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의 생사는 나의 죽음에 달렸다

제주시 서쪽 평화로를 따라 가다 보면 평화로운 마을 유수암이 나온다. 북으로는 바다가 한눈에 들어오고 남으로는 한라산이 올려다 보이는 전망 좋은 곳이다. 마을 한 가운데에는 용천수인 유수암천이 사시사철 흐르고 주변에는 무환자나무와 팽나무군락지가 마을을 보호하고 있으니 명당이다. 그래서인지 유독 전원주택이 많이 들어서 있다.

유수암 휴게소 입구에서 제주시 방향으로 가다보면 유수암주유소가 나오는데 거기서 남쪽으로 300m 정도 거리에 <의녀홍윤애지묘>라는 안내표지석이 나온다.

홍윤애는 제주목사 조정철이 사랑한 여인이다. 그녀가 어떤 사람인가는 그녀의 정인(情人) 조정철의 글을 통해 알 수 있다.

홍윤애의 비석 / 조청철이 지은 추모시
홍윤애의 비석 / 조청철이 지은 추모시

「홍 의녀는 향리인 처훈의 딸이다. 정조 1년(1777) 내가 탐라에 귀양 왔을 때 의녀가 나의 적소에 출입하였다. 신축년에 간사한 사람들이 나와 의녀를 죄를 꾸며 죽이려고 형틀에 묶어 치니 혈육이 낭자했다. 의녀는 “공의 생사는 나의 죽음에 달렸다.”라 말하고 (묻는 말에)불복하고 목매달아 순절했다. 이날이 윤5월 15일이다. 그 뒤 31년만에 내가 방어사로 임명받고 와서 묘 주위를 정비하고 시 한 수를 지어 부친다.

구슬과 향기 땅에 묻혀 오래된 지 몇 해던가

그동안 누가 그대의 원통함 저 하늘에 호소했나

머나먼 황천길 누굴 의지해 돌아갔을까

푸른 피 깊이 묻혀버린 죽음은 나와의 인연 때문

영원히 아름다운 그 이름 형두꽃 향기처럼 맵고

한 집안의 높은 절개는 아우와 언니 모두 뛰어났어라

가지런히 두 열녀문 지금은 세우기 어려워

무덤 앞에 푸른 풀 해마다 되살아나게 하려네」

-제주목사 겸 전라도방어사 조정철 쓰다-

조정철은 스물다섯에 대과를 합격할 정도로 총명하고 앞날이 창창했던 청년이다. 그러나 1777년 정조를 시해하려는 정유역변이 드러나 궁궐이 발칵 뒤집혔던 사건이 터졌는데, 거기에 조정철의 처가가 연루되어 조정철은 제주목에 위리안치된다. 그의 나이 스물일곱이었다.

유배생활 3년이 지날 무렵 이웃에 살던 홍윤애는 오라버니의 권유로 절해고도에서 지내고 있는 조정철의 거처에 드나들며 빨래와 가사를 돕게 된다. 그러는 사이 정이 깊어지고 둘 사이에 예쁜 딸도 태어난다.

그런데 하필이면 노론파 조정철 집안과 원수지간이었던 소론파 김시구가 제주목사로 부임했고, 김 목사는 조정철의 비행을 일러바치라며 홍윤애에게 매질을 가한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입을 열지 않은 채 형틀에 묶인 채 순절하고 만다. 고문이 얼마나 혹독했는지 살이 문드러지고 뼈가 튀어나와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고 한다. 딸을 해산을 한 지 100일도 채 되지 않은 20대 초반의 여인 홍윤애는 정인(情人)의 목숨을 지키려 스스로 목숨을 바친 것이다.

그러나 죄 없는 백성을 잡아다 처참한 고문으로 살육한 이 사건은 조정에 큰 파장을 일으킨다. 제주목사·제주판관·대정현감·정의현감이 한꺼번에 갈리고 안핵어사가 파견돼 석 달 열흘 동안 철저한 진상조사를 하게 된다. 결국 이로 인하여 김시구 목사는 부임 4개월 만에 파직당해 의금부로 압송되고 조정철은 억울한 음해에서 벗어나 목숨을 건지게 되지만 그의 연인 홍윤애는 이미 되돌아 올 수 없는 먼 길을 떠난 뒤였다.

그녀가 사랑한 사람은 권력과 부귀와 명성과는 거리가 먼 죄인이었다. 그것도 임금을 시해하려는 음모에 연루된 대역죄인이었으니 언제 사약을 받고 죽을지 모르는, 그러니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기피인물이었다. 그런데 하필 그런 사람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조정철은 이후 제주 동쪽 정의현으로 유배지를 옮긴다. 정의현은 조정철의 증조부인 조태채가 유배생활을 했던 곳으로 조정철 역시 같은 곳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된다. 이배(移配) 길은 동문에서 출발하여 거로마을, 봉개를 거쳐 가는새(동회천)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와흘리, 와산, 송당에 이르러 백약이오름 부근에 도착한다. 이 길은 원래 관리들이 공무를 보러 갈 때 이용하는 길인데 조정철은 관리로서가 아니라 죄인으로 이 길을 걸어야 했다. 백약이오름은 약초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인데, 조정철은 당시 이곳을 수봉(秀奉)이라 기록했다. 거기서 시 한 수를 남긴다.

축축한 안개 온통 하늘을 덮고

사나운 바람 온종일 울리네

슬픔과 한 됨 시가 되고

병은 이미 돋아나네

천년 된 늙은 고목

띠풀 온 길에 무성히 얽혀

뽕나무 밑에 다하지 못한 연분

머리 돌리니 도리어 마음 상하네.

‘뽕나무 밑에 다하지 못한 연분’

조정철은 홍랑과 다하지 못한 연분을 안타까워하고 있다. 그러나 그녀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자신 역시 죄인인 마당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홍윤애는 김시구 목사에게 잡혀가기 며칠 전 조정철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을 언니에게 맡겨 피신시켰다. 언니는 금덕리에 있는 산새미오름의 '마용사'라는 절로 피신하였으며 딸은 나이가 스무 살이 되자 곽지리의 박수영이란 청년과 혼인하여 아들 규팔과 딸 둘을 두었으나 서른 살 나이에 과부가 되고 말았다.

그 무렵 새로 온 제주목사가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죽은 홍윤애의 무덤을 찾아가 통곡하고 혈육을 찾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실로 감격적인 부녀상봉이 이루어졌다. 조정철은 제주목사로 근무하는 1년 동안 모은 봉급으로 세 칸 짜리 초가집을 사 주었고 네 차례에 걸쳐서 농토를 사 주어 생계 걱정을 면하게 해 주는 등 부정(父情)을 아낌없이 쏟았다.

지난 1997년 11월 9일에는 경상북도 상주에 있는 양주조(趙)씨 문중의 사당인 함녕재(咸寧齋)에서는 홍윤애를 조정철의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고 사당에 봉안하는 의식이 거행되었다. 초헌관은 양주조씨대종회 조원환 회장, 아헌관은 홍윤애의 외손 박용진씨, 종헌관은 제주문화원 홍순만 원장이었다. 홍윤애가 비명에 간 지 186년 만에 이루어진 복권이었다.(다이내믹제주 2005년 7월 5일)>

1777년에 시작된 유배는 제주목에서 5년, 정의현 성읍에서 8년, 추자도에서 14년 등을 포함에 모두 30년간 지속된다. 청춘을 유배지에서 보낸 조정철은 환갑이 된 1811년에 전라방어사 겸 제주목사가 되어 한 맺힌 제주를 다시 찾는다. 정랑(情娘) 홍윤애가 세상을 뜬 지 31년, 조정철의 나이 환갑(61세)에 이른 때였다. 제주에 발을 디딘 그는 주변의 환영을 물리치고 그리운 여인의 무덤부터 찾는다. 그리고 손수 글을 지어 비를 만들어 세우고 피붙이 때 헤어진 딸을 찾아서 자신의 급여를 모아 집과 밭을 사서 돌보아 준다.

그는 짧은 만남을 뒤로 한 채 이듬해 제주를 떠났고, 다시는 돌아오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 충청북도 충주시 수안보면 안보리에 묻힌다. 그들이 사별한 지 216년이 지난 1997년 11월 9일 경상북도 상주에 있는 양주조씨 문중의 사당인 함녕재(咸寧齋)에서는 홍윤애를 조정철의 정식 부인으로 인정하고 사당에 봉안하는 의식이 거행된다. 이로써 두 사람은 지하에서나마 정식으로 부부의 연을 맺으며 역사의 그늘에서 나오게 된다.

홍윤애(좌)와 박규팔의 묘 / 산소 뒤편에서 바라보는 풍경
홍윤애(좌)와 박규팔의 묘 / 산소 뒤편에서 바라보는 풍경

훈구의 세력을 견제하고 균형잡힌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등장시킨 사림, 그렇게 해서 형성된 붕당은 그러나 대의보다 사욕에 사로잡혀 온갖 사화와 수많은 희생자를 낳는다. 그 가운데 조정철과 홍윤애도 있다.

홍윤애의 묘는 지금의 제주 칼호텔 부근에 있었으나 제주농업학교가 들어서면서 1937년 손자인 박규팔의 무덤이 있는 유수암리로 이장됐다. 홍윤애의 우측에 묻혀있는 이가 외손자 박규팔이다.

홍윤애와 조정철, 두 사람은 지금 각기 다른 곳에 묻혀 있으나, 땅 아래서 아니면 하늘 위에서 이승에서 다하지 못한 사랑을 나누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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