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의술이야기] 마취의 신 화타
[동서고금 의술이야기] 마취의 신 화타
  • 강선주, 이문필 등 20인(빅북 제공)
  • 승인 2018.10.29 08: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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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고대 중국 의학 — 유교와 도교에 나타난 생명과학

화타(華陀)는 중국 동한 말기의 명의로 내과, 외과, 부인과, 소아과를 비롯해 오관(五官: 눈, 코, 입, 귀, 손)에 정통했으며 침술에도 능했다. 특히 외과 치료와 침술로 명성이 높았다. 그는 마비산(麻沸散)이라고 하는 자신만의 독특한 마취제를 이용해 환자를 마취시킨 후, 배, 가슴을 절개해 위장, 비장 등의 절제 수술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화타가 외과수술에 마비산이란 마취제를 사용할 때 서양에서는 몽둥이로 환자를 기절시킨 후 수술을 했다고 한다. 따라서 화타의 이러한 치료법은 중국 의학사상 매우 혁신적인 사건으로 인정받는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마비산의 조제 방법은 전해지지 않는다. 후대의 학자들은 독말풀(Datura)의 일종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침술의 대가 화타후한 말의 명의로서 마비산(마취제), 침술, 양생술에 능통하였으며, 중국 외과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오금희 체조’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알려지기도 하다.
침술의 대가 화타후한 말의 명의로서 마비산(마취제), 침술, 양생술에 능통하였으며, 중국 외과학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다. ‘오금희 체조’를 만든 장본인이라고 알려지기도 하다.

화타가 등장하기 800여 년 전부터 중국에는 거세술이 매우 보편화되어 있었다. 황제를 옆에서 보필할 수많은 환관들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의사들도 통증을 경감시켜주는 마취제와 비슷한 효능의 약물을 사용했었다.

그러나 약의 성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문헌에서도 그 기록이 발견되지 않고 있다. 근대의 기록에서 후추가루를 뜨거운 물에 풀어 생식기에 부어 진통제로 사용했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거세수술을 할 때는 먼저 음경과 음낭을 가는 천으로 함께 감싸 묶은 후, 반원형의 칼로 치골에서부터 이를 절단하며 명반분말과 나무진액을 절단 부위에 발라 지혈시켰다. 그 후에 일종의 코르크 마개와 같은 것을 요도에 넣는다. 거세수술을 한 후 살아난 사람은 환관이 될 수 있었다.

화타는 침구에도 매우 능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뜸을 잘 떠서 한두 군데의 혈을 찾아 혈마다 7~8개 정도의 침만 놓으면 환자의 병이 바로 나을 정도였다. 화타가 처음 시도한 협척혈(夾脊穴: 척추의 양쪽)은 지금까지도 광범위하게 이용되고 있다. 삼국시대 위나라 조조는 삼차신경통(三叉神經痛: 얼굴 한쪽에 갑자기 극심한 통증이 나타나는 병)과 유사한 편두통을 앓고 있었는데 화타의 침술로 통증을 어느 정도 줄일 수 있었다고 한다.

화타는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으로 특히 운동을 강조했다. 호랑이, 사슴, 곰, 원숭이, 새 등의 동작을 모방하여 따라하는 ‘오금희(五禽戱)’는 초기의 보건 체조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화타의 제자 오보(吳普)는 이 ‘오금희’를 꾸준히 연마하여 건강하게 백수를 누렸기 때문에 세인들은 그를 신선에 비유하기도 했다.

조조는 편두통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한번 발작하면 견디기 어려울 만큼 극심한 고통에 시달렸다. 그는 도처의 의사를 불러 치료를 청했으며 자신의 주치의에게도 치료를 받아 보았지만 모두 소용이 없었다. 후에 화타의 의술이 신통하다는 얘기를 듣고 그에게 치료를 청했다. 화타는 조조를 진맥한 후 그가 풍사(風邪: 바람이 병의 원인이 되었음을 이르는 말)로 인해 병을 얻었다고 판단했다. 이에 그의 머리에 침을 몇 대 놓자 바로 효과가 나타났으며 다시 재발하지도 않았다. 이에 조조는 화타를 자기 옆에 붙잡아두려 했다. 그러나 화타는 조조 한 사람만을 치료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자신은 ‘학자’이지 ‘비천하게 의술로 생계를 유지하는 자’가 아니라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고대 중국인들은 의사와 점술가를 어렴풋이 구별하고는 있었지만 실제로 사회적 지위라는 측면에서는 별 차이가 없었다. 당나라의 유명한 문인 한유(韓愈)도 의사는 점술가, 악사, 수공업자들과 비등한 계급이라고 여겼다. 이 때문에 의술은 ‘방술(方術: 방사가 행하는 신선의 술법)’로 칭해졌으며 이러한 관념은 의학 발달을 저해하는 요소로 작용했다.

화타는 결국 아내가 병이 위중하다는 핑계를 대고 몰래 도망쳤다. 그러나 화가 난 조조는 그를 잡아다가 옥에 가두었다. 208년에 화타는 결국 조조에게 죽임을 당했다. 《삼국지》에는 화타가 조조에게 뇌 절개 수술을 해 경뇌막 아래 있는 혈종을 치료하려 했으나 의심 많은 조조가 그를 죽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화타의 저술 가운데 현재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은 없다. 현존하는 《중장경 中藏經》은 송나라 사람이 그의 이름을 사칭해 저술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에게는 번아(樊阿), 오보(吳普), 이당(李當) 등 세 명의 제자가 있었는데, 번아는 침구에 능했으며 오보는 《오보본초》라는 저서를 남겼고 이당은 《이당지약록》이란 저서를 남겼다. 세 명 모두 당대의 명의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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