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고대 중국 의학 — 유교와 도교에 나타난 생명과학

한나라 사마천이 지은 《사기》에는 “편작(扁鵲)은 의원으로서 처방의 모범을 이루었다. 후세에도 그를 따를 만한 자가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편작은 기원전 5세기에 활동했던 인물로 성은 진(秦), 이름은 월인(越人)이다. 그는 젊은 시절에 객잔(客棧: 고대 중국의 숙박시설)의 관리자로 일하면서 장상군(長桑君)이라고 하는 의사를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10여 년 동안 친분을 유지했으며 후에 장상군이 자신의 의술과 경험을 편작에게 전수해주었다. 그는 의서를 두루 읽고 경맥의 원리에 통달했으며 장상군이 준 약을 복용한 후에는 환자의 내장까지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이는 아마 최초의 ‘엑스레이’ 개념에 해당할 것이다. 편작은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에 모두 정통했으며 병세 진단, 특히 진맥에 뛰어났다.

전설적인 명의 편작고대 중국 삼황오제 때의 명의로서 《편작심서》에 따르면 ‘황제태을신명론’을 전수하고 《오색맥진》, 《삼세병원》 등을 저술했으며, 이에 후세에 순우의, 화타 등이 전수받았다고 전해진다.
전설적인 명의 편작고대 중국 삼황오제 때의 명의로서 《편작심서》에 따르면 ‘황제태을신명론’을 전수하고 《오색맥진》, 《삼세병원》 등을 저술했으며, 이에 후세에 순우의, 화타 등이 전수받았다고 전해진다.

어느 날, 편작은 괵(虢)나라를 지나다가 우연찮게 괵나라 태자의 장례 소문을 듣게 되었다. 그는 곧 궁으로 달려가 태자가 죽기 직전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물은 후에 시신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이 소식을 들은 괵나라 군주는 크게 기뻐하며 편작을 궁으로 불러들였다. 태자의 시신을 접한 편작은 먼저 그의 코에 귀를 대어보았다. 다행히도 태자는 아직 가는 숨을 쉬고 있었다. 편작은 다시 손으로 태자의 양쪽 고간(股間, 샅)을 문질러 보았다. 아직 열기가 남아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곧 제자를 불러 태자의 삼양오회(三陽五會: 양쪽 귀 끝을 연결해 머리 중앙에서 만나는 지점에 위치한 혈)에 침을 놓도록 했다. 얼마 후 과연 태자가 깨어났다. 그는 곧 따뜻한 약으로 태자의 양쪽 겨드랑이를 문지른 후 탕약을 복용하도록 했다. 보름 동안의 치료를 받은 후 태자는 마침내 건강을 회복했다.

편작이 활동하기 전까지는 숨을 쉬는지 여부를 두고 사망을 판단했다.

숨이 멈추면 곧 죽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편작은 사람이 혼절하면 일시적으로 호흡이 멈출 수 있으나 맥박은 여전히 뛰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이에 편작 이후 의사들은 진맥으로 생사를 판단하기 시작했다. 즉 심장 박동이 정지되었을 때 비로소 사망 판정을 내리게 된 것이다. 이러한 방법은 2500여 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1980년대에 이르러서야 일부 국가에서 뇌세포 사망을 통해 사망 판정을 내리게 되었다.

편작이 제(齊)나라에 들렀을 때 환후(桓侯)가 그를 불러 진맥을 받은 적이 있었다. 편작은 환후의 안색을 살펴본 후 “왕께서 병에 걸리셨으나 아직은 병세가 경미하므로 빨리 치료하신다면 곧 완쾌되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환후는 편작이 돌아간 후 주변 신료들에게 “자신의 의술을 뽐낼 심사로 본래 건강한 사람에게 치료를 받으라는 자가 무슨 의사란 말인가.”라고 말하며 치료를 거부했다. 닷새가 지난 후 편작이 다시 환후를 보러 들렀다. 그는 환후에게 “병이 이미 혈맥에 침투했으니 어서 치료하지 않으면 병세가 갈수록 심해질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환후는 매우 불쾌해하며 “나는 병이 없소.”라고 대꾸했다. 그로부터 닷새가 지난 후 편작이 다시 환후를 진맥했을 때 그는 “병이 이미 위장까지 침투했으므로 당장 치료를 받지 않으면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게 될 수도 있습니다.”라고 심각하게 말했다. 이 말에 화가 머리끝까지 난 환후는 편작의 말을 귓등으로 흘려버렸다. 다시 닷새가 지나 환후를 보러간 편작은 그를 보자마자 바로 발길을 돌렸다. 환후가 사람을 보내 그 이유를 물어보니 편작은 “환후의 병이 이미 골수에 침투했으니 신도 그를 살릴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며칠이 지나자 환후는 과연 몸져눕게 되었으며 사람을 보내 편작을 찾았으나 그는 이미 제나라를 떠난 뒤였다. 환후는 결국 병사하고 말았다.

편작은 개성이 남달리 강한 의사였다. 그는 다음의 여섯 종류의 환자는 절대 치료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다. 즉 교만하고 억지를 쓰는 자, 의복과 음식을 적당히 취하지 않는 자, 기가 고르지 못한 자, 신체가 허약하여 약을 복용할 수 없는 자, 미신에 심취해 의사를 믿지 않는 자, 그리고 재물을 건강보다 더 중시하는 자 등이었다.

한편 그의 명성은 날로 높아졌으며 조(趙)나라 사람들은 그를 황제(黃帝)시대의 명의 ‘편작’이라 칭하기 시작했다. 후에 편작이란 별칭은 그의 본명보다 더 유명해져 그의 호칭으로 굳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처럼 명의라 칭송받던 편작의 최후는 매우 비참했다. 당시 진나라의 태의령(太醫令)이었던 이혜(李醯)가 자신의 의술이 편작에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자객을 보내 그를 암살했던 것이다.

저서로 《난경 難經》이란 책이 있으나 후대 사람이 그의 이름을 빌려 지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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