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한강변의 폐사지

절터는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곳이다. 정갈하게 화병에 꽂힌 꽃이 금당에 놓이는 대신 논틀에서 눈부시도록 빛나는 억새가 헌화 공양을 하고, 법당이 있을 법한 곳에 제 마음껏 피어난 노란 들국화가 짙은 향기로 향(香) 공양을 올리는 그런 곳 말이다. 부처님 앉으셨던 자리에는 새들이 머물다 떠나고, 부처님 사리 모신 탑에는 바람이 부딪쳐 부서지곤 할 뿐인 것이다. -이지누 <절터, 그 아름다운 만행> 중에서

유홍준은 그의 책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동행한 어머니의 입을 빌어 폐사지를 ‘망한 절’이라 했다. 그 말이야 세간의 생각을 곧이곧대로 표현한 것이겠지만, 어찌 절간에 흥망이 있을 것이며 설사 흥망이 있다 한들 무에 대수이겠는가. 빈 절터는 비어있음으로 가득하다. 그것이 곧 ‘만공(滿空)’이니 그것으로서 족하다. 아니, 어떨 때는 빈 절터가 훨씬 더 절간답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빈 절터를 서성일 때 마음은 홀로 외롭고 홀로 따스하다. 그것이 곧 ‘독공(獨空)’이니, 그곳에 비로소 길이 있다.

손곡시비. 이달의 ‘보리 베는 노래’가 새겨진 비석에 누군가 일부러 그런 듯 흙칠이 되어 있다. 손곡시비 옆에는 임경업장군추모비가 서있다. 임경업이 이곳 손곡리 출신이라 한다. ⓒ유성문
손곡시비. 이달의 ‘보리 베는 노래’가 새겨진 비석에 누군가 일부러 그런 듯 흙칠이 되어 있다. 손곡시비 옆에는 임경업장군추모비가 서있다. 임경업이 이곳 손곡리 출신이라 한다. ⓒ유성문

여주에서 원주를 거쳐 충주까지, 남한강을 거슬러 올라갈 때 곳곳에 옛 절터를 만난다. 고달사지, 흥법사지, 법천사지, 거돈사지, 청룡사지…. 지금은 한갓 쓸쓸한 폐사지일 뿐이지만 한때 화려했던 남한강 수운(水運)의 역사가 남긴 흔적들이다. 번창하던 시절을 뒤로 한 채 고즈넉하게 남아있는 이 절터들은 그 흥망의 무상으로 해서 ‘폐사지 기행’의 1번지가 된다.

여주의 고달사지에서 시작, 섬강 가의 흥법사지를 돌아 원주 옛 흥원창(興原倉) 부근의 절터를 찾아가는 길에 생각지도 못한 한 사람의 흔적을 만난다. 부론면 손곡리 마을 한 귀퉁이에 세워진 손곡(蓀谷) 이달(李達, 1539∼1612)의 시비(詩碑).

田家少婦無夜食 시골집 젊은 아낙 저녁거리가 없어서

​雨中刈麥林中歸 빗속에 보리를 베어 숲을 지나 돌아오네

​生薪帶濕煙不起 생섶은 습기 머금어 불도 붙지 않고

​入門兒子啼牽衣 문에 들어서니 어린 자식이 옷을 끌며 우는구나

이달이 누구인가.

손곡산인(蓀谷山人) 이달은 자가 익지(益之)이다. 고려 말 이첨의 후손으로서 귀족의 신분이지만, 모친이 기생이었으므로 세상에 나와 등용되지 못하고 원주의 손곡리에 살았다. …그의 마음은 항상 텅 비어 한계가 없었으며, 살림살이를 돌보지 않아 언제나 가난했다. 이 때문에 평생을 떠돌아다니며 걸식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를 천하게 여겼다. …그의 몸은 곤궁했지만 그의 시는 영원할 것이니, 어찌 한때의 부귀로써 그 이름을 바꾸겠는가?(허균 ‘손곡산인전’)

법천사지. 발굴공사가 한창인 가운데 논틀을 따라 당산나무까지 구절초가 하얗게 피었다. ⓒ유성문
법천사지. 발굴공사가 한창인 가운데 논틀을 따라 당산나무까지 구절초가 하얗게 피었다. ⓒ유성문

조선 중기 최경창·백광훈과 함께 ‘삼당시인(三唐詩人)’으로 꼽혔던 이달의 이름이 각별한 것은 허균·허난설헌 남매의 스승으로써다. 신분제약의 울분을 안고 세상을 떠돌던 이달은 손곡리에 잦아든 후 강릉 초당 허씨집안 허봉의 소개로 그의 손아래 남매에게 글을 가르쳤다. 장차 반역을 꾀했다는 이유로 극형에 처해진 조선의 풍운아 허균, 가부장제의 억압 속에서 세상과 불화하다가 스물일곱에 요절한 비운의 여성시인 허난설헌. 허균이 스승 이달을 모델로 ‘홍길동전’을 지었다 하니, 참으로 위험하고도 허망한 꿈은 그렇게 이어진 것인가.

손곡시비에 이르기 전 마을 들머리에 서있는 수상한 건물 하나를 만난다. 창고려니 했는데, 덜렁 달려있는 간판이 예사롭지 않다. ‘이달의 꿈’-. ‘광대패 모두골’이 농협창고를 개조해 세운 예술극장이다. 원주 민속연구회에서 활동하던 청년들이 공동체 회복을 꿈꾸며 손곡리에 자리 잡은 것이 2001년쯤, 그들은 판소리, 대동굿의 복원뿐만 아니라 손곡학당 개설 등을 통해 이곳에 자립과 공생의 터전을 이루려 했다. ‘신화마을 프로젝트’ 등 한때 야심차게 펼쳐나가던 그들의 꿈은 이러저러한 현실에 시달리면서 흔들리기도 했다는데, 하필 굳게 닫힌 문 앞에서 저간의 사정은 물을 길이 없었다. 그들이 ‘이달의 꿈’을 통해 본 꿈의 현실은 무엇이었을까.

흥법사지를 돌아나온 섬강의 물줄기는 문막 들판을 적시며 흥호리에서 남한강과 하나가 된다. 흥호리는 강을 사이에 두고 경기도와 강원도가 마주하고 있으며, 남쪽으로 조금만 발을 내딛으면 곧바로 충청도 땅이 시작되는 이른바 삼도(三道)의 접경지대다. 촌로들에 의하면 겨울철 강물이 얼면 담배 한 대참에 삼도를 다 밟아볼 수 있으니 ‘삼합지점’이라고도 하고, 또 삼도의 물이 한 데로 모인다 하여 ‘합수머리’라고도 한다. 그런데 모여지는 것은 물만이 아니었다. 삼도의 물산(物産)과 세미(稅米)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여들었으니, 고려 개국과 함께 흥성했던 흥원창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거돈사지 가는 길. 너머너머 미륵산은 아득한데 잠시 왼쪽으로 꺾여야 빈 절터에 이른다. ⓒ유성문
거돈사지 가는 길. 너머너머 미륵산은 아득한데 잠시 왼쪽으로 꺾여야 빈 절터에 이른다. ⓒ유성문

법천사는 여기에 ‘법(法)’의 물을 더한다. ‘진리가 샘물처럼 솟는다’는 법천사. 지금은 절은 없어지고 너른 절터에 마을이 들어서 있는데, 그마저 폐가된 농가가 군데군데 섞여 있어 심란하기조차 하다. 폐가와 폐사의 운명은 이처럼 같은 무게로 스산하게만 다가오는 것인가. 마을 이름인 법천리가 절 이름에서 유래되었을 만큼 거찰이었을 법천사는 여직 도량의 규모조차 짐작키 어려웠는데, 최근 발굴조사로 그 전모를 더듬어가고 있는 중이다. 하지만 발굴공사로 여기저기 파헤치는 바람에 가뜩이나 스산하던 절터는 더욱 어수선해지고 말았다.

법천리 원촌마을은 ‘법’은 몰라도 집집마다 절의 은혜 하나를 입지 않은 곳이 없다. 어느 집은 석탑의 탑신부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돌에 홈을 파내어 절구통으로 사용하고, 마을 물도랑에는 석탑 지붕돌이 거꾸로 처박혀 수로를 만드는 데 한몫을 하고 있다. 무너진 절의 석물들은 그렇게 세간의 살림으로 베풀어지고 있으니 이 또한 법력이런가.

법천사지에서 산 하나를 넘어 시골길을 따라 한참을 가다보면 작은 내를 곁에 두고 잘 다듬어진 석축 위에 터 잡은 거돈사지가 나온다. 석축보다 먼저 눈에 띄는 게 거대한 느티나무인데, 거돈사지를 지켜온 천년 수령에 7미터가 넘는 몸 둘레를 자랑하며 마치 당간지주인양 우람하게 서있다.

거돈사지에 들어서면 맨 먼저 시선을 붙잡는 게 삼층석탑이다. 빈 절터에 멀쩡하게 남아있는 유물이라고는 삼층석탑 한 기뿐인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금당터 앞에 놓인 이 탑의 아담한 균형이 주변 환경과 그림같이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 그림 속에 가끔 흰 구름도 머물다 가고 이름 모를 산새도 머물다 간다. 그 사이 풀꽃들은 소리 없이 피고 진다. ⓒ유성문
거돈사지에 들어서면 맨 먼저 시선을 붙잡는 게 삼층석탑이다. 빈 절터에 멀쩡하게 남아있는 유물이라고는 삼층석탑 한 기뿐인 탓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금당터 앞에 놓인 이 탑의 아담한 균형이 주변 환경과 그림같이 어울리기 때문이다. 그 그림 속에 가끔 흰 구름도 머물다 가고 이름 모를 산새도 머물다 간다. 그 사이 풀꽃들은 소리 없이 피고 진다. ⓒ유성문

남한강변에 터만 남은 대부분 절들이 그러하듯 거돈사도 신라 말기에 창건되어 고려시대에 이르러 화려한 꽃을 피웠다. 그리고 조선시대에 들어와 그 빛을 잃고, 마침내 임진왜란 때에 이르러 전화(戰禍)를 입어 폐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약 7,500평에 이르는 절터는 삼면이 낮은 야산에 둘러싸인 채 아늑하게 들어앉아 있고, 내를 낀 앞쪽은 시원스레 트였다. 그 아늑함은 행자에게 포근하다 못해 나른함까지 안겨준다.

이제 길은 다시 남한강 물줄기를 따라 충주의 청룡사지로 이어져야 하지만, 그 전에 잠시 몸을 틀어 귀래면의 미륵산으로 향한다. 미륵산 황산사 뒤쪽에 솟은 미륵봉 바위에는 마애석불이 새겨져 있는데, 이 불상은 신라의 마지막 왕인 경순왕의 초상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그러고 보니 미륵세상을 꿈꾸던 궁예가 왕건에게 대패해 그 꿈을 꺾은 곳도 문막과 부론 들판 어디쯤이고, 손곡리는 고려의 마지막 왕인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왕위를 손위하고 잠시 머물렀다 하여 ‘손위실(遜位室)’이라 불린 데서 그 이름이 유래되었다지 않던가.

미륵은 석가모니 부처님이 입멸하고 56억7천만년이 지나서야 우리 곁에 온다. 56억7천만에 365를 곱해야 비로소 우리 곁에 온다. 그렇게 올 미륵을 위해 지금 절터는 비어있다.

 

<필자 약력>

-여행작가

-편집회사 투레 대표

-한국기록문화연구협동조합 이사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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