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걸어보는 제주도 길] 불행한 시대를 살았던 행복했던 그들
[다시 걸어보는 제주도 길] 불행한 시대를 살았던 행복했던 그들
  • 남국성(여행가)
  • 승인 2018.10.29 10: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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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섭과 변시지가 사랑했던 서귀포
이중섭 산책로에 있는 수국
이중섭 산책로에 있는 수국

오랜만에 서울서 내려왔다는 선배의 연락을 받고 훌쩍 서귀포로 달렸다. 그렇지 않아도 하루 날을 잡아 이중섭이 처자를 데리고 와 잠시 살던 곳을 꼭 보고 싶던 차라 잘 됐다 싶었다.

늦은 밤까지 막걸리로 회포를 풀고 이튿날 일어나 거리로 나섰다.

서귀포항에서 매일올레시장으로 올라가는 언덕길이 ‘이중섭거리’다.

중섭은 1·4후퇴 때 부산 피난민 수용소를 거쳐 서귀포에 도착한다. 중섭에게 있어 서귀포는 따뜻한 남쪽이었다. 일본인 아내 야마모토 마사코에게 지어준 한국식 이름 남덕(南德)에 ‘남녘 남南’이 들어간 이유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중섭은 11개월 머문1.3평짜리 방과 부엌
이중섭은 11개월 머문1.3평짜리 방과 부엌

시인 나희덕은 중섭의 서귀포 생활을 상상하며 <섶섬이 보이는 방 -이중섭의 방에 와서>라는 작품을 썼다.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데기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껍데기를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 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 한 날 많았더라도

은박지 속의 바다와 하늘,

게와 물고기는 아이들과 해질 때까지 놀았다

게가 아이의 잠지를 물고

아이는 물고기의 꼬리를 잡고

물고기는 아고리의 손에서 파닥거리던 바닷가,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빈 조개껍데기에 세 든 소라게처럼』

아고리는 턱이 긴 중섭을, 발가락군은 발가락이 예쁜 아내를 가리키는 말이다.

1.3평. 중섭이 아내와 두 아들과 함께 살았던 방의 크기다. 찬장조차 없는 부엌 역시 다르지 않다. 교도소 독방만도 못해 모로 누워 칼잠을 자기에도 좁다란 그곳에서의 11개월을 그는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때라고 말했다. 보고도 도저히 믿기 어려운 그들의 현실을 나는 관음증 환자처럼 훔쳐보며 부끄러워졌다.

‘그 행복조차 길지 못하리란 걸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알지 못한 채 살았다‘

문득 천상병의 ‘귀천(歸天)’이 떠오른다.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새벽빛 와 닿으면 스러지는

이슬 더불어 손에 손을 잡고,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노을빛 함께 단 둘이서

기슭에서 놀다가 구름 손짓하면은,

나 하늘로 돌아가리라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순수함이 극에 달하면 이렇게 속세를 달관하게 되나 보다.

따뜻한 남쪽나라에서조차 가난을 이기지 못한 중섭은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내고 자신은 부산으로 간다. 이후 일주일짜리 임시체류증을 갖고 일본으로 건너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아내와 두 아들을 만난 후 돌아온다. 그러나 그는 다시 돌아가지 못하고 병마에 시달리다 지켜보는 이 하나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이한다. 화장된 그의 유골은 망우리 공동묘지와 일본으로 반씩 보내진다. 1956년, 그의 나이 41세의 일이다.

지금 그의 작품 일부는 그가 살던 집 위쪽 <이중섭 미술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중섭이 사랑했던 서귀포 섶섬은 그가 살았던 지금의 집에서 보이지 않는다. 집 뒤 언덕으로 올라가서도 나무와 전봇대와 전깃줄과 앞을 가리는 건물로부터 숨바꼭질하듯 이리저리 자리를 옮겨야 좌측 멀리로 보인다.

이중섭거리
이중섭거리

그가 즐겨 산책했던 곳에는 수국이 무더기무더기 피었지만 진한 보랏빛이 어쩐지 그의 가슴에 든 애처로움의 멍처럼 보인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거리는 온통 이중섭의 그림을 모사한 벽화와 간판, 기념품, 각종 수공예품, 편집샵 등으로 화사하다. 생전에 가난하게 살다 간 화가는 죽어서 사람들을 먹여살리고 있다. 그의 넋이 만국기처럼 거리를 뒤덮고 있다.

바람 부는 고향
바람 부는 고향

아쉬움을 남기고 발길을 옮긴 곳은 서귀포가 기당미술관.

기당은 서귀포 법환동 출신의 재일교포 사업가 강구범(1909-1994)이다. 그는 1985년에 고향을 찾았다가 외사촌인 우성 변시지 화백을 만나 미술관 건립을 약속한다. 당시 3억 2천 만 원을 희사해서 2년 뒤 우리나라 최초의 사립미술관을 건립한다.

미술관에는 기당의 친형인 강용범의 서예작품과 장리석, 김기창, 박노수, 고영우, 강요배, 이왈종 등의 작품이 있다.

입구를 들어서자 왼쪽으로 눈을 잡아끈 것, 황토색 바탕 위에 그러진 검정색 필선이다.

‘알면 보인다’는 그 유명한 말은 이 순간 옳지 않다. 글자를 읽을 줄 몰라도 선한 믿음만 갖고 신 앞에 선 어린 양처럼 나는 그의 그림 앞에서 아! 하는 탄식 같은 감탄사만 내뱉았다.

속에서 은근히 불편함, 아니 불안감이 솟아올랐다. 가벼운 마음으로 들어선 그곳은 그러나 평화로움과는 거리가 멀었다. 어지럼증을 느끼게 하는 탁한 황토색에 검정색 필선이 평화로움을 깨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바람 부는 고향
바람 부는 고향

한 마리의 바닷새와 돌담의 까마귀와 쓰러져 가는 초가와 잔뜩 휜 소나무.

꼿꼿하게 서있는 나무는 한 그루도 없다.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의 등 역시 휘어져 있다. 고개마저 푹 숙이고 있다. 휘어지고 굽은 모습이 그의 내면일 리는 없다. 현실인식과 현실에 대한 대응방식은 엄연히 차이가 있을 것인데, 캔버스에는 그의 인식을 드러냈을 것이고 대신 대응방식은 그의 삶 자체의 행위예술로 보였을 것이 분명하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는 삶이 곧 예술적 행위였을 것이다.

연민과 우수(憂愁), 외로움과 고독함과 고졸(古拙)함과 역동성(力動性). 적절한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다.

변시지의 작품에서는 바다도 황토색이고 집도 황토색이다. 하늘도 바람도 오름도 태양도 황토빛깔이다. 거기에 단 하나, 시뻘겋던 용암이 식어 시커멓게 식어버린 현무암의 색이 더해졌을 뿐이다. 갑자기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와 화실을 해바라기로 가득 채우고 싶어 했던 빈센트 반 고흐가 겹쳐 떠오른 이유다.

바람, 폭풍, 고향, 기다림, 그리움.... 나는 신들린 사람처럼 그의 작품에 제목을 붙여갔다. 그리고 돌아나오면서 본 도록에서 내가 붙인 제목들이 붙어있다는 것을 확인한 순간 온몸에 소름이 끼친다.

1926년생 변시지는 여섯 살 때 가족과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소학교를 다닌다. 1942년부터 오사카 미술학교 서양학과에서 수학하고 1948년에 광풍회 최고상을 수상하여 광풍회 정회원 및 일전 무심사의 자격을 부여받아 심사위원이 된다. 광풍회는 일본 문부성 주최의 일전(日展)을 주관하는 일본의 최고 중앙화단으로서 약관의 나이(23세)에 최고(광풍)상 수상은 일본화단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이라고 한다. 그는 타고난 천재화가였다. 1997년, 르네상스 이후 세계 100대 화가에 뽑힌 것과 <난무>(1997), <이대로 가는 길>(2006) 두 작품이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10년이란 긴 세월동안 걸렸던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못난이 삼형제 있는 방
못난이 삼형제 있는 방

그러나 그는 모든 것을 놓고 오랫동안 떠나있던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마음 속에 가둬두었던 고향의 바다와 오름과 나무와 바람과 말과 새를 ‘폭풍’처럼 쏟아낸다.

이제 그는 가고 없지만 못난이 삼형제 인형이 올라앉아 있는 오래된 TV와 작은 작업실이 미술관에 재현되어 있는 것을 보며 어디서 그런 폭발적인 그림이 나왔을까 궁금하다.

밖으로 나오니 햇살은 여전히 누부시게 빛나고 있다. 잠시 격랑이 몰아치는 입체영화를 보고 난 기분이다.

이왕 내친 김에 정방폭포 입구에 있는 이왈종 미술관까지 두루 섭렵해보려던 애초의 계획을 바꿨다. 난 참 얄팍하고 염치가 없는 놈이다. 어찌 이중섭과 변시지를 단 몇 시간만에 ‘관광’하고 나중에 도록이나 뒤져 유식한 척 하려고 했으니 말이다(내가 이렇게 고백해도 나의 죄가 사라지지 않는다는 건 안다).

오늘은 여기까지만. 그래 여기까지다. 솔직하게 말해서, 어디 가서 ‘대낮 쌩맥주’ 쭉 들이켜면서 불행한 시대를 살았던 행복했던 그들을 생각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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