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제주를 여행하고 있다

‘이번에는 담배를 끊고 술은 일주일에 딱 한 번만 마시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다가도 사흘을 넘기지 못하는 일이 있는가 하면, 무심결에 손가락꺾기를 한 번 했다가 버릇이 되어 나중에는 발가락꺾기, 목꺾기까지 일상이 된 사람이 있다. 내가 제주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게 된 것은 후자와 비슷한 경우다.

얼마 전 딸아이가 무슨 행사에서 경품으로 탄 자전거를 끌고 온 적이 있다. 튜브에 바람을 넣어달라기에 끌고 나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심심파적으로 한 번 타봤다. 자전거 안장에 올라앉으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 걷거나 차를 몰 때와는 다른 속도로 달리다 보니 주위의 사물이 속도의 차이만큼 다르게 보인 것이다. 걸을 때 보이던 것이 안 보이기도 하고 차로 다닐 때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도 했다.

제주여고 4거리 동쪽에 있는 돌다리가 「박석교」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자전거를 타고 잠시 건널목에 멈춰섰을 때 발견하게 된 표지판 덕이다. 「박성내」는 ‘박석내’를 발음대로 표기한 것으로 한라산 쪽에서 제주 바다로 이어지는 ‘내창’이다.

박석교의 4.3유적지 표지판(왼쪽). 박성내(오른쪽).
박석교의 4.3유적지 표지판(왼쪽). 박성내(오른쪽).

내창은 제주도민들이 하천을 보편적으로 부를 때 쓰는 말이지만 육지의 강이나 시내, 계곡과는 좀 다르다. 시내나 계곡에는 물이 흐르지만 제주의 내창에는 물 대신 돌이 흐르고 있다고 하는 편이 옳을 듯 싶다. 제주도 대부분의 내창이 그렇듯 「박성내」도 비올 때를 빼곤 물이 거의 흐르지 않는 건천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평소에 여기가 하천이라고 생각한 적이 없다. 아무튼 그 내창을 가로지르는 돌다리가 있는데, 거기 한 쪽 귀퉁이에 「박성내」라고 적힌 표지판이 있고 ‘이곳이 4·3 때 수많은 양민들이 학살당한 곳’이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제주농업학교에 수감되었던 사람 150여 명이 학살당한 채 시신은 불에 태워졌다니, 박성내에는 물 대신 피가 넘쳐흐르고 원혼이 깃든 곳이다. 10년 넘게 그 다리를 건너다녔으면서도 이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자동차 운전석에만 앉아 있었으니 그런 게 보일 리가 없었다.

며칠이 지난 뒤 아는 이들과 막걸리를 마시는 자리에서 그런 얘기를 했더니 거기에 그런 게 다 있었어? 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제주도에는 그런 것이 수천 곳도 더 있어, 하며 뻥을 치는 이도 있다.

‘걷다 보니 못 보던 게 보이기 시작하더라, 이제는 좀 걸어야겠다.’

원래는 이런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 제주도에는 역사유적지가 무지 많다는 식으로 자기들 멋대로 이야기의 방향을 틀어버렸다. 술이 들어가니 사람들의 이야기는 더하기에서 곱하기로 과장되기 시작했다.

북촌리에 가보면 선사시대 사람들이 모여 살던 바위그늘자리가 있고 고인돌도 여기저기 있다. 조선 광해군의 어머니 인목대비의 친정어머니가 이곳에 와서 종노릇한 사실을 아느냐? 우리 마을 본향당에는 요즘도 기도하는 사람들 많은데 그걸 미신으로만 봐서는 안 된다느니, 오일장 가면 굼벵이도 살 수 있고, 시장판에서 먹는 머릿고기가 끝내준다는 등.

술 취한 사람들의 꼬부라진 혀만큼이나 이것저것 순서 없이 이야기도 마구 섞이다가 급기야는 결론도 없이 자리를 털고 일어난다. 원래 할 일 없는 사람들이 모이면 늘 그렇게 싱겁다.

술자리에서의 이야기는 봄날 땅에 떨어진 눈처럼 대부분은 그 자리에서 흔적 없이 사라지지만 가끔은 응달진 곳의 잔설처럼 술이 깬 뒤에도 한동안 마음 속에 남아 있기도 하다. 그러다 문득 현장엘 가서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은 욕망이 드는 경우도 있다.

집에 돌아와 제주도 지도를 펴놓고 돌아다닐 계획을 짰다. 욕망은 충동적이었지만 그래도 준비는 좀 해야 할 것 같았다. 답사장소와 이동수단, 숙소, 음식준비, 그 외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체크하기 시작했다. 지역별로 다닐 것인가 테마별로 다닐 것인가, 숙소는 펜션으로 할 것인가 게스트하우스로 할 것인가.

한창 계획을 세우다 보니 생각이 무성해질수록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다짐이 결연하고 계획이 치밀할수록 실행이 어렵고 쉽게 어그러진다, 그러니 차라리 계획 없이 그냥 나서자. 걷거나 자전거를 타고 필요하면 버스, 또는 승용차를 이용하면 되고, 장소는 그날그날 내키는 곳으로 정하자. 이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떠난 길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났다. 그 중 우연히 만난 어떤 이로부터 ‘관광객’과 ‘여행자’를 구분해 내는 기막힌 방법도 듣게 된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에 의하면 친한 사람들끼리 모여 45인승 대형버스를 타고 들썩들썩 흥겹게 놀이를 가면 관광이고, 혼자, 또는 몇몇이 소곤소곤 다니면 여행이다. 그리고 여정, 견문, 감상의 기행문 3요소를 두루 적어낼 수 있으면 여행인데 그렇지 않고 사진만 줄기차게 찍으면 관광이다. 여행은 현지에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보고 듣고 만지며 즐기는데, 관광은 일단 빨리빨리 많은 곳을 휙휙 다니면서 인증샷만 한 뒤에 나중에 사진을 보며 되새김질을 한다. 출발부터 숙소, 식당, 도착에 이르기까지 모든 일정이 정해져 있는 것은 관광이고, 많은 부분을 현지에서 해결하는 경우는 대부분 여행이다. 관광에 비해 여행은 확실히 정해진 바가 적어 불안한 요소가 많다. 그런데 그게 재미다.

사실 나를 제주의 길로 이끌어준 것은 사소함과 우연, 충동과 무계획이다. 그렇게 나선 길에서 제주의 역사와 문화의 흔적을 만나게 된 것이 최고의 기쁨이다. 멀게는 수십만 년 전 지질활동부터 가깝게는 생존해 있는 분들로부터 들은 4·3의 상처까지, 그리고 이중섭과 김영갑이 사랑했던 곳곳을 다니면서 만나게 된 것들로 해서.

생각해 보니 나는 관광이 아닌 여행을 하고 있다.

그래서 쓰기로 했다.

 

신인의 탄생에서 탐라 건국까지

“삼촌, 한라산에서 공을 차면 바다로 빠져요?”

서울에 사는 어린 조카가 물은 적이 있다. 표정이 하도 진지하기에 나도 장난삼아 “한라산에 설문대할망이라는, 키가 1000미터나 되는 큰 신(神)이 살고 있는데, 그 할망이 한라산에서 공을 차면 공이 하늘을 날아가 바다에 빠진대.” “에이, 요즘 그런 신이 어딨어요.”

제주도가 동네 운동장 만하다는 말은 믿으면서 신이 있다는 말은 믿지 못하겠다는 눈치다. 그래서 한라산이 지리산, 설악산은 물론이고 중국의 태산보다 훨씬 높다고 설명해 주었다. 여름 휴가철에 가 본 적이 있는 설악산과 지리산을 떠올리며 한라산이 그보다 더 높다는 말에 놀란 표정을 지었다. 거기다가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 아래 뫼이로다’에 나오는 그 태산보다 한라산이 더 높다고 하니 아예 입을 딱 벌리고는 세상에서 한라산이 제일 높은 줄로 여기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산이 높으면 골짜기도 깊고, 그러면 어김없이 많은 이야기가 얽혀있게 마련이다.

제주에는 창조신 설문대할망의 신화가 있다.

「설문대할망은 치마에 흙을 담아 와 제주도를 만들고, 다시 흙을 일곱 번 떠놓아 한라산을 만들었다. 한라산을 쌓기 위해 흙을 퍼서 나르다 치마의 터진 부분으로 흙이 새어나와 작은 봉우리를 만들었다. 또 한라산 봉우리가 너무 뾰족해서 그 부분을 꺾어서 잡아 던지니, 아랫부분은 움푹 패여 백록담이 되고 윗부분은 산방산이 되었다.

주먹으로 봉우리를 쳐서 만든 것이 다랑쉬오름의 굼부리이고, 성산포 일출봉 기슭의 등경돌은 설문대할망이 바느질을 할 때 등잔을 올려놓았던 받침대라고 알려져 있다. 설문대할망은 키가 워낙 커서 한라산을 베고 누우면 다리가 관탈섬까지 뻗었는데, 관탈섬에 난 구멍은 할망이 다리를 잘못 뻗어 생긴 것이다. 관탈섬과 마라도를 밟고 우도를 빨랫돌로 삼아 빨래를 했는데, 오줌줄기가 너무 세어 지금도 우도와 성산 사이의 조류가 거칠다고 한다.

설문대할망은 제주 사람들에게 명주로 속옷을 만들어 주면 육지까지 이어지는 다리를 만들어 주겠다고 제안했다. 사람들이 좋아라 하며 명주를 모으기 시작했지만 99통밖에 모으지 못했다. 결국 1통이 모자라 속옷을 만들지 못하자 설문대할망도 다리 놓던 일을 그만두었는데, 그때 다리를 놓던 흔적이 북제주군 조천과 신촌 사이에 뻗어나간 엉장매이다.

설문대할망은 큰 키를 자랑하며 깊다는 물을 다 찾아다녔다. 용담의 용연은 발등까지 왔고, 서귀포 서홍리 홍리물은 무릎까지밖에 차지 않았다. 그러다가 한라산 중턱에 있는 '물장오리'에 들어갔는데, 물장오리 밑이 뚫려 있어 그만 빠져죽고 말았다.」

설문대할망에게는 또 다른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홀어머니가 5백 명이나 되는 아들들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어느 해 흉년이 들어 하루 한 끼 먹는 것도 어렵게 되었다. 하루는 아들들이 양식을 구하려고 밖으로 나간 사이, 어머니는 저녁때가 가까워 오자 아들들을 위하여 죽을 끓였다. 그런데 죽을 젓다가 아차 하는 사이 끓는 가마솥에 빠지고 말았다.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아들들은, 어머니는 보이지 않고 가마솥에서는 죽이 펄펄 끓고 있자 우선 허기를 채우려고 죽을 퍼먹었다. 5백 명의 아들 중 제일 막내가 마지막으로 죽을 뜨려는 순간 국자에 무엇인가 걸려 나왔다. 바로 어머니의 뼈였다.

막내아들은 너무나 슬프고 기가 막혀서 소리를 지르며 단숨에 제주도 서쪽 끝에 있는 차귀도까지 달려갔다가 돌이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외돌개라고 한다. 나머지 499명의 아들들도 어머니를 먹은 것을 알고는 자책감에 그 자리에서 굳어져 영실기암이 되었단다. 그래서 영실에 있는 기암이 5백 개가 아니라 499개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치마에서 흐른 흙은 360개가 넘는 오름이 되고 아들들이 죽어 굳어진 바위는 지금 영실 주변의 오백장군으로 불리고 있다.

이렇듯 제주의 창조신은 어둠을 갈라 낮과 밤을 만들고 하늘과 땅을 지배하는 서구의 신들과 달리 덩지만 컸다 뿐이지 초인적 능력도 없고 경제력도 없는 불쌍한 신이다. 얼마나 가난했으면 치마가 터져 흙이 쏟아지고 속옷 하나 제대로 된 게 없어 사람들에게까지 손을 내밀고, 거기다가 자식들에게 죽을 끓여줄 수밖에 없었을까. 특히 자식들에게 죽을 끓여주려다 솥에 빠져 죽었다는 얘기에는 애잔하다 못해 인간적인 연민마저 느껴진다.

또 다른 신화가 있다.

「옛날에 한라산 기슭 북쪽 모흥혈(毛興穴)에서 영롱한 자줏빛 기운이 비치더니 세 명의 신인(神人)이 솟아났다. 그들이 ‘고을라, 양을라, 부을라’이다.

하루는 그들이 한라산에 올라 수렵을 하던 중 동쪽 바닷가에 목함이 떠밀려 온 것을 발견하고 가서 목함을 열어보니 세 명의 여인과 사자(使者), 마소와 오곡종자가 들어 있었다. 세 여인은 벽랑국의 공주였는데, 세 신인은 그녀들과 혼인을 하고 신방을 차렸다. 세 공주를 맞이한 곳이 연혼포(황루알), 그녀들이 목욕재계한 곳이 혼인지, 그리고 그들이 신방을 차린 곳이 신방굴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어느 날 삼을라는 높은 언덕(쌀손장오리)에 올라 활을 쏘는데, 화살은 멀리 날아가 지금의 일도, 이도, 삼도에 각각 떨어졌다. 양을라, 고을라, 부을라 순서대로 일도, 이도, 삼도에 터를 잡아 오곡을 심고 말과 소를 기르며 사니 부유해졌다. 그들은 이윽고 탐라국을 건국하였다.」

이것이 제주도에 최초로 사람의 흔적이 생기고 나라가 세워지게 됐다는 또 다른 신화의 내용이다. 여기서도 역시 신성성이나 초능력을 확인하기 어렵다. 이러한 탈신격화는 곧 역사성을 띠기 시작하는 것이기에 이들 신화 속 인물들의 탄생과 만남, 혼인, 거주지 결정 등에 관한 이야기에서 제주도민의 발상과 탐라국 건국의 역사성을 엿보게 된다. 아울러 그 이야기의 현장을 순서대로 밟아보는 것은 원시림에 발을 들여놓는 것처럼 놀랍고 흥분되는 일이다.

아무래도 첫 번째 행선지는 삼성혈이 되는 게 순서다. 설화 속 신인의 고향 모흥혈(毛興穴). 지금 제주시 칼 호텔과 제주민속자연사박물관의 중간쯤에 있다.

세 명의 신인(神人) 삼을라의 존재도 인간적 측면에서는 설문대할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늘에서 내려와 도읍을 정해 나라를 다스리는 금수저가 아니라 땅에서 솟아 이리저리 떠돌다 이웃나라 세 공주를 만나 혼인을 하고서야 비로소 정착한 유목민 신세였으니 말이다. 그래서 신보다는 인간에 가깝고 그들에 관한 이야기는 신화보다는 전설에 가깝다. 특히 하늘에서 강림한 것이 아니라 땅에서 용출했다는 것은 설문대할망이 그렇듯 여성성이 강한 제주의 문화와 밀접한 관련이 있어 보인다.

돌하르방이 마주 서서 지키고 있는 입구에서 표를 끊고 정문을 들어서니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치 새로운 세상에 들어선 것 같다. 아주 오래 전 신인(神人)의 탄생지였다는 이야기와 몸통 굵은 곰솔을 비롯하여 녹나무·팽나무·구실잣밤나무·왕벚나무가 의젓이 서있는 사이사이에 배롱나무·백리향·철쭉·회양목·춘란·명문초·풍란 등이 어우러져 고즈넉하면서도 예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곧 이어 움푹 팬 땅에 삼각형 꼴로 세 개의 구멍이 난 곳이 나오는데 그곳이 삼신인이 태어난 곳이다. 주위에는 나무들이 마치 시위(侍衛)하듯 가운데로 향해 가지를 늘이고 있다. 이곳은 폭우가 쏟아져도 고이지 않고 폭설이 내려도 쌓이는 일이 없다고 한다. 이런 곳에 와서 그것을 과학적으로 따져보자고 덤비는 사람은 멋대가리 없는 촌놈들뿐이다.

삼성혈 입구 표지석(왼쪽). 고양부 삼신인이 솟아났다는 세 개의 구멍(오른쪽).
삼성혈 입구 표지석(왼쪽). 고양부 삼신인이 솟아났다는 세 개의 구멍(오른쪽).

삼성혈 경내는 삼을라의 위패가 봉안된 삼성전과 부속 건물들로 이루어져 있다. 특이한 점은, 서생들이 면학하던 <숭보당>이라는 서원(書院)이 경내에 있다는 사실이다. 조상이 잠들어 있는 사당에서 글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리는 상황이 얼핏 상상하기 쉽지 않다. 후손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것을 조상님들도 기뻐하시는 모양이다.

위패가 봉안되어 있는 삼성전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봄가을에 춘추제를 지내고, 혈단에서는 매년 12월 10일 건시제를 행하고 있다.

오래 된 나무와 거기에 둥지 튼 새들의 날갯짓 소리, 나뭇잎을 연하게 만드는 햇살, 그 속에서 신비로움을 간직한 채 고요히 자리하고 있는 신화의 흔적은 도심 속의 색다른 정원이기도 하다. 숲속을 거닐고 있자니 누군가 이야기를 건네는 것 같다. 어쩌면 수천 년 전 제주의 조상인지도 모른다.

삼성혈이 훼손되지 않고 지금껏 보존될 수 있었던 것에는 한 사람의 목숨 걸었던 일화가 있다.

일제강점기 때 삼성혈 내 거목들이 진지 구축용으로 잘려 나갈 위기를 맞이했는데, 일본 사령관에게 불려간 고인도 이사장(1896~1962)은 “나무를 내놓고 자손들에게 맞아 죽으나 내놓지 않고 맞아 죽으나 죽기는 매일반이니 승낙할 수 없다.”고 한 얘기가 전해온다. 꼬장꼬장한 선비정신이 역사와 문화를 지켜내고 있다.

경내를 한 바퀴 돌아보는 동안 햇살이 나무와 나무 사이를 통과하면서 연한 초록빛을 퍼뜨려놓고 있다.

향기 좋은 차 한 잔 마신 기분으로 삼성혈을 나와 차를 달린 곳은 성산읍 온평포구. 일출봉에서 남쪽으로 10여 분 거리다.

삼성혈에서 나온 세 신인은 열매를 따먹고 들짐승을 잡아먹는 야생생활을 하다 이곳에서 우연히 동해 벽랑국에서 온 삼공주를 만나게 된다. 그녀들은 오곡 종자와 가축을 가지고 목함을 탄 채 이곳 온평 바닷가인 화상개[花箱浦]에 도착한다. ‘꽃상자’. 공주들이 꽃처럼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거기서 조금 안쪽에서 삼공주를 맞이한 곳이 연혼포인데, ‘신성한 물가’라는 의미를 가진 황루알이다.

바닷가에는 <연혼포(延婚浦)>라고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고, 해안의 밀물과 썰물 때 잠겼다 드러나는 부분인 조간대 바위에는 말발자국이 찍혀 있는데 밀물이 들면 잠겨서 보이지 않는다. 내가 가던 날도 물이 차 있었다.

연혼포 표지석(왼쪽). 세 공주가 도착한 온평리 바닷가(오른쪽).
연혼포 표지석(왼쪽). 세 공주가 도착한 온평리 바닷가(오른쪽).

「... 하루는 한라산에 올라 멀리 바라보니 자줏빛 흙으로 봉한 목함이 동해 쪽으로 와서 머물러 떠나지 않는 것을 보고 삼인은 내려가 이를 열고 본 즉, 속에는 새알 모양의 옥함이 있고 자줏빛 옷에 관대를 한 사자가 따라와 있었다. 또 옥함을 여니 푸른 옷을 입은 처녀 세 사람이 있었는데 모두 나이는 15,6세요 용모는 품위 높고 아리따움이 보통이 아니었고 각각이 아름답게 장식하여 같이 앉아 있었다. 또 망아지 송아지와 오곡의 종자도 가지고 있었는데 이를 해안에 내려놓았다. 세 신인은 모두 즐거워서 말하기를 이는 반드시 하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 하였다.

사자는 두 번 절하고 엎드려 말하기를 “나는 동해 벽랑국(碧浪國)의 사자올시다. 우리 임금님이 이 세 공주를 낳으시고 나이가 다 성숙함에도 이들의 배우자를 얻지 못하여 항상 탄식함이 한 해가 넘는데 근자에 우리 임금님께서 자소각에 오르시어 서쪽 바다의 기상을 바라보시더니 자줏빛 기운이 하늘을 이어 상서로운 빛이 서리는 것을 보시고 신자 세 사람이 절악(絶岳)에 내려와 있어서 장차 나라를 열고자 하나 배필이 없어 하고 있어 신더러 명하여 세 공주를 그곳으로 데려가라 하여 왔으니 좋도록 짝을 짓는 예를 올리시고 대업을 이룩하소서.” 하고는 홀연 구름을 타고 사라져 버렸다.

세 신인은 곧 목욕재계하여 하늘에 고하고 나이 차례로 그녀들과 혼인하여 물 좋고 기름진 땅을 골라 활을 쏘아 땅을 정하니 오늘날 일도, 이도, 삼도라 하였다. 이로부터 산업을 일으키기 시작하여 오곡의 씨를 뿌리고 송아지 망아지를 치니 날로 번성하여 부유하게 되어 드디어 인간세계를 이룩하여 국호를 탐라라 하였다.... 」

옥함 속에서 나온 여인들이 15,6세. 지금으로 치면 중3이나 고1쯤 되는 나이니 퍽이나 조숙했나 보다. 아무튼 환영인사를 마친 그들은 혼인지로 자리를 옮겨 연못에서 목욕을 하고 혼례를 치른다. 지금 혼인지 입구에는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탁라가(乇羅歌)라는 한시 14수 중 두 번째 수가 새겨진 비석이 세워져 있다. 15세기 중엽 김종직은 나라에 토산품을 바치러 온 제주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이 시를 지었다고 한다. 탁라는 제주의 다른 이름이다.

‘當時鼎立是神人 伉儷來從日出濱 百世婚姻只三姓 遠風見說似朱陳’(당초의 신인 세 사람이 세 발 달린 솥발처럼 갈라서 도읍하시어 해 돋는 물가에서 배필을 맞으셨다네. 백 대에 세 성만이 교차혼인하다 보니 그들이 남긴 풍속, 중국 주진촌과 같다네.)

※주진촌 : 중국의 서주 고풍현에서 주씨와 진씨 두 성이 서로 혼인하면서 화목하게 살았던 촌락 이름.

벽랑국삼공주추원비(왼쪽). 혼인지 입구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탁라가(乇羅歌)를 새긴 비석이 있다(오른쪽).
벽랑국삼공주추원비(왼쪽). 혼인지 입구 김종직(金宗直)이 지은 탁라가(乇羅歌)를 새긴 비석이 있다(오른쪽).

연못 바로 옆에 삼신인이 혼례를 올린 뒤 신방을 차렸다는 신방굴이 있다. 굴 내부는 세 갈래로 갈라져 있어 신화의 내용을 그럴 듯 하게 뒷받침하고 있다. 굴에서 토기와 석기의 파편이 출토된 것으로 봐서 선사시대 바위그늘 유적지(Rock-shelter)가 분명해 보인다. 신방굴은 신화와 역사가 만나는 교착점이다.

수련이 예쁘게 떠있는 혼인지(왼쪽). 수련에서 세 공주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삼을라와 세 공주가 첫날을 지낸 신방굴(오른쪽).
수련이 예쁘게 떠있는 혼인지(왼쪽). 수련에서 세 공주의 모습을 떠올려 본다.삼을라와 세 공주가 첫날을 지낸 신방굴(오른쪽).

신혼의 단꿈에서 깨어난 세 쌍의 부부는 한라산 북쪽 기슭 쌀손장오리에 씩씩하게 올라 활을 쏴 각각의 영역을 정한다. 가정도 이루었으니 앞으로 영토를 정해 농사도 짓고 자손도 나으면서 잘 살아보자는 약속을 했을 것이다.

고양부 세 신인이 쏜 화살은 지금의 제주시 일도, 이도, 삼도에 나란히 떨어진다. 그래서 일도는 고을라, 이도는 양을라, 삼도는 부을라가 각각 영역을 차지해서 세 공주들이 가져온 곡식과 가축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그들이 쏜 화살이 날아가 맞은 돌이 삼사석(三射石)인데 지금 화북 주공아파트 북쪽 도로변에 세워져 있다. 돌로 만든 각실(閣室)은 지붕형 갓돌, 몸통, 그리고 대석(臺石)으로 되어 있다.

삼을라는 각자의 후손을 만들고, 그 후손들이 일가를 이루면서 부족이 만들어지고 이는 훗날 탐라국 건국의 기초가 되었을 것이다.

신화를 인류의 삶과 따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가 없다. 신화는 자신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와 지역의 시선으로 만들어낸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화 속에는 역사뿐 아니라 정치와 사회, 문화, 사람들의 정서까지 무르녹아 있다. 그러니까 삼신인이 땅에서 태어났다는 이야기에는 대지모(大地母) 사상이 바탕이 되는 제주인의 정서와 문화가 반영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외국 공주와의 혼인, 마소와 오곡의 씨앗, 일도·이도·삼도라는 지역의 분할과 탐라국 건설은 외래문화 유입, 채집과 수렵에서 정착농으로의 변천, 그리고 지배자 출현과 정치조직의 형태 등을 엿볼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된다. 이런 내용은 영주지(瀛洲誌), 영주지 이본(異本), 성주고씨전, 고려사지리지 등 여러 문헌에 실려 있다.

오늘날 제주도의 시초가 되는 탐라국에 관한 구체적인 기록이 많지 않은 게 안타깝지만 그나마 서귀포시 하원동에 <탐라국왕자묘> 3기가 남아 있는 게 위로가 된다. 아래로부터 위쪽으로 세 개의 묘가 있는데, 1호분의 문인석 2개 중 1개의 머리부분이 훼손되어 없어졌다.

문인석이 있는 1호분(왼쪽). 2호분과 3호분에는 문인석이 없다(오른쪽).
문인석이 있는 1호분(왼쪽). 2호분과 3호분에는 문인석이 없다(오른쪽).

그리고 제주시에서 번영로로 들어서는 길목인 화북의 거로사거리를 지나 약 500미터를 가면 황세왓과 거로마을로 갈라지는 갈림길이 있는데, 그 부근에 <거로 능동산 방묘>가 있다. 밑둘레가 네모난 모양을 일컫는 이 방묘는 탐라 마지막 성주 고봉례와 그의 부인 남평 문씨의 묘로 추정되는 성주묘로 알려지고 있다. 방묘는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특징적인 묘의 형식인데 하원동의 탐라왕자묘를 비롯해 몇 군데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잡초가 우거져 받침돌은 물론 봉분도 제대로 보이지 않아 뒤쪽에 ‘이곳이 탐라 마지막 성주 고봉례 부부의 묘’입니다, 하는 설명표지판이 없다면 이곳이 한 나라의 마지막을 지킨 왕의 묘라고 누가 믿을까. 단지 문화재를 관리하는 담당 공무원만의 잘못일까?

탐라성주 내외가 합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묘가 잡초로 뒤덮여 있다.
탐라성주 내외가 합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묘가 잡초로 뒤덮여 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탐라의 초기시대인 ‘주호(州胡)’라는 명칭이 나오고, <고려사 권57>에도 ‘탐라현’에 관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탐라국을 고려정부에서 탐라현으로 격하시켰지만, 그 이전까지는 자치권을 가진 고대국가로서 중국, 일본과 교역을 했다는 기록이 또렷하게 남아있다. 그 후 몽고에 의해 지배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다가 조선 태종 2년인 1402년에 ‘제주’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그로부터 제주는 전라남도에 달린 섬으로 제주도(濟州島)로 불리다가 1946년에 도(道)로 승격되었고, 2006년 7월 1일에 제주특별자치도로 출범하게 된다.

훗날 원(元)은 남송과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탐라에 총관부를 설치하여 지배하려 든다. 그런데 그들의 천 년 전 역사서에 탐라에 관한 기록이 있으니 우리의 존재가 침략국에 의해 증명되고 있는 셈이다.

종교적 신앙이란 무엇인가. 누가 신의 존재를 눈으로 확인한 적이 있는가. 그럼에도 신앙인들은 신의 존재를 굳게 믿고 있지 않은가. 비록 신화가 허구적 상상력에 의해 만들어지고, 역사가 힘 있는 세력의 편에서 기록된다 하더라도 제주의 신화와 탐라국 역사는 우리 제주의 뿌리임에 틀림 없다.

기록적인 더위로 체력이 바닥났지만 삼성혈로부터 온평리 바닷가, 혼인지와 쌀손장오리, 화북, 일·이·삼도동, 하원, 거로에 이르기까지의 답사는 단순히 지리적 이동에 그친 것이 아니라 아주 오랜 옛날 옛적 설화 속으로 들어갔다 나온 시간여행이 꿈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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