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부분의 사건은 매우 복잡하게 보여도 본질은 단순한 경우가 많다. 이미 내려놓은 결론을 합리화하기 위한 과정을 복잡하게 만듦으로써 본질을 흐리게 하여 눈과 귀를 멀게 하는 경우도 그렇다. 권력을 빼앗길까 꺼리던 정적(政敵)은 이미 상대의 죄목을 만들어 놓고 각종 이야기로 논리를 구성하여 정적을 제거한다. 이게 권력에 눈먼 사람들의 행태이다. 그렇다면 추사가 권력의 핵심에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입장만 바뀔 뿐 똑같은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왕이 죽었을 때 생모나 계모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느냐를 가지고 다툰다는 것이 참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권력에 대한 집착은 사람의 눈을 멀게 한다. 역사는 늘 당시의 상황에 휘둘려 왔고, 그리고 힘 있는 자들의 편에 서 있게 마련이니까.

제주시에서 출발하여 1135번 도로인 평화로를 타고 가다 보면 쇠북같이 우뚝한 산방산이 모습을 드러낸다. 갈래길에서 우측 길로 접어들면 잠시 후 바닷가 못미처 조용하고 평화로운 마을 대정이 ‘추사유배지’라는 이정표로 맞이한다. 깨끗하게 마련된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모퉁이를 돌아서면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나온다. 추사 김정희 기념관이다.

어째서 입구가 지하로부터 시작할까. 궁금증은 곧 풀린다. 추사가 8년여의 유배생활을 한 곳은 대정읍성의 담장 안쪽이다. 그러니 성지에 기세 좋은 건축물을 짓는 것을 일부러 피했을 것이다.

지하층에서 관람을 마치고 내부의 계단을 따라 올라온 뒤 세한도 속의 집을 본떠 만든 1층 전시관을 둘러보면 일단 작품 감상을 마치게 된다. 그리고 건물 밖으로 나오면 추사가 7년간 지내던 강도순의 집을 구경하게 된다. 내친 김에 추사가 ‘의문당’이라는 현판을 써준 대정향교까지 찾아본다면 더욱 좋을 것이지만 대정향교는 지금 건물 보수를 하느라 어수선해서 권할 바는 못 된다. 대신 추사가 향교를 가기 위해 늘 지나다녔을 길을 따라가면 ‘단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볼 수 있다.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산의 모습은 제주에서 으뜸으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단산을 일컬어 작은 금강이라고 부른다.

추사는 권력의 정점에 서있던 1786년(55세)에 정적에 의해 유배의 길을 떠나온다. 최종 도착지는 대정(大靜). 아주 고요하다는 의미의 마을. 이름은 고요할지 모르나 추사의 마음은 요동쳤을 것이다. 아니면 요동치던 마음도 대정에 오면 ‘큰 고요함’을 얻게 된다는 뜻인지. 그러나 목숨을 걸고 온 이역만리 유배지에서 그렇게 쉽게 고요함을 얻게 될 수 있을까.

추사가 가시덤불 울타리 안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된 제주도 대정현은 조선시대 최악의 유배지였다. 그곳에는 사랑하는 가족과 지인, 그동안 자신이 쌓아왔던 모든 것들과 이별한 채 습기와 벌레, 외로움과 싸우며 8년 넘는 세월을 견뎌야 했던 절망의 땅이다. 어느 순간 사약이 내려와 한 순간 흔적 없이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매일 아침이면 공포감을 느끼게 되는 장소이기도 했고.

추사가 머물렀던 강도순의 집을 보면 굴뚝이 없다. 연기를 배출하는 대신 집안으로 되돌아들게 하여 습기와 벌레를 쫓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오죽 했으면 오현 중 한 명으로 역시 대정에서 유배생활을 했던 동계 정온은 대정을 <적막지빈 寂寞之濱. 적막한 물가>이라고 표현했을까. 대정은 겉으로는 ‘적막한 곳’이었을지 모르나 실은 ‘삭막한 곳’이었을 것이다.

이에 그는 스스로 몸을 낮춰 현지인들에게 녹아들어가 학문을 가르치고 문화를 전파하면서 닫혔던 공간은 열린 세계로 닿게 됨을 경험하게 된다. 그런 가운데에도 ‘열 개의 벼루와 천 자루의 붓을 닳게’ 하는 열정으로 마침내 예술에 일가(一家)를 이루게 된다. 그 유명한 <세한도歲寒圖>의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늦게 시드는 것을 안다’는 발문의 내용은 고마운 제자 이상적을 두고 한 말이지만 사실 추사 스스로가 추위 속에서 소나무 잣나무와 같은 결의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추사가 머물던 강도순의 집(복원)
추사가 머물던 강도순의 집(복원)

그러나 추사가 8년 넘는 유배생활을 견딜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도 육지에 있는 가족뿐 아니라 동갑내기 친우 초의선사와 제자 이상적 등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제자 허련도 스승의 유배지 제주를 왕래하며 스승 곁에서 그림그리기에 몰두하기도 하는가 하면 초의선사의 심부름으로 추사에게 차를 전하려 여러 차례 제주를 방문한다. 그러니까 그를 죽음의 땅으로 내몬 이들은 정치적 이념에 얽힌 사람들이고 그를 죽음의 땅에서 살려낸 이들은 가족과 지인들이다.

8년 3개월의 세월이 흐른 후, 그는 63세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제주를 떠난다. 그가 출발하는 포구는 정확히 8년 3개월 전에 도착한 화북포였다. 출발에 앞서 그는 포구 옆에 있는 해신사(海神祠)에 들러 축문을 올린다.

“높은 사람 바다를 지나니 모든 신들이 영험을 드날릴지어라. 옛날 귀양 올 때는 잡귀의 도움을 얻었고 이제는 은혜를 입어 풀려나게 됐도다. 빛나는 왕의 영험한 뜻은 신 또한 거역 못하리니 상서로운 바람 일편 범주에 천리 파란이 잠잠하여다오. 탈 없이 잘 건너기는 오직 바다신에 달렸사옵기에 감히 엷은 정성 올리오니 신이여 강림하여 주옵소서.”

그동안 견뎌온 세월을 생각해서라도 그는 반드시 살아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을 것이다.

지난 번 대정을 다녀온 이래 몇 년의 시간이 지났다. 그리고 이번에 다시 갔다. 나의 눈은 두 가지에 고정되었다.

그 하나가 세한도 옆에 쓴 발문이다.

절해고도에서의 유배생활을 가능하게 한 것에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보내준 아내와 집에 있는 책을 보내준 아들, 그리고 차를 보내준 동갑내기 친우 초의선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자 이상적이 있었기에 끊임없이 세상과 소통하며 그의 예술과 철학이 꽃을 피울 수 있었을 것이다.

중죄인과 교류를 한다는 것만으로 목숨 보전하기가 쉽지 않았던 시절. 실제 추사와 가까이 지내던 많은 이들이 이미 추사와 단절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상적은 역관으로 청나라를 열두 번이나 드나들면서 스승을 위해 최신의 서책과 지필묵을 보내온다.

이에 감동한 추사는 제자를 위해 그림과 글을 써서 준다.

나의 알량한 한문지식에다 여기저기 읽으면서 얻게 된 것을 덧붙여 조합해서 번역을 해보았다.

정성이 가득한 세한도의 발문
정성이 가득한 세한도의 발문

지난 해에 만학집(晩學集)과 대운산방집(大雲山房集) 두 책을 부쳐오고 금년에 또 다시 우경(藕耕)이 지은 황청경세문편(皇淸經世文編)을 부쳐오니, 이것들은 모두 세상에서 쉽게 구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천만리 먼 곳에서 여러 해에 걸쳐야 얻은 것으로 한 순간에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네.

또한 세상 흘러가는 게 그저 권세와 이익만을 따르는데, 그렇게 어려운 책들을 구하기 위하여 마음을 쓰고 힘쓰기를 이처럼 하고서도 권세가와 재력가들에게 바치지 않고, 바다 밖의(제주도에 유배된 처지인) 초췌하고 곤궁한 나에게 주는 것을, 마치 세상이 권세가와 재력가들에게 빌붙는 것처럼 하는구나.

태사공(사기의 저자 사마천)이 이르기를, 권세와 이익을 보고 합친 자들은 권세와 이익이 다하면 사이가 멀어진다 했는데, 그대 또한 세상의 도도한 흐름 속에 놓인 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그대는 초연하게도 스스로 세태에 휩쓸리지 않고 권세와 이익 밖에 서있으니, 권세와 이익으로 나를 보지 않는단 말인가?

그렇다면 태사공의 말이 틀린 것이었단 말인가?

공자가 말씀하시기를, "날이 추워진 연후에 송백이 늦게 시듦을 안다" 하셨는데, 소나무와 잣나무는 사철을 통하여 시들지 않는 것으로, 세한 이전에도 한 그루의 송백이요, 세한 이후에도 그저 한 그루의 송백일 따름이오.

성인은 특별히 세한 이후를 일컬으셨는데, 지금 그대가 나를 대함은 이전이라 해도 더한 것이 없었고, 이후라 해도 덜한 것이 없네. 그런데도 이전의 그대는 일컬을 것이 없고, 이후의 그대라야 역시 성인으로부터 일컬어질 수 있다는 말인가?

성인께서 특별히 일컬으셨던 이유는, 꼭 늦게 시드는 정조만이 굳세고 절개 있는 것이어서가 아니라, 역시 세한의 때를 당하여서 느끼게 되는 바가 있었기 때문이겠지.

오호! 서한(西漢)의 순박하고 도탑던 시절에도 급암(汲黯)·정당시(鄭當時) 같은 어진 이들의 경우에도, 빈객들은 그들의 권세가 성하고 쇠함에 따라 모여들었다 흩어졌다 하여서, 마치 하비(下邳) 땅의 적공(翟公)이 문에 방을 써붙였던 고사와 같은 꼴이 되고 말았으니 인정이 없고 매몰차기가 극에 달했겠지.

슬픈 일이도다.

완당노인 쓰다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답장을 한다.

“<세한도> 한 폭을 엎드려 읽으매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리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어찌 그다지도 제 분수에 넘치는 칭찬을 하셨으며, 그 감개 또한 그토록 진실하고 절실하셨습니까? 아! 제가 어떤 사람이기에 권세와 이득을 따르지 않고 도도히 흐르는 세파 속에서 초연히 빠져 나올 수 있겠습니까? 다만 구구한 작은 마음에 스스로 하지 않을래야 아니할 수 없었을 따름입니다. 하물며 이러한 서책은, 비유컨대 몸을 깨끗이 지니는 선비와 같습니다. 결국 어지러운 권세와는 걸맞지 않는 까닭에 저절로 맑고 시원한 곳을 찾아 돌아간 것뿐입니다. 어찌 다른 뜻이 있겠습니까?

이번 사행使行길에 이 그림을 가지고 연경燕京에 들어가 표구를 해서 옛 지기知己분들께 두루 보이고 시문詩文을 청하고자 합니다. 다만 두려운 것은 이 그림을 보는 사람들이 제가 참으로 속세를 벗어나고 세상의 권세와 이득을 초월한 것처럼 여기는 것이니 어찌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참으로 과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장무상망(長毋相忘)‘.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

장무상망
장무상망

창문 하나 있는 초가 옆에 소나무 한 그루와 잣나무 세 그루가 그려진 <세한도>. 세한도라는 제목 바로 옆에 ‘우선시상(藕船是賞). 우선(이상적의 호)은 이것을 보게’, 하면서 적은 발문. 힘을 넣어 일필휘지로 써내려간 것이 아니라 가로세로 줄을 쳐 반듯하게 채워나간 294자의 글씨. 더 이상 지극할 수 없을 정도로 정성과 예를 다한 발문. 그리고 우측 아래에 찍은 인장의 내용은 ‘장무상망(長毋相忘)’. 우리 서로 오래도록 잊지 말자! 그의 마음을 붙들어 놓은 것은 무엇일까?

이상적은 추사보다 18세 연하의 중인(中人) 출신이다. 추사는 계급이라는 장벽을 넘어 신분과 관련 없이 제자를 받아 양성했다. 그러했기에 이상적 역시 스승에게 위험을 감수하면서도 의리를 지켰고, 두 사람은 스승과 제자라는 관계와 신분, 세대를 넘어 신뢰와 존경으로 다져진다.

이상적은 추사에게 더 이상 나이 어린 제자가 아니라 생을 함께 하는 벗이었을 것이다. ‘세한’이 스승으로서 제자에게 준 믿음의 신호라면 ’장무상망(長毋相忘)‘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동반자에게 보내는 인간적 고백이 아니었을까. 그동안 자신을 있게 한 모든 것들로부터 잊히는 것이 두려웠겠지만, 단 한 사람만에게라도 잊히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그의 마음을 가장 애절하게 드러낸 말이 장무상망이었음에 틀림 없다. 그것만이 아니다. 추위를 견디며 의리를 지키는 사람됨의 본분을 잊지 말라는 삶의 도리를 잊지 말라고 당부했던 것이다.

스승도 제자를 잊지 않았고 제자도 스승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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