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황사평 천주교공원묘지

어느 틈엔가 걷는 게 자연스러워지면서 나에게 작은 변화가 생겼다. 운전 중에는 상상하기 어려운, 걸으면서 주변을 유심히 바라보는 습관이 생긴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간판이나 이정표를 눈여겨 보곤 하게 되었다. 재미 있는 간판이 보이면 무슨 가게일까 추측도 해 보고, 낯선 이름의 이정표를 발견하면 나름대로 어원을 꿰맞춰 보기도 한다. 그러다 우리 동네 부근에 ‘황새왓’이라는 마을이 있다는 것과 거기에 공원묘지가 있다는 사실도 처음 알게 되었다.

버스가 다니는 큰길에서 걸어 들어오다 보면 동네 어귀 자그마한 4거리에 6-7개의 화살표가 이리저리 그려진 이정표가 있다. 차를 운전하며 매일 지나치는 곳인데도 거기에 그렇게 많은 표시가 있다는 것을 처음 발견했다. ‘황새왓’은 황사평의 옛 지명으로 황새가 많이 내려앉는 밭이라는 데가 유래했다고 한다.

황사평 묘역 비석 / 황사평 묘역 입구
황사평 묘역 비석 / 황사평 묘역 입구

아무튼 천주교에서는 그곳에 있는 공원묘지를 <제주천주교 황사평성지>로 부른다. 성지(聖地)는 종교의 발상지이거나 종교적 유적이 남아 있는 곳으로 신자(信者)들의 순례코스가 된다. 한 세기 전 일어난 민란 때 목숨을 잃은 많은 천주교인들이 묻혀 있기 때문에 이곳도 천주교성지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내가 찾은 황사평공원묘지에서 순례객은 찾을 수 없었다. 묘역 맨 위쪽에 있는 성직자 4인의 석관묘 주위만 정리가 돼있고 어쩐 일인지 아래쪽 일반 신도들의 묘는 잡초가 무성해 그저 관리인 손길이 닿지 않은 공동묘지처럼 황량하기만 하다.

잡초가 무성한 일반신도들의 묘. 나중에 갔을 때는 벌초가 되어 있었다.
잡초가 무성한 일반신도들의 묘. 나중에 갔을 때는 벌초가 되어 있었다.

나는 사실 이곳에 올 때부터 ‘성지’라는 이름에서 불편함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름이라는 것은 붙이는 측의 마음이되 타인들로부터 인정을 받을 정도의 객관성이 보장되어야 하는데 과연 이곳이 모두로부터 ‘성지’로 인정받을 수 있으냐는 것에 의구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19세기 말 제주는 극심한 혼란에 빠진 시기다. 200년 간 묶여 있던 출륙금지령이 풀렸다고는 하나 중앙의 통제와 지방토호의 수탈, 왜구의 침략, 부역과 진상 등에 섬사람들의 등이 휘어질 판이었다. 그러던 차 제주목사 이병휘(李秉輝)의 가혹한 징세에 방성칠을 장두로 지금의 제주 서쪽 안덕면 백성들이 들고 일어난다. 이어서 3년 후인 1901년 역시 이웃동네 대정에서 이재수를 필두로 민란(民亂)이 일어난다.

중앙에서 파견된 봉세관(封稅官) 강봉헌은 이미 오래 전에 폐지되었던 민포(民布)를 다시 징수하기 시작했고, 가옥·수목·가축·어장·어망·염분·노위 등의 세금은 물론, 심지어 잡초에까지 세금을 매겨 거두었던 것이다. 이에 분노한 주민이 저항을 하기 시작한다. 이 때 강봉헌은 천주교인들을 앞장세웠는데, 그 이유가 있다. 당시 선교를 내세운 서구 열강의 세력에 굴복한 19세기 조선은 결국 프랑스 천주교 신부에게 ‘여아대(如我對. 짐을 대하는 것처럼 대하라.)’라는 패를 전한다. 왕이 건넨 이 패는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의 상징이었다. 면책특권을 앞세운 서양 신부의 그늘 아래서 제주의 사이비 천주교인들 횡포는 극에 달한다. 제주에 온 프랑스 신부들은 포교의 수단으로 아마 천주교인이 되는 자들에게 법 위의 권력을 나눠줬을 것이다. 그리하여 ‘이름뿐인 천주교도가 천주교를 내세워 염전에 나가 주인 허락도 없이 멋대로 소금 한 섬을 짊어지고 나오는가 하면, 성당에 형틀을 갖춰 놓고 천주교인 마음에 맞지 않는다고 잡아다가 사형(私刑)을 가하였다. 한국 조정의 관리도 천주교도를 자칭하며 범법을 저지르고 성당에 숨어버린 그들을 잡을 수 없었다’(강용삼 외,《대하실록 제주30년사》 서울 태광출판사)는 기록이 있다. 강도와 강간 등의 포악질을 저지르면서도 멀쩡할 수 있었을 거다. 이에 제주도민의 인내 역시 한계에 달했고, 결국 대정군수 채구석을 중심으로 군내(郡內) 유지들이 상무사(商務社)를 조직하여 저항하게 되는데 여기에 군내의 백성이 대거 참여하게 된다. 세폐와 교폐(敎弊)에 대한 투쟁에까지 이르게 되어 무력충돌이 일어나게 된 배경이다. 그 와중에 300이 넘는 천주교인이 희생되고 수많은 민군 역시 죽음을 맞게 된다. 상황이 심상치 않은 것을 인지한 조정은 프랑스와 미국, 일본의 세력을 앞세워 제주민의 저항을 무마시키려 한다. 결국 조직과 힘에 밀린 민(民)은 외세를 등에 업은 관(官)에 저항하다 끝내 무력화되고 만다.

13세기, 삼별초를 토벌하기 위해 고려정부는 몽고의 군사를 끌어들인다. 그리고 이재수의 난이 일어나기 딱 100년 전인 1801년(순조 1년), 신유박해 때 천주교 신자 황사영은 로마 가톨릭교회 북경 교구의 주교에게 혹독한 박해를 받는 조선교회의 전말을 보고하며 대책을 강구하는 백서를 쓴다. 백서의 내용은 ‘조선 조정이 계속 신앙의 자유를 불허하면 청나라의 한 지방으로 편입시켜 감독하게 해야 하며, 서양의 군함 수 백 척과 5만∼6만 명의 군사 및 병력을 조선 파견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가 발각되어 그는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되었다. 그리고 딱 100년이 지난 1901년 대한제국의 조정은 또다시 외세를 빌려 우리 백성을 진압한다.

2014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이 집전한 시복미사에서 황사영의 이름은 제외된다. 나라를 팔면서까지 지킬 수 있는 종교적 신앙은 없다는 뜻이다. 황사영의 아내 정난주는 다산 정약용의 조카로서 고모부인 이승훈(李承薰)으로부터 ‘마리아’라는 세례명을 받고 천주교도가 되었는데 황사영의 백서 사건 때 제주도로 유배를 와 대정현의 관비(官碑)가 된다. 그녀는 지금 대정읍 동일리에 묻혀 있다.

아무튼 21살의 청년 이재수는 본의 아니게 장두가 되어 강우백, 오대현과 함께 목숨을 바침으로써 격렬했던 저항은 끝이 난다. 이재수는 조선 중기 1520년에 제주에 유배 온 이세번의 12대 후손이고, 이세번은 조광조의 제자다.

대정에는 지금 이재수, 강우백, 오대현 등 삼의사를 기리는 비가 있다. 마을 주민들이 세운 것입니다. 비의 내용은 이렇게 시작한다.

<여기 세우는 이 비는 종교가 무릇 본연의 역할을 저버리고 권세를 등에 업었을 때 그 폐단이 어떠한가를 보여주는 교훈적 표식이 될 것이다... 하략.>

한편 또 다른 글에는 <당시 제주도에는 아라카와荒川留十郞를 비롯한 일본인 수산업자들이 대거 진출하여 활동했는데, 대정군수였던 채구석(蔡龜錫)과 유림 오대현(吳大鉉), 관노 출신인 이재수 등은 상무사(商務社)를 설립하고, 일본인 업자들과 결탁하여 어로독점을 꾀하고 있었다... 하략>로 시작된다.

한 곳에서는 민란(民亂)으로 또 다른 곳에서는 교란(敎亂)으로 표기되어 있다. 똑같은 사건을 보는 두 개의 어긋난 시선이 어떤지를 극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아이러니한 것은 지금 천주교도들이 집단으로 묻혀 있는 황사평천주교공원묘지는 민군(民軍)이 제주성을 치기 직전 이재수가 진을 쳤던 곳이라는 점이다.

강우백, 이재수, 오대현 등 세 의사(義士)를 기념하는 삼의사 비. 대정읍 안성리
강우백, 이재수, 오대현 등 세 의사(義士)를 기념하는 삼의사 비. 대정읍 안성리

민란이 끝난 뒤 프랑스 정부는 한국 정부에 천주교도 피해에 대한 배상금과 희생된 천주교도의 시신을 묻을 땅을 요구한다. 결국 배상금은 3년 뒤 제주 삼읍에서 이자를 포함해 거두어 갚고 민군이 주둔했던 황사평은 천주교도의 공동묘지를 조성할 터로 내어주고 만다.

그로부터 약 반 세기가 지나 제주 땅에는 4·3의 광풍이 몰아치고, 그 와중에 황사평은 마을이 전소되는 아픔을 겪게 된다. 그러다 4·3이 끝난 1954년부터 사람들이 돌아와 마을을 복구하며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얼마 전 나는 신축민란 당시 보복 출동한 프랑스군과 조선관군에 의해 처형당한 제주도민들의 시신이 엄청나게 널려 있는 흑백사진을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묘지가 어디에 있는지는 모르겠다.

제주도에 천주교가 들어온 지가 100년이 훌쩍 넘었다. 현재 신성여중고를 비롯해서 사회복지법인 애덕의 집, 가롤로의 집 등 여러 분야에서 천주교가 사회에 공헌하는 바가 크다. 그러나 과거사가 깔끔하게 정리되었다는 소식을 듣지는 못했다.

물론 신축민란의 원인은 훨씬 복잡할 것이다. 세폐를 견디지 못한 제주민들의 분노와 제주민을 앞세워 천주교와 프랑스 세력을 막으려 했던 일본의 계책, 제주 고유의 민속신앙과 외래신앙과의 대립도 일부 요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이 천주교 성지로서 인정받기 위해서는 그들이 저질렀던 100여 년 전의 행적을 사실대로 기록하고 잘못에 대해서 진실한 사과를 먼저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황사평 천주교 묘역은 황새가 날아드는 밭이 아닌, 진실을 은폐한 오욕의 역사현장으로 남게 될지도 모르겠다.

화해와 용서의 손은 원래 나이가 더 많은 사람이나 힘이 있는 사람이 먼저 내미는 법이다.

‘내 탓이오, 내 탓이오, 내 큰 탓이로소이다!’

기도가 기도로만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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