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장 고대 그리스 의학 — 찬란한 이성의 빛

피타고라스의 제자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BC 483~423)는 시칠리아 섬의 왕자였다. 그러나 왕위에 관심이 없었던 그는 도처를 유랑하며 학문을 구했으며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다. 엠페도클레스에 대해서는 신기한 전설이 많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그는 바람을 부릴 줄 알았으며 죽은 지 30일이나 되는 여자를 살려낸 적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최후에는 자신이 신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에트나 화산 꼭대기의 분화구 속에 몸을 던졌는데 그만 목숨을 잃고 말았다. 지금까지도 그는 철학자이자 예언가, 과학자, 방술사로서 각계의 인정받고 있다.

엠페도클레스는 이탈리아의학파 창시자이기도 했다. 이탈리아의학파는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다. 엠페도클레스는 피타고라스의 제자였기 때문에 수학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숫자 ‘4’에 특수한 의미를 부여했다. 즉 세상은 불, 흙, 물, 공기 4대 원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들은 열기, 냉기, 습기, 건기를 대표한다. 그는 4원소가 서로 다른 비율로 결합하여 각종 물질을 형성한다고 생각했다. 우주가 순환운동을 하는 중에도 이 4원소는 영원히 변치 않으며 ‘사랑’을 원동력으로 결합하고 ‘증오’의 힘 때문에 사분오열한다고 주장했다. 이 두 가지 운동방식이 세계 만물의 변화와 멸망을 주재한다고 여겼으며 눈에 보이는 실체는 순간적으로 존재하는 것일 뿐, 4원소와 사랑, 증오만이 영원한 것으로 생각했다. 엠페도클레스는 물병과 그릇이 물 위에 뜨는 현상을 관찰하던 중 공기의 실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이러한 이론을 바탕으로 그는 현재의 사고로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기괴한 생각들을 쏟아냈다. 특히 원시적이고 다소 환상적인 색채까지 가미된 일종의 ‘적자생존(適者生存)’ 이론까지 선보였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초기 세상에는 머리만 있고 목이 없는 생물을 비롯해 등은 있는데 어깨가 없는 것, 그리고 일부 기관과 장기들만 독립적으로 떨어져 있는 것 등 다양한 생물체가 널리 퍼져 있었고 우연한 기회에 이들이 결합해 무수한 손을 가지게 되었거나 머리가 여러 개 달린 생물, 얼굴은 사람인데 몸은 말, 또는 얼굴이 말이고 몸은 사람인 생물, 남자도 여자도 아닌 생명체 등 천태만상의 동물들이 생겨났는데 최후에는 모든 기관이 합리적으로 결합된 생명체만이 살아남았다는 것이다.

그는 동일한 분량의 4대 원소가 결합해 근육을 형성하고 신경은 불, 흙, 물의 비율이 1:1:2로 결합물이 되어 형성된 것이며 발톱은 신경과 공기가 결합해 표면이 냉각된 결과물이라고 보았다. 골수는 물, 흙, 불의 비율이 2:2:4로 혼합된 것이며 땀과 눈물은 혈액 일부가 변형된 것인데 혈액은 온도가 높을수록 유동성이 커지고 조밀해져서 밖으로 배출된다고 생각했다.

초기의 그리스 의학에서는 혈액, 담즙, 점액 등 3가지 체액설이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엠페도클레스는 4대 원소와 호응이 되도록 담즙을 황담즙과 흑담즙으로 나누어 4가지 체액설을 주장했다. 중국 의학에서도 사계(四季)를 오행에 맞추기 위해 하절기에서 중하(仲夏: 한여름이란 뜻으로 음력 5월에 해당함)를 억지로 구분해 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분법이 아주 허무맹랑한 얘기는 아니었다. 물이 차갑고 습한 특성을 지니고 있으며 흙은 건조하고 차가운 특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는 등 일말의 과학적 원리를 내포하고 있었다. 외상을 입으면 혈액이 흘러나오고 구토 시에는 황담즙이 나오며 소화기에 출혈이 생기면 검은 변을 보고 감기에 걸리면 끈끈한 콧물이 흘러나온다. 이처럼 혈액, 점액(점막), 황담즙, 흑담즙 등 인체의 4가지 체액이 많아지거나 적어지면서 불균형을 이루면 질병에 걸리게 된다고 생각했다. 4가지 체액이 인체에 정상적으로 분포하면 건강한 상태를 나타낸다.

히포크라테스는 엠페도클레스의 이러한 이론을 의학에 접목해 ‘4가지 체액설’로 발전시켰다. ‘4가지 체액설’은 자연계의 물, 불, 흙, 공기의 4대 원소와 차가움, 뜨거움, 건조함, 축축함 등 4가지 특성을 유기적으로 결합해 완성했다. 인체의 각 장기에도 4가지 체액이 서로 호응하며 분포하고 있는데 때로는 2가지 체액이 결합해 또 다른 특징을 형성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도 4가지 유형으로 구별했다. 즉 낙천적이고 명랑한 사람은 낙관적 인간, 우울하고 쉽게 상심하는 사람은 ‘흑담즙형’에 속하는 근심형 인간, 열정이 넘치고 성격이 괄괄하며 행동이 적극적인 사람은 ‘황담즙형’의 화를 잘 내는 인간, 그리고 행동이 굼뜨고 감정이 메마른 냉정한 인간 등으로 구별했다. 냉정한 인간형에 속하는 사람은 혈액 중에 점액이 많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불(열기) - 혈액(심장에서 나옴) - 뜨겁고 습함 - 혈액과다체질

•물(냉기) - 점액(뇌에서 나옴) - 차갑고 습함 - 점액체질

•흙(건기) - 황담(간에서 나옴) - 뜨겁고 건조함 - 성미가 급한 체질

•공기(습기) - 흑담(비장에서 나옴) - 차갑고 건조함 - 우울증 기질

이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전파되었으며 1000년 동안 의학의 주류를 형성한 로마의 천재 의사 갈레노스(Galenos: 129~199)의 생리학 이론에도 깊은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갈레노스는 히포크라테스의 ‘4가지 체액설’을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인간의 성격과 체질을 4가지로 구분했다.

즉 황담즙형 체질은 용감하고 정력이 왕성하며 흑담즙형은 고집이 세고 우울한 성격의 소유자이며 혈액과다체질은 열정적이고 과감하며 점액체질은 아둔하고 게으른 유형에 속했다. 그는 염증도 4종류로 나누었다. 즉 혈액에 의한 피부감염, 황담즙에 의한 단독(丹毒: 피부의 상처 부위로 세균이 들어가서 살갗이 벌겋게 되면서 화끈 달아오르고 열이 나는 증상), 점액에 의한 부종, 흑담즙에 의한 악성종양 등이다. 발열 증상도 다음의 4가지로 구분했다. 즉 혈액에 기인해 고열이 지속되는 경우, 황담즙에 기인해 3일 동안 고열이 나는 경우, 점액에 기인해 매일 고열이 나는 경우, 흑담즙에 기인해 4일 동안 고열이 나는 경우 등이다. 그의 이론은 후에 ‘4가지 기질론’으로 발전했다.

약품과 수술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이 이론은 치료의 근거로 많이 이용되었다. 일례로 사혈 치료법은 나쁜 피나 필요 없는 잉여의 피를 배출하는 효과를 볼 수 있었으며 설사약이나 구토를 유발하는 약은 인체의 부패하고 상한 액체를 배출하게 했다. 식사량을 줄이는 식이요법은 체내에 과다한 체액이 형성되는 것을 방지할 수 있었으며 차가운 오이는 열병 치료에 이용되었다.

중세 의학은 ‘4가지 체액설’의 주도 하에 발전했으며 이는 서양의 의학 이론을 2천년 동안이나 지배했다. 중국의 ‘음양오행설’이 중국 의학 전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것처럼 ‘4가지 체액설’은 서양 의학 전반은 물론, 사회윤리와 천문, 지리 영역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17세기부터 점차 쇠퇴하기 시작해 시들어갔지만 19세기에도 이 이론을 포기하지 못하는 보수 성향의 의학자들이 있었다. 현대의 한의사 가운데서도 의학 이론은 《내경》, 치료방법은 장중경, 약재는 《본초강목》을 따르는 의사들이 많이 있다. 이들은 아직도 음양오행설과 경락학을 만고불변의 진리로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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