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고대 그리스 의학 — 찬란한 이성의 빛

호메로스시대의 의학은 점술에 기반을 두고 발전했다. 그러나 그리스 문화가 동양의 영향을 받게 되면서 의학에는 점점 종교적 색채가 가미되기 시작했다. 호메로스 이후의 문학작품에는 요괴, 점술, 앞날 예견, 저주 등의 내용이 자주 등장한다. 그리스의 유명한 철학가 데모크리토스(Demokritos)가 동시대의 의사 히포크라테스에게 보낸 편지에는 “사람들은 건강을 유지하는 방법을 몰라서 그저 신에게 기도만 드릴 뿐이다.”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아폴로, 아르테미스, 아테네, 아프로디테, 그리고 지옥의 신에 이르기까지 그리스의 신들은 모두 질병을 고치고 병마를 쫓아내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스의 종교는 풍부한 시적 정서가 담긴 신화적 색채가 강하다. 그리스의 신들은 인간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으며 대자연에 역행하지도 않는다. 올림피아의 모든 신들이 그리스인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은 바로 건강이었다. 이로써 경건한 신앙은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에 대한 경배로까지 이어졌다.

기원전 770년경 이 자애로운 의학의 신을 기념하기 위한 첫 번째 신전이 그의 고향 테살리아에 세워졌다. 각종 질병에 시달리던 그리스인들은 아스클레피오스를 찾아와 그에게 경배를 드리며 쾌유를 빌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신전은 경배의 장소뿐만 아니라 진료를 겸한 병원의 기능까지 담당하게 되었다. 신전의 수도사들이 돈을 받고 환자들을 치료하기 시작했으며 치료가 실패하면 환자를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으로 데리고 가 신의 도움을 청하며 빌었다.

에피다우로스, 코린트, 키오스, 아테네, 베르가마, 미케네 등 30여 개 도시에도 신전을 보유했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 신전들은 후에 기독교 시대에도 여전히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5세기까지도 사람들은 여전히 신전을 찾았다. 신전이 세워진 곳들은 대개 풍경이 수려하고 기후가 쾌적하며 부근에 온천이 있어서 환자들이 치료를 겸할 수 있었다. 제사, 수양, 기도, 꿈풀이, 광천욕, 안마, 그리고 수술까지 시행되었고 연고, 마취연기, 토사(吐瀉, 토하게 하거나 설사하게 하는) 등의 치료행위가 이루어졌다.

이곳에서 치료를 받고 기적처럼 병이 낫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이는 환자 대부분을 엄격하게 선별하여 수용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우선 환자를 진찰한 후 불치병을 앓고 있는 사람은 모두 거부함으로써 신전과 수도원의 명성을 유지했던 것이다.

수도사들은 이들을 ‘순결한 사람’이라고 분류해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에 들여보냈다. 수도원의 1차 진찰을 통과한 환자들은 신전 앞에서 죄를 씻는 제사의식을 치뤘다. 일부 환자들은 정식 치료에 들어가기 전에 수도원에서 15일 동안 금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의식을 마치고 나면 아슬아슬한 계단을 지나 지하에 있는 욕실에 들어갔다. 환자들은 이곳에서 몸과 마음을 모두 정결하게 해야 했다. 질병은 바로 내면 깊은 곳에 숨어있기 때문이었다. 몸과 마음을 정결하게 하고 나면 신단에 가까이 가기 전에 ‘아바돈(Abaddon: 사탄을 뜻함)’이라고 불리는 안수의식을 행했다. 환자들은 치료를 받기 전에 아마(亞麻)로 된 흰색 예복을 입고 꿈을 꾸도록 인도되었다. 꿈은 아스클레피오스 수도원의 고유한 치료방법이었다. 신전의 제사장은 환자들을 성지의 특수한 방으로 안내한 후 바닥에 누워 휴식을 취하도록 했다. 금식을 통해 모든 에너지를 소진한 환자들은 스스로 최면을 걸어 자기 꿈속에 신이 나타나 어떠한 계시를 내려줄 것을 간절히 기원했다.

환자들이 아스클레피오스를 보았다고 믿도록 하기 위해 이들이 혼미 상태에 빠지면 키가 큰 수도사 한 명이 가면을 쓴 채 조수 한 명을 데리고 신전과 복도를 지나다녔다. 그들은 복화술도 할 줄 알았다고 한다. 환자들이 잠이 들면 수도사들은 ‘신성한 뱀’을 풀어 놓고 뱀이 이끄는 대로 환자들이 누워있는 침대 주변을 맴돌았다. 온순한 뱀은 은은한 피리 소리에 맞춰 환자의 몸을 감싸며 잠자고 있는 환자의 아픈 부위를 핥았다.

다음날 아침이 되면 모든 환자들은 제사장에게 전날 밤 자신이 꾼 꿈을 얘기했다. 제사장은 꿈풀이를 한 후에 ‘신의 계시를 받은’ 처방전을 내렸다. 만약 환자의 병세가 호전될 가망이 없으면 수도사들은 환자의 믿음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라며 책임을 전가했다.

아스클레피오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의술의 신으로 로마 신화의 아이스쿨라피우스와 동일인이다. 아폴론의 아들로 켄타우로스(반인반마) 케이론에게서 의술을 배워 나중에 의술의 신으로 추앙받았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인 신성한 뱀이 감긴 지팡이는 오늘날까지도 의사들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스클레피오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의술의 신으로 로마 신화의 아이스쿨라피우스와 동일인이다. 아폴론의 아들로 켄타우로스(반인반마) 케이론에게서 의술을 배워 나중에 의술의 신으로 추앙받았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상징인 신성한 뱀이 감긴 지팡이는 오늘날까지도 의사들의 상징으로 여겨지고 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의 주요 치료 과정은 수치요법(水治療法, hydropathy: 물을 이용한 물리요법), 기혈순환요법, 연고치료, 안마, 관장, 장세척, 운동, 식이요법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와 함께 심리치료를 병행하여 환자의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했다. 이처럼 감정적인 요소가 가득해 보이는 치료 과정에서도 이성적인 의학의 기초를 엿볼 수 있다. 현대 의학의 관점에서 보면 아스클레피오스 수도원은 일종의 요양원에 가까웠다. 환자들이 치료를 받는 동안 그들과 함께 신전에 온 가족들은 신전 주변의 상인, 배우, 변론가들과 어울리며 나름대로의 즐거움을 만끽했다. 고대 그리스의 희극작가 아리스토파네스(Aristophanes)는 자신의 희극을 통해 신을 숭배하는 이러한 치료법을 ‘환자미혹요법’이라며 비꼬기도 했다.

이 신전에서는 외과시술이 이루어지기도 했는데 시술은 제사장이 직접 하지 않고 지위가 비교적 낮은 조수가 대신했다.

신전의 치료 과정에서 종종 기적이 발생하기도 했다. 부종(浮腫)을 앓고 있던 한 여성이 신의 계시를 받기 위해 자신의 어머니에게 신전에 가서 기도를 드리며 꿈을 꾸도록 청한 적이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신전의 각종 의식을 마친 후 꿈을 꾸었는데 꿈 속에서 과연 신의 계시를 받았다. 아스클레피오스가 딸의 목을 자르고 목에서 피가 나오게 한 후 다시 목을 제자리에 붙여 놓았던 것이다.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딸은 이미 병이 깨끗하게 나아 문 앞에서 어머니를 기다리고 있었다.

환자들은 신전을 떠나기 전에 일정한 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또한 자신의 이름을 적은 액자에 병고에 시달린 과정과 그 치료 과정을 모두 적어 남겨두어야 했다. 이는 후에 신전에 들어온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환자의 치료비용은 개인의 능력에 따라 차등 지불토록 했다.

가난한 어린 아이는 신에게 열 닢만 바쳐도 되었지만 고리대부업을 하는 바리새인 상인들은 금화 2천 닢을 내야 했다. 신전에 남아 있는 기록에는 농아 아들의 병이 낫자 그 아비가 1년에 걸쳐 치료비를 갚았다는 내용이 나온다.

대부분의 환자들이 신에게 공물을 바치는 한편, 병이 완치된 후 귀금속으로 병이 나은 장기와 동일한 크기의 모형을 만들어 치료비용을 대신하곤 했다. 이러한 모형을 보면 당시에 이미 초보적인 해부지식이 존재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본래 크기보다 몇 배나 더 큰 대형 입체 부조에는 환자가 두 손으로 자신의 병든 다리를 감싸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하지정맥류(다리에 푸른 핏줄이 보이거나 혈관이 포도송이처럼 꼬이거나 부풀어 오르는 병)를 앓았던 환자가 공물로 바친 것이다. 이 모형의 재료로는 세라믹, 합금, 금, 은, 상아 등이 사용되었으며 고대 그리스 제사용 부조 가운데 가장 전형적인 특징을 보여준다. 아테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 안에 있으며 기원전 400년경의 작품이다. 지금은 이미 파괴되어 터만 남아 있는 에피다우로스와 아테네 수도원 유적에서도 이와 유사한 작품들이 다수 발견되고 있으며 신기한 치료 사연들도 찾아볼 수 있다. 백내장 수술의 성공사례를 비롯해 위험천만한 관절복원수술, 대담한 복부수술까지 그 내용도 매우 다양하다.

아스클레피오스에 대한 숭배사상은 그리스인들의 질병에 대한 관심과 쾌유를 바라는 심정을 대변해 주고 있다. 아스클레피오스 신전의 영향력으로 종교는 다시 의학 위에 군림하는 경향을 보였다. 제사장들이 환자를 치료하면서 축적한 경험과 지식은 후대에까지 대대로 전해졌다. 아스클레피오스의 수도원에서도 이성을 앞세운 신진 의사들이 탄생하면서 의학이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이들의 사상은 의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기원전 6세기부터 수도사들은 종교적으로 의식화된 치료에서 점점 벗어나 세속의 의사들처럼 전문화된 의학지식을 갖추게 되었다. 일정한 의학 과정을 마친 학생들은 전문위원회에서 증서를 받고 의료행위를 할 수 있었으며 의학교들도 반드시 이 위원회의 인가를 받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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