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산맥의 벌교

꼬막은 다른 조개들과 달리 다루기가 꽤는 어려웠다. 모래밭에 사는 조개들과는 달리 뻘밭을 집으로 삼고 사는 꼬막은 온몸에 거무스름한 갯뻘을 맥칠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씻는 것부터가 다른 조개에 비해 힘과 정성이 몇 곱으로 들었다. 힘과 정성이 몇 곱으로 드는 것은 갯뻘이 묻어서만이 아니었다. 그 껍질의 생김 때문이었다. 대부분의 조개는 그 껍질이 매끈거리기 마련인데 꼬막의 껍질은 수없이 많은 골이 패어 있었다. 기와지붕과 똑같은 골이 쥘부채의 살처럼 퍼져나가고 있었다. 그 골마다 갯뻘이 끼여 있으니 씻는 것만도 보통일은 아니었다. -조정래 <태백산맥> 중에서

여자만에서 채취한 꼬막들이 드나들던 벌교 선창은 이제 영판 쇠락해버렸다. 작은 어선 몇 척과 꼬막전문집 한두 곳만 남아서 꼬막의 전설을 이야기한다. ⓒ유성문
여자만에서 채취한 꼬막들이 드나들던 벌교 선창은 이제 영판 쇠락해버렸다. 작은 어선 몇 척과 꼬막전문집 한두 곳만 남아서 꼬막의 전설을 이야기한다. ⓒ유성문

그 무거운 <태백산맥>의 문학기행을 왜 하필이면 ‘꼬막이야기’로 시작하느냐고 탓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생각해보라. <태백산맥>의 싸움은 ‘이데올로기’보다도 먼저 ‘밥’의 싸움에 가깝다. 작가 스스로도 “인간은 인간다운 삶이 보장되지 않으면 어느 시대 가릴 것 없이 인간다운 삶을 위해 이데올로기 투쟁을 벌일 수밖에 없다. 이데올로기란 거창한 것이 아니다. 삶 속에 축적되어 있는 불만에 누군가 불을 붙이면 그 자체가 이데올로기가 되는 것이다. 특별한 ‘-주의’는 필요 없다”고 말한다.

게다가 벌교에 가면 꼬막부터 찾지 않을 수 없는 것이고, 그 꼬막이 가을 찬바람이 불면서부터 맛이 들기 시작해 봄철 알을 배기 전까지가 가장 제철이라고 하지 않는가. 가뜩이나 불만으로 가득한 세상에 괜히 불을 붙일 일이 아니라 ‘금강산도 식후경’이라는 만고불변의 금과옥조에나 따를 일이다. ‘그래도…’라면, ‘꼬막의 껍질에는 수없이 많은 골이 패어 있고’, ‘그 골마다 갯뻘이 끼여 있으니…’ 이쯤하면 고단한 민족사에 대한 문학적 상징으로 충분하지 않느냐고 슬쩍 넘어갈 일이다.

벌교 앞바다 여자만(汝自灣)에서는 갖은 ‘바다 밥’들이 나는데, 그 중 단연 꼬막이 첫 치에 선다. ‘벌교 꼬막’은 소설 <태백산맥>에 묘사된 후 더욱 유명세를 탔는데, 다른 지역 것보다 유난히 알이 굵고 속이 꽉 차 더 쫄깃하다고 한다. 벌교역 맞은편 골목의 국일식당을 비롯한 음식점들에서 그 진미를 맛볼 수 있으며, 벌교시장에 가면 지천으로 깔려 있기도 하다.

벌교사람들이 ‘횡게다리’라 부르는 벌교 홍교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무지개다리 중 가장 규모가 큰 다리다. 이 다리 위를 거닐면 왠지 발걸음이 느려진다. ⓒ유성문
벌교사람들이 ‘횡게다리’라 부르는 벌교 홍교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무지개다리 중 가장 규모가 큰 다리다. 이 다리 위를 거닐면 왠지 발걸음이 느려진다. ⓒ유성문

일단 꼬막을 밑반찬으로 배를 채웠다면, 느긋하게 <태백산맥>의 무대들을 돌아볼 일이다. 소설 속 민족주의자 ‘김범우의 집’하며, 정하섭과 소화가 목욕을 하는 그 유명한 장면의 현장 ‘현부자네 집’, ‘소화다리(부용교)’며 ‘횡게다리(홍교)’, 빨치산 대장 염상진의 동생이자 우익 벌교청년단의 감찰부장 염상구가 벌교 주먹계를 장악하기 위해 결투를 벌였던 철다리 등 벌교 곳곳이, 아니 벌교 전체가 그대로 <태백산맥>의 무대들이다.

그 중 ‘횡게다리’로 불리는 홍교는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무지개다리 중 가장 규모가 큰 다리로 보물 제304호로 지정되어 있다. 소설 속에서는 ‘빈농들 설 쇠라고 빨치산들이 쌀가마를 쌓아놓았던’ 곳으로 나오는데, 지금도 벌교 사람들이 실생활에서 무시로 ‘시간을 거슬러 다니는’ 다리이기도 하다.

<태백산맥>의 무대 벌교는 전라남도 보성군 소속이지만 보수적인 보성과는 달리 새로운 것을 빨리 받아들이는 지역적 특성을 지닌 곳이다. 벌교는 원래 조선시대 때 고읍이나 낙안으로 드나드는 작은 포구였다. 그러다가 일제 때 들어 일제의 수탈기지로서 일대 교통의 중심지가 되면서 상업도시로 번창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이(利)를 좇는 외지인들이 물밀 듯 밀려들어 왔고, 신흥 상업도시의 특성상 세를 다투는 일도 잦아 이때부터 ‘벌교에 가서는 주먹 자랑하지 말라’는 유명한 말이 생겨났다.

징광옹기의 누렁이는 한 문화인의 신화를 알고 있을까. 누렁이는 잠이 들었고, 그의 집 울타리로 가을꽃들이 무심히 피어났다. ⓒ유성문
징광옹기의 누렁이는 한 문화인의 신화를 알고 있을까. 누렁이는 잠이 들었고, 그의 집 울타리로 가을꽃들이 무심히 피어났다. ⓒ유성문

나는 어느 적 벌교에 관한 글을 쓰면서 “나는 남도여행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순천에 가서는 인물 자랑하지 말고, 여수에 가서는 돈 자랑하지 말며, 벌교에 가서는 주먹 자랑하지 말라고 했으니, 가진 것이라고는 이 세 가지밖에 없는(?) 나로서는 남도길이 여간 곤욕스러운 것이 아니다”라고 너스레를 떤 일이 있다. 하지만 순천의 인물들이 진즉 대처로 다 빠져나가버린 것처럼, 벌교의 주먹 역시 이미 흘러간 스토리일 뿐이다.

벌교 하면 또 한 사람, 잊을 수 없는 인물이 있다. 바로 잡지 <뿌리깊은나무>의 발행인 한창기(1936~1997)다. 그는 벌교읍 고읍리에서 태어나 순천중학교, 광주고등학교를 거쳐 서울대 법대를 나왔다. 그러나 사법고시 따위는 안중에 없이 일찍부터 장사에 눈을 떠 미8군 영내에서 귀국군인들을 상대로 비행기표나 영어성경책 등을 팔아 돈을 벌었다. 그 인연으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의 국내 판매에 나서 신화적인 세일즈맨이 되었고, 나중에 한국브리태니커회사를 설립, 획기적인 문화사업을 펼쳐나갔다.

전혀 새로운 스타일의 잡지 <뿌리깊은나무>에 이은 <샘이깊은물>의 발간, <한국의 발견> 등 선구적 출판물의 간행, 판소리를 비롯해 한옥과 한복, 옹기와 유기, 전통차와 천연염색 등 전통문화의 발굴과 보급 등에서 그가 이룬 문화적 업적은 헤아릴 길이 없다. 이야기가 잠시 엉뚱한 데로 빠진 것 같지만 새삼 ‘한창기’란 이름을 거론하는 까닭은 벌교에 아직도 그가 남긴 문화적 볼거리들이 있음이다. 옹기와 잎차를 만들어내고 있는 징광옹기는 그의 동생 한상훈에 이어 제수 차정금이 유지하고 있으며, 천연염색은 그의 권유를 받아들인 조선물집 한가솜씨의 한광석이 그 뜻을 이어가고 있다.

벌교의 태백산맥문학관은 소설 속 현부자네 집과 소화의 집이 있는 제석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문학관 전시실에는 1983년 집필을 시작으로 6년 만에 완결하고, 이적성 시비로 몸살을 앓는 등 유형무형의 고통을 겪으면서 분단문학의 최고봉에 올랐던 작가 조정래와 소설 태백산맥에 대한 자료가 망라되어 있다. ⓒ유성문
벌교의 태백산맥문학관은 소설 속 현부자네 집과 소화의 집이 있는 제석산 자락에 자리 잡고 있다. 문학관 전시실에는 1983년 집필을 시작으로 6년 만에 완결하고, 이적성 시비로 몸살을 앓는 등 유형무형의 고통을 겪으면서 분단문학의 최고봉에 올랐던 작가 조정래와 소설 태백산맥에 대한 자료가 망라되어 있다. ⓒ유성문

태백산맥은 단순히 이 땅의 등줄기가 아니다. 굴곡진 역사로 해서 이미 이 땅 바로 그대로다. 남북으로 갈리고 동서로 나뉜, 그러고도 모자라 헛된 이념에 무수히 찢긴. 소설 <태백산맥>이 겪은 영화와 풍파는 이 땅 민중들의 수난, 그리고 아직 버리지 못한 꿈과 맞닿아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시작되는 벌교는 단순한 이념적 해방구가 아니다. 밥과, 밥으로 이루어지는 삶의 지순한 현장이다. 작가의 말처럼 문학 역시 “인간의 인간다운 삶을 위하여 인간에 기여해야” 한다. 이는 소설의 이야기보다 사람 사는 이야기가 먼저인 이유다. 또한 벌교에 가서 <태백산맥>의 무대를 더듬기 전에 먼저 그곳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삶의 모습을 눈여겨보아야 할 이유이기도 하다.

 

<필자 약력>

-여행작가

-편집회사 투레 대표

-한국기록문화연구협동조합 이사

-<문향을 따라가다>(어문각) 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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