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고대 그리스 의학 — 찬란한 이성의 빛

판도라의 상자가 열리는 그 순간부터 그리스인들은 병마와 투쟁하는 역사에 돌입했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는 기원전 12세기 초 미케네가 그리스의 각 폴리스를 연합하여 10만 대군을 이끌고 바다를 건너 트로이를 정복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전쟁은 10년 넘게 지속되었으며 그 결과는 매우 참혹했다. 일부 학자들은 당시 전쟁으로 사망률이 77.6%에 달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처럼 높은 사망률 앞에서 의사의 역량은 가히 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그리스 연합군을 수행했던 의사들은 영웅 중의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의술에 능통한 그들의 존재는 곧 ‘군대가 보유한 최상의 공공서비스’였던 것이다. 호메로스 또한 “의사 한 명의 손에 무수한 생명의 생사가 달려 있다. 병사들의 상처에 박힌 화살을 빼고 약을 발라 치유하는 그들의 기술은 그 누구도 따라올 자가 없다.”라며 의사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격렬한 전투를 치를 때면 아무리 용맹한 장수라도 후방으로 빠져 상처를 싸매고 진통제를 복용하며 지혈처리를 해야 하는 경우가 무수히 많았다. 상체는 인간이고 하체는 말인 켄타우로스족의 영수 키론은 심성이 곱고 총명했으며 정의감이 강해 남을 돕기를 좋아했다. 키론은 그의 의술을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스에게 전수했다. 아킬레스는 이러한 의학지식을 당시 부상을 당했던 자신의 동료 페트로클루스에게 전해주었다.

한번은 페트로클루스의 전우가 화살에 맞아 중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페트로클루스는 그의 가슴 아랫부분을 누르며 칼로 허리에 꽂힌 화살을 빼내었다. 그리고 양파즙을 상처에 발라 지혈시켰다. 물론 그리스 군대에 최초로 의술을 전한 인물은 키론이라고 할 수 있다. 고대 그리스시대의 꽃병에는 키론이 트로이의 왕자 헥토르의 공격으로 인하여 부상을 당한 페트로클루스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해주었는지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는 약용 식물의 사용방법에 정통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지식을 기꺼이 주위 사람들에게 전수해주었다. 이에 병사들은 전쟁 중에 부상을 당하더라도 서로 치료해줄 수 있었다.

키론의 제자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은 그리스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이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태양의 신 아폴로의 아들로 아내의 부정에 화가 난 아폴로가 그 자궁에서 강제로 꺼내간 아기였다. 아폴로는 이 아기를 키론에게 보내어 의술을 배우게 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곧 스승인 키론을 능가할 만큼 뛰어난 의술을 보유하게 되었으며 제우스조차 그 능력을 질투할 정도였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진료를 하러 갈 때 늘 독사 한 마리를 데리고 나섰다. 당시 뱀은 지혜의 화신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특히 소아시아 셈족(Semites)에게 뱀은 질병을 낫게 해주는 치유의 화신을 상징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인들은 뱀 고기를 먹으며 의술에 통달하고 불로장생하기를 바랐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는 종종 호루스의 지팡이와 비교된다.

호루스의 지팡이는 뱀 두 마리가 서로 휘감고 있는데 뱀은 인간과 신을 연결시켜주는 매개체와 같은 존재였다. 이에 반해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에는 뱀이 한 마리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고대 학자들은 아스클레피오스의 지팡이를 진정한 의학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키론에게 배운 의학지식을 자신의 딸 히기에이아와 아들 마카온과 포달레이리오스에게 전수해 주었다. 호메로스는 마카온과 포달레이리오스의 용맹과 의술을 칭송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스파르타의 왕 메네라우스가 화살에 맞았을 때 마카온은 바로 그에게 달려가 화살촉은 그대로 두고 화살대를 부러뜨렸다고 한다. 그리고 상처에 난 피를 빨아낸 후 향기로운 고약을 발라주었다. 후에 마카온은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부상을 당했다. 파리스는 스파르타의 여왕 헬레나를 데리고 도망쳐 트로이 전쟁을 일으킨 장본이었다. 마카온이 자신을 치유해줄 의사를 찾지 못하고 홀로 쓸쓸이 천막 안에 누워있는 것을 본 그리스 병사들은 안타까움에 어쩔 줄을 몰랐다.

마침내 트로이 전쟁이 끝나고 귀향길에 올랐던 포달레이리오스는 자신이 탄 배가 카리아 해안에서 침몰되는 불운을 겪게 되었다. 다행히 양치기에 의해 구조되어 왕궁으로 인도되었다. 그때 마침 카리아 왕국의 공주 시르나가 몸에 균형을 잃고 넘어지면서 심한 상처를 입는 사건이 발생했다. 왕궁의 의사들은 모두 서로 눈치만 볼 뿐 선뜻 치료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이에 포달레이리오스가 나서 의학사상 최초로 사혈요법을 시도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비록 혈액의 기능에 대해서는 잘 몰랐지만 혈액의 중요성은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사혈요법은 수많은 질병치료에 이용되었다. 또한 정맥을 절단하거나 부항을 뜨는 흡각(吸角) 시술법을 실시하기도 했다.

혈관 수술 장면의사가 환자에게 거머리 사혈치료를 하고 있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방혈요법은 수많은 질병 치료에 이용되었다. 또한 정맥을 절단하거나 부황을 뜨는 흡각(吸角) 시술법을 실시하기도 했다.
혈관 수술 장면. 의사가 환자에게 거머리 사혈치료를 하고 있다. 그 후 수백 년 동안 방혈요법은 수많은 질병 치료에 이용되었다. 또한 정맥을 절단하거나 부황을 뜨는 흡각(吸角) 시술법을 실시하기도 했다.

이 치료를 계기로 시르나 공주의 마음을 얻은 포달레이리오스는 그녀와 결혼하게 되었다. 후에 그는 두 개의 폴리스를 세웠는데 하나는 시르나 공주의 이름으로, 또 하나는 자신을 구해준 양치기의 이름으로 명명하였다고 한다.

포달레이리오스는 심리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번뜩이는 아킬레스의 두 눈을 보고 그가 거의 미치광이 수준임을 진단해 내기도 했다.

아스클레피오스의 딸 히기에이아는 질병을 예방하는 여신으로 ‘위생(Hygiene)’이라는 단어도 그녀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당시 그리스에는 이미 예방 의학의 개념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아테네에 그녀의 신전이 있으며 신전 안에는 한 손에 제사용 잔을 들고 뱀에게 먹이를 주고 있는 히기에이아의 모습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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