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의술이야기]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유래
[동서고금 의술이야기]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유래
  • 강선주, 이문필 등 20인(빅북 제공)
  • 승인 2018.11.16 0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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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장 고대 그리스 의학 — 찬란한 이성의 빛

히포크라테스는 기원전 460년 아름다운 삼림이 우거진 그리스 코스 섬의 의사 집안에서 태어났다. 그의 조부와 부친 모두 의사였으며 어머니는 산파였다. 히포크라테스는 그리스 의학의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으며 모친은 헤라클레스 혈통을 이어받았다고 한다. 그는 키가 매우 작았으며 청년 시절에 그리스, 흑해, 북아프리카 등을 여행했다. 코스 학교에서 수학했으며 여행을 하면서도 의술을 행하고 민간 의학에 깊은 관심을 보였으며 한때 군의관을 맡은 적도 있었다. 피타고라스, 알크마이온, 엠페도클레스 등 유명한 철학자의 영향을 받아 자연철학을 의학에 접목해 발전시켰다. 코스 학교에서 수년간 후학을 양성했으며 기원전 337년 그리스 테살리에서 향년 80여세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날 무렵 그의 명성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의 무덤 주변에 있는 꿀을 먹으면 병이 낫는다는 소문이 돌 정도로 사람들은 그를 매우 숭배했다. 히포크라테스의 두 아들과 사위도 의사가 되었으며 후에 그를 따르는 의사들이 구름처럼 모이면서 ‘히포크라테스학파’를 형성했다.

히포크라테스에 관해서는 수많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한번은 그가 시장에 갔다가 온몸에 경련을 일으키며 얼굴빛이 자색으로 변한데다 입에서는 끊임없이 거품을 뿜어내는 사람을 보게 되었다. 발작을 일으킨 사람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그에게 마귀가 들었다며 신전의 수도사를 모셔와야 된다고 고함치기 바빴다. 마침 그곳을 지나던 수도사 한 명이 그 환자를 보고 얼굴을 찌푸리며 마귀가 들었으니 신의 용서를 받으러 신전으로 데려가라고 말했다.

의학계의 의성 히포크라테스서양 의학의 선구자 히포크라테스는 고대 의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의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인체의 생리나 병리에 관한 그의 사고방식은 체액론(體液論)에 근거하였다. Life is short, the art is long. -히포크라테스
의학계의 의성 히포크라테스서양 의학의 선구자 히포크라테스는 고대 의학을 집대성한 인물로 ‘의학의 아버지’로 일컬어진다. 인체의 생리나 병리에 관한 그의 사고방식은 체액론(體液論)에 근거하였다. Life is short, the art is long. -히포크라테스

이때 히포크라테스가 나서서 이 환자는 간질에 걸렸으므로 신전에 데려가면 오히려 치료를 지연시킬 뿐이라고 주장했다. 간질은 순간적으로 뇌기능에 이상이 생겨 발작을 일으키는 병이었다. 히포크라테스는 당시 이 병을 정확하게 진단해냈던 것이다. 그가 명명한 이 병은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결국 환자를 신전으로 데려가 버렸다. 이 일로 히포크라테스는 크게 상심했다. 호메로스시대 이후 고대 그리스 의학에서 질병은 신의 노여움을 산 대가로 여겨지고 있었다. 이런 방식의 치료가 어떠한 결과를 초래할지는 너무나 자명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의학을 신전 제사장의 손에서 해방시켜 의학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는 계기로 작용되었다.

또 한번은 점술가가 골절 환자를 치료하는 광경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마차에 치여 오른쪽 다리가 부러진 환자는 심한 고통 때문에 혼절할 지경이었다. 그러나 점술가는 환자의 가족들에게 환자를 부축해 왼쪽 다리를 신상 앞에 꿇도록 요구하고 있었다. 이 광경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던 히포크라테스는 점술가를 쫓아버리고 환자 가족들에게 골절 수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먼저 상처 부위를 닦고 견인해 골절 부위를 복위시키면 되는 간단한 수술이었다. 치료를 받은 환자는 빠르게 회복되었다.

그의 저서 《관절 복원에 대하여》는 히포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이 인체해부학과 구조학, 운동 기능 등에 대해 상당 수준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탈골 치료는 히포크라테스 외과수술의 걸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히포크라테스는 이를 치료하기 위해 사다리 모양의 견인 도구와 자신의 이름으로 명명한 수술대를 발명했다. 기원전 1세기 그리스의 의학자 아폴로니오스(Apollonios)가 히포크라테스를 평론한 저서에는 이 견인 도구를 상세하게 그린 삽화 두 장이 소개되어 있다. 즉 환자의 머리와 발을 사다리 양쪽 기둥에 묶고 굵은 밧줄을 회전축에 감아 당기는 견인 시술을 실시했던 것이다.

히포크라테스의 수술대는 사다리 모양의 견인 도구를 이용하거나 견인 침대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를 이용해 각종 골절, 탈골 치료가 이루어졌다. 히포크라테스의 수술대 발명은 후대 의학자들에게 영감을 제공해 다양한 목적의 수술대가 선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르네상스시대의 회화작품 가운데는 당시 의사들이 각종 견인 치료방법에 이용했던 입식, 사다리형, 테이블형, 침대형 등의 히포크라테스 수술대가 묘사되어 있다.

기원전 430년 아테네에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발생했다. 고열과 구토, 마비, 농창 증세를 보이던 사람들은 곧 궤양과 설사를 일으키며 죽어갔다.

전염병이 무섭게 확산되면서 도시 곳곳에 시체가 즐비했다. 아테네의 명장 페리클레스(Pericles)마저도 이 전염병에 걸려 죽고 말았다.

이 소식을 듣게 된 그리스 북부 마케도니아 왕국의 한 의사는 곧바로 어의를 사퇴하고 생명의 위협까지 무릅쓰고 아테네로 향했다. 그는 전염병 상황을 조사하면서 병의 원인과 해결방법을 함께 모색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오직 대장장이의 집만큼은 아무도 감염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대장장이 곁에는 늘 불이 있었다. 불이 전염병을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는 성 곳곳에 불을 놓기 시작했다. 과연 전염병 확산을 억제할 수 있었다. 이는 인류가 최초로 의학적인 수단을 이용해 전염병을 물리친 사례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전염병에 대항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다.

1948년 세계 의학총회는 ‘히포크라테스 선서’에 근거해 <제네바 선언>을 제정했다. 기원전 5세기 말경 히포크라테스는 에게 해 코스 섬의 한 오동나무 아래서 의학에 입문하는 학생들을 모아 놓고 다음과 같은 선서를 하도록 했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히포크라테스 선서’이다.

의학의 신 아폴로, 아스클레피오스와 건강의 신 히기에이아, 치료의 신 파나케이아와 모든 신 앞에서 나는 다음과 같이 선서하노라. 나의 재능과 판단력에 따라 이 서약을 굳게 지킬 것을 맹세한다. 내 스승을 내 부모처럼 여기고 내가 가진 것을 함께 나누며 내 도움이 필요한 곳에 도움의 손길을 뻗노라. 스승의 자녀를 내 형제처럼 여기고 의학을 공부하고자 하는 자에게 최선을 다해 전수한다.

나는 구술과 서면 등 다양한 방법으로 내 후손과 스승의 후손, 그리고 의학법규를 준수하기로 맹세한 자들에게 의술을 전수하며 그 외에는 누구에게도 전수하지 않는다.

나는 최선을 다해 환자를 지키고 환자를 해하는 일체의 행위를 하지 않는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독약을 주지 않으며 여성에게 절대 낙태약을 주지 않는다. 신성하고 순결한 정신으로 평생을 의료업에 바치기를 희망한다. 어느 곳에 가던지 환자의 고통을 덜어주는 것을 최종 목표로 여기며 환자 스스로 원한다고 하더라도 환자의 생명을 위협하는 일체의 행위를 거부한다. 남녀귀천을 막론하고 유혹의 손길을 모두 거절한다. 내가 듣고 본 것을 비밀로 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다면 내 직업과의 관련 유무를 막론하고 절대 누설하지 않는다. 나는 엄숙하게 이를 서약한다. 신이 내게 의사로서의 무한한 능력을 주기를 원하며 이는 내 생애 최고의 영광이라고 여길 것이다. 선서를 위반했을 때에는 하늘의 처벌을 달게 받을 것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전반 두 단락은 미래에 대한 서약이며 후반에 나온 윤리원칙은 의사로서 지켜야 할 규정에 해당한다. 이 선서에는 의사로서 지켜야 할 최고의 윤리원칙이 총망라되어 있다. 즉 진정한 의사는 삶에 절망한 환자가 죽음을 갈망할 때에도 절대 독약을 주어서는 안 되며 스스로 자신 없는 수술에 임해서는 안 되었다. 또한 의사로서의 직업윤리를 준수하고 직업상의 비밀을 유지하며 치료 과정에서 환자의 명예를 훼손하는 행위를 해서도 안 되었다.

페르시아 왕의 초빙을 거절하는 히포크라테스. 서양 의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히포크라테스는 그의 명성을 듣고 아르타크세르크스1세의 사절단이 달려왔지만 적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양하였다. (지로데트리오종의 1792년 작품)
페르시아 왕의 초빙을 거절하는 히포크라테스. 서양 의학의 선구자로 알려진 히포크라테스는 그의 명성을 듣고 아르타크세르크스1세의 사절단이 달려왔지만 적국이라는 이유만으로 사양하였다. (지로데트리오종의 1792년 작품)

또한 ‘히포크라테스 선서’에는 의술을 전수하는 스승에 대한 존경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다. 이는 서양 의학 직업윤리의 모범과 초석이 되어 2천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왔다. 히포크라테스는 질병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바탕으로 의학을 신의 영역에서 독립시켜 임상적인 관찰과 연구로 대체하는 참신한 변화를 시도했다. 이로써 위생관념을 제고하고 치료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었다. 그의 천재적인 재능과 뛰어난 의술은 당대 최고의 명성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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