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출처 = 픽사베이
사진 출처 = 픽사베이

옛날 아빠가 어릴 적에 메주를 쑤는 날은 마치 명절처럼 온 집안이 부산스러웠다고 합니다. 부엌의 커다란 가마에서 콩이 익기 시작하면 아이들 입에서는 군침부터 돌았습니다. 모락모락 김이 피어오르는 삶은 콩을 먹을 수 있었으니까요.

익은 콩은 절구에 곱게 찧어 메주틀에 넣습니다. 그리곤 하얀 버선을 신은 아낙네들이 그 위에 올라가 꼭꼭 밟으며 네모난 메주를 만듭니다. 버선발로 밟는 이유는 콩의 단백질이 잘 결합되어 미생물의 발효가 잘 되게 하기 위해서였죠. 그렇게 만들어진 메주는 안방과 아랫방의 벽에 주렁주렁 매달려 겨우내 구수한 냄새를 피워냈습니다. 봄이 되면 하얀 곰팡이가 핀 메주를 깨끗이 씻어 말리고 나서, 큰 장독에 소금물과 함께 담급니다. 이때 숯 덩어리와 붉은 고추를 몇 개 같이 넣는 것을 빠뜨리면 안 됩니다. 숯을 넣는 것은 나쁜 귀신이 숯 구멍으로 들어가 나오지 못한다고 믿었으며, 고추는 붉은 색깔과 매운 성질 때문에 나쁜 귀신이 싫어한다고 생각한 거죠.

그처럼 사람의 정성과 세월의 깊음 속에서 된장은 맛깔스런 제 맛을 담아냈습니다. 우리 조상들이 메주를 담글 때 장독에 숯과 고추를 넣은 것은 단지 귀신을 쫓는다는 미신적인 이유 때문만이었을까요. 그래서 그처럼 깊은 된장 맛이 우러났던 것일까요.

고추에는 매운 맛을 내는 캡사이신이란 성분이 들어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캡사이신은 이외에도 살균 효과라는 또 다른 효능을 지니고 있습니다. 붉은 고추를 장독 안에 넣어두면 살균 효과로 인해 잡균이 서식하지 않아 된장 맛이 변질되는 것을 막아주죠. 이처럼 조상들의 행동에는 다 과학적인 이유가 숨어 있었습니다. 그럼 붉은 고추와 함께 넣었던 숯에는 어떤 효능이 숨겨져 있을까요.

“그에 대해 상세히 알기 위해선 경남 합천군에 있는 해인사 장경각의 비밀을 알 필요가 있어.”

“아빠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팔만대장경이 700여 년이나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훌륭하게 보존되어 있는 비밀에 대해 설명해주기 시작했습니다.

“한번은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장경각에 있는 팔만대장경을 현대식 건물에 옮겨 보관한 적이 있어.”

그러자 경판이 틀어지기 시작하여 다시 제자리로 옮길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물론 그 현대식 건물에는 경판 보관에 적절한 습도와 온도를 조절하는 장치가 갖추어져 있었죠. 해인사 장경각에서는 700여 년 동안 아무 이상이 없었던 팔만대장경이 왜 첨단 현대식 건물에서는 견디지 못했던 걸까요.

거기에는 장경각만의 비밀이 있었습니다. 장경각의 지하에는 아주 많은 양의 숯과 소금, 그리고 횟가루가 묻혀 있습니다. 즉, 숯이 목판 보존의 절대적 조건인 습도를 아주 적절하게 조절하였던 거죠. 그럼 숯의 이 같은 습도 조절 작용은 어떻게 일어나는 것일까요.

“아까 장독에 숯을 넣는 것은 나쁜 귀신이 숯 구멍으로 들어가 나오지 못하게 하려는 미신 때문이라고 했지. 바로 그거야. 숯의 비밀은 숯에 나 있는 무수히 작은 구멍에 있어.”

맨눈으로는 보이지 않지만 전자현미경으로 숯을 들여다보면 마이크로미터(1백만분의 1미터) 단위의 아주 작은 구멍들이 수없이 많은 것을 관찰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런 구멍들의 표면을 다 이어서 붙인 표면적이 숯 1g당 무려 300㎡나 된다네요.

300㎡라면 약 90평 넓이로서 웬만한 테니스장 크기입니다. 숯 1g의 표면적이 테니스장 크기라니 얼마나 많은 구멍이 나 있는지 상상이 되나요?

메주를 담글 때 숯을 넣는 과학적 근거도 바로 이 무수히 작은 구멍에 있습니다. 된장은 발효식품이므로 발효를 돕는 미생물이 잘 살 수 있어야 합니다. 숯의 미세한 구멍들이 그 미생물들의 서식지가 되는 거죠.

그러나 그 구멍에는 곰팡이같이 덩치가 큰 나쁜 미생물은 살지 못합니다. 즉, 숯을 넣음으로써 나쁜 미생물은 없애고 발효를 도와주는 우리 몸에 유익한 미생물만 살 수 있게 한 겁니다.

숯의 역할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숯에는 탄소가 85%, 미네랄이 10% 이상 들어 있습니다. 탄소는 환원작용을 하므로 역시 된장의 부패를 막는 작용을 합니다. 그리고 미네랄은 그대로 된장에 녹아들게 됩니다. 따라서 숯을 넣어 담근 된장은 미네랄이 풍부해지는 거죠. 미네랄은 우리 몸의 신진대사를 도와주는 물질로서 된장의 맛을 높여주는 역할도 합니다.

이 같은 효능 때문에 숯은 예로부터 우리 생활 곳곳에서 아주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쌀과 콩 등 곡식을 보관하는 광에는 숯을 사용해 곡식을 썩지 않도록 했고, 관청의 무기고에도 숯을 이용하여 창과 칼 등의 무기들이 녹슬지 않도록 했습니다.

또 마을 주민 모두가 사용하던 우물 밑에도 숯이 깔려 있었습니다. 우물 바닥에 숯을 깔면 이물질을 빨아들이는 정수기 역할은 물론 미네랄 덕분에 물맛이 좋아졌던 거죠.

저작권자 © 뉴스로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