누구도 도외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불과 몇 달 전 만해도 ‘4월 전쟁설’이니 ‘코리아 패싱’이니 하며 한국과 북한은 지구촌의 골칫거리인 나라로 전락하는 듯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4월 27일 남북정상회담으로 상황은 완전히 변했다. 핵실험을 강행했던 북한은 핵으로써는 결코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경제건설이 답이요, 길이다. 지구촌에 특색 있는 문화가 상당기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가운데 한국문화가 한류라는 이름으로 통칭되면서 세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오랜 신음 속에서 한국이 쟁취해낸 민주화 이후 솟아오르는 힘이 한류가 되어 지구촌에 확산되고 있는 것이라고 봐야 한다. 우리에게는 그렇게 분출하는 새로운 힘이 있다.

그동안 우리는 한반도의 통일이 불가능할 것이라는 패배감 속에 젖어있었다. 그러나 독일이 통일되는 것을 보면서, 독일 통일 이전과 그 이후의 상황을 살펴보면서, 통일은 불가능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꿈꾸는 사람들, 새로운 힘이 있는 사람들은 어떤 땅도 개척할 수 있다.

 

<필자 약력>

언론인·전 국민일보 편집인, 편집국장

저작권자 © 뉴스로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