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CNN 방송화면 갈무리.
사우디아라비아 정부 요원이 지난 2일 살해된 자말 카슈끄지의 옷을 입고 위장한 채 영사관을 빠져나가는 모습이 녹화된 CCTV 영상. 사진=CNN 방송화면 갈무리.

[뉴스로드] 사우디아라비아의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의 죽음을 둘러싼 논란이 외교문제로 번지고 있다. 미국 내에서 카슈끄지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아지면서 오랜 동맹관계를 유지해온 미-사우디 양국 사이가 서먹해지고 있다. 반면 일각에서는 사우디 인권문제는 이미 여러 차례 이슈가 됐었다며, 카슈끄지 사건으로 양국 관계가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 ‘가짜 카슈끄지’ 위장 논란에 미국 내 반사우디 여론 확산

지난 2일(현지시간) 터키 이스탄불에 위치한 사우디 총영사관에서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카슈끄지에 대해 사우디는 이미 몸싸움 중에 벌어진 우발적 사고에 의한 죽음이라고 해명했지만, 미국을 비롯한 서구권에서는 사우디 측의 해명을 믿지 못하는 분위기다. 특히 CNN은 22일 사우디 암살팀 중 한 명인 무스타파 알 마다니가 카슈끄지의 옷을 입고 가짜 턱수염을 붙인 채 총영사관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장면이 녹화된 CCTV 영상을 단독 공개하며 의혹에 기름을 부었다. 정부요원을 가짜 카슈끄지로 위장시킨 사실이 밝혀지면서 우발적 사고라는 사우디 측의 해명도 설득력을 잃게 된 것.

사우디의 실질적 지도자인 빈 살만 왕세자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여온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도 국내외의 사우디 비판여론을 의식한 듯 이날 “사우디 해명에 만족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금 사우디에 우리 요원들과 터키 최고의 정보계통 인사들이 가있다”며 “이 사건의 밑바닥까지 캐낼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지나 해스펠 미 중앙정보부(CIA) 국장은 이날 카슈끄지 피살사건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터키로 향했다.

◇ 미-사우디 관계에 카슈끄지 죽음은 종속 변수

중동 내 영향력 유지를 위해 오랜 기간 사우디와 협력해온 미국이 카슈끄지 피살사건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면서 양국의 외교관계가 시험대에 올랐다는 전망이 제기되고 있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양국 관계가 카슈끄지의 죽음으로 무너지지는 않을 것이라며 결국 이번 사건도 흐지부지 될 것이라는 우려를 제기하고 있다.

이는 무엇보다 양국이 경제·안보 측면에서 서로에게 높은 의존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22일 블룸버그에 따르면 양국 관 교역량은 연간 240억 달러 수준으로 지난해에는 350억 달러를 넘어섰다. 무엇보다 사우디는 미국의 가장 큰 무기 수입국 중 하나다. 22일 포브스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사우디가 미국에게 약속한 무기 수입량만 무려 145억 달러에 달한다.

블룸버그는 특히 사우디가 다른 이슬람권 산유국과는 달리 석유로 벌어들인 수익을 미국 경제에 상당수 투자하고 있다는 사실도 지적했다. 실제로 우버, 테슬라 등 미국 경제의 혁신성을 상징하는 주요 기업들은 대부분 직간접으로 사우디 공공투자펀드(SPIF)의 지원을 받고 있다. 게다가 사우디는 지난 8월 기준 약 1695억 달러 규모의 미국 채권을 보유하고 있다. 이는 홍콩에 이어 세계 10위 수준으로 우리나라의 1102억 달러보다 약 1.5배 많은 셈이다.

게다가 에너지 측면에서도 미국과 사우디는 불가분의 관계를 이루고 있다. 지난해 미국의 대사우디 수입량은 약 189억달러로 이중 90% 이상이 석유 및 관련 제품으로 이뤄져 있다. 포브스에 따르면, 세계 최대의 석유소비국인 미국은 사우디로부터 매일 평균 80만 배럴의 석유를 수입하고 있는데 이는 미국 내 석유공급량의 5%를 차지한다.

물론 셰일가스의 재발견으로 미국의 사우디 석유 수입량은 10년 전에 비해 일 평균 약 60만 배럴 가량 줄어들었다. 하지만 미국의 사우디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줄어들었다고 해서 사우디와의 관계를 쉽게 정리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당장 미국은 국제 석유시장의 최대 소비국으로서 최대 공급처인 사우디와 ‘시장 안정’이라는 공통의 이해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 설령 사우디에 비해 타격이 덜하다고 해도 미국이 굳이 카슈끄지 사건을 이유로 무리하게 유가 불안정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또한 미국과 달리 일본을 비롯한미국의 주요 동맹국들은 중동 산유국에 대한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편이다. 블룸버그는 미국이 국제무대에서 가진 리더십은 동맹국들의 석유공급 중단에 대한 공포를 덜어주고 있기 때문이라며, 대외정책 차원에서도 미국이 사우디에 등을 돌리지는 않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 사우디는 미국의 핵심 안보파트너, 러·중 견제

미-사우디를 이어주는 또 다른 한 축은 안보다. 이란, 터키, 이라크 레반트 이슬람국가(ISIS), 시리아의 알아사드 정권 등 중동 내 반미 국가 및 무장단체들로 인해 곤란을 겪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역내 핵심 파트너인 사우디와의 관계를 쉽게 내려놓을 수 없다. 특히 미국의 역내 핵심 파트너인 이스라엘의 안정도 이슬람 세계에서 사우디가 가지는 영향력 없이는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다. 포브스는 “사우디는 이슬람국가(ISIS), 시리아의 알 아사드 정권과의 전선에서 핵심 동맹국”이라며 “‘두 성지(메카와 메디나)의 나라’인 사우디가 불안정해지는 것은 끔찍한 결과를 불러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반대로 사우디 또한 미국의 군사력에 대한 의존도가 높다. 블룸버그는 사우디의 주요 원전이 지리적으로 분산돼있으며, 이 때문에 주요 도시는 지키더라도 원전만 점령당할 위험을 배제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지리적 불리함을 안고 있는 사우디가 이란 등 중동 내 라이벌과의 대결구도에서 확실한 안보를 보장받기 위해서는 미국의 도움이 필수적이라는 뜻. 미국 또한 사우디 정도의 영향력을 가진 역내 파트너를 찾기 쉽지 않은데다, 자칫 사우디가 중국이나 러시아의 영향권으로 편입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사우디와의 외교관계 유지를 최우선으로 고려할 수밖에 없다.

미국 내 언론을 비롯해 안보전문가들은 미국과 사우디가 아직 서로를 필요로 하고 있기 때문에 카슈끄지의 죽음이 시원하게 밝혀지지는 못할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사우디는 미국이 중동에서 달리 마땅한 협력 파트너를 찾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이를 이용해왔다”면서 “사우디는 이 때문에 인권 문제가 수십년간 제기돼왔음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관계를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손상시키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있다”고 지적했다.

블룸버그는 이어 “좋든 나쁘든 카슈끄지의 죽음을 방관하는 것은 미국이 수십 년간 내려온 여러 외교적 결정과 같은 선상에 있다”며, 카슈끄지의 죽음에 놀란 미국인들이 "그들의 항의가 이 사태를 해결하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에 다시 한 번 더 놀라게 될 것"이라고 꼬집었다. 

저작권자 © 뉴스로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