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그림이 있는 풍경] 그림자와 빛
[시와 그림이 있는 풍경] 그림자와 빛
  • 김용국(시인)
  • 승인 2018.10.01 18:53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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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와 빛

빛이 있어야 그림자가 있다고 말하지만,
그림자가 있어야 빛이 있다.

해녀의 숨비소리에 내려앉는 공기와
시간이 다 빠져나간 몸에서 부르는 시간과
먼 길을 밤새 걸어온 나그네의 유예된 잠과
떠나간 사랑을 부르는 애달픈 혀가 그렇다.

있음을 당연히 있음으로 여기거나
있음으로 있음 자체를 모를 때,
우리는 가장 위험한 곳에 있는 지도 모른다.

그림자의 변경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빛의 가운데로 걸어 갈 기회를 갖는다.

그림자가 빛을 탄생시키는 순간이다.

‘숨비소리’는 해녀들이 물질할 때 깊은 바닷속에서 해산물을 캐다가 숨이 턱까지 차오르면 물 밖으로 나오면서 내뿜는 휘파람 소리라고 합니다. 산소가 다 소진된 몸에서 간절하게 산소를 원하는 소리지요. 죽음에 다다른 사람의 시간, 누적된 피로로 고통 받는 사람, 사랑을 상실한 사람을, 지상에서 편하게 숨 쉬는 사람이, 힘이 넘치는 젊은이들이, 노동의 고리에서 벗어난 사람이, 이별이 없을 것 같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알 턱이 없습니다.

우리는 빛 속에 있을 때 빛을 모릅니다. 젊었을 때 젊음을 모릅니다. 편안할 때 편안함을 모르고 건강할 때 건강을 모릅니다. 가운데 있을 때 변방의 외로움을 모릅니다. 충만함과 만족함에 깃들어 있을 때 우리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런 안락함에 있을 때 우리는 나태해집니다. 그대로 멈춥니다. 아무런 창의나 신선한 고민과 사색이 없습니다. 그러니 그 때가 가장 위험할 때가 되겠지요. 찬 달이 기울 듯이 말입니다.

빛 속에 있을 때 빛을 보지 못합니다. 변방에서 그림자를 밟을 때 비로소 빛의 의미를 압니다. 결핍과 결여, 불편함이 우리를 움직이게 하는 힘을 제공합니다. 그래서 이 시의 제목이 ‘빛과 그림자’가 아니라 ‘그림자와 빛’인 이유입니다.

유정이 교수의 작품. SHE-바리데기
유성이 교수의 작품. 'SHE-바리데기'

김용국(金龍國) 시인 약력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30년 넘게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타악기풍으로』, 『생각의 나라』, 『다시 나를 과녁으로 삼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당신의 맨발』 등이 있으며 동인지 『비동인 (非同人)』으로 활동했다. 월간 『베스트셀러』에서 제정한 제1회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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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kfmadl 2018-10-23 07:01:27
아름다운 역발상입니다.

윤선한 2018-10-10 11:27:52
따뜻한 글 잘 읽고 갑니다.

용국님 바라기 2018-10-06 12:44:45
영원한 팬입니다
글 잘 읽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