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지난 번 4·3평화공원에서 알게 된 중학생 친구들과 만나기로 한 특별한 날이다.

약속시간보다 10분쯤 일찍 도착했는데 친구들은 이미 와 있다. 4·3이 가지고 있는 어두운 분위기와 상관 없이 우리는 소풍 나온 기분으로, 그리고 아주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내온 사람들처럼 서로 반갑게 인사를 했다.

우리가 만난 곳은 제주시 조천읍의 서쪽 끝자락에 있는 북촌리의 너븐숭이다. 너븐숭이는 널따란 돌밭이라는 제주어다.

바닷가 마을 건너편에 물수제비를 뜨면 두어 번 퐁당거리다 돌이 닿을 것만 같은 거리에서 사람 살지 않는 작은 섬 하나가 사시사철 낚시꾼들을 유혹하고 있고, 부지런한 주민들은 바다와 밭에서 한 해 살림살이를 장만한다.

이곳에 사람들이 모여 살기 시작한 지가 수천 년이나 된다. 마을을 가로지르는 일주도로 남쪽에 신석기시대 사람들의 주거지인 바위그늘유적지가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바다가 가깝고 물이 흐르는 곳을 곁에 두고 있는 데다가 용암동굴의 천정이 무너져 자연스럽게 주거지가 만들어진 곳이다. 먹거리와 잠자리가 해결되니 마을은 예로부터 평화로웠을 것이다. 수천 년 전 옛날에도 부모가 있고 아이가 있었을 것이고 어른들은 사냥과 채집을 하며 먹을거리를 구하고 아이들은 바닷가에 가서 물놀이를 하며 무럭무럭 커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평화롭기만 했던 바닷가 마을의 시계는 해마다 섣달 열여드레가 되면 70년 전으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이 날이 되면 마을 전체는 ‘잔칫날’ 같이 부산해진다. 이른바 ‘북촌리 사건’ 때 희생당한 이들을 위해 한 날 한 시에 제사상을 차리기 때문이다.

나는 나의 어린 친구들을 위해 북촌리 사건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1949년 1월 17일 북촌리 마을은 4·3사건의 광풍에 휩쓸리게 돼. 구좌읍 세화리에 주둔했던 토벌대(2연대 3대대)의 일부가 아침에 트럭을 타고 함덕리 대대본부로 이동할 때 숲속에 잠복했던 무장대가 공격해서 병사 2명이 죽었어. 사태가 심각하다 싶어 마을의 원로들이 시신을 거둬서 대대본부로 갔는데 거기서 경찰가족 한 명을 빼고 전부 총살을 시킨 거야. 그런 다음 오전 11시 무렵에 총부리를 앞세운 군인들이 오더니만 늙고 병든 사람들까지 모두 북촌초등학교 운동장 안에 몰아넣었어. 그러면서 집집마다 불을 질러 400여 호 마을 전체가 다 타버렸어. 운동장에 모인 사람들 가운데 제일 먼저 민보단원을 죽였어. 민보단은 경찰을 지원하는 조직인데 그들이 보초를 잘못 서서 군인들이 죽었다는 이유를 댄 거야. 그리고 군인가족은 앞으로 나오라, 경찰가족도 앞으로 나오라 하면서 그들을 빼고 남은 사람들은 수십 명씩 주변 옴팡밭으로, 당팟 거리로 끌고 가서 무자비하게 총을 갈겨댄 거야. 옴팡밭이라는 건 움푹 패인 밭이라는 뜻이고 당팟은 할망당이 있는 곳의 밭이라는 뜻이야. 여기 북촌 초등학교 서쪽에는 옴팡밭이 있고 동쪽에 당팟이 있어. 조금 있다가 얘기해 주겠지만, 현기영의 <순이삼촌> 문학비가 있는 곳이 옴팡밭이야. 아무튼 대대장의 중지명령이 내려지는 오후 5시 무렵까지 이날 하루만 남녀노소 300여 명이 죽었어. 그 날 살아남은 사람한테는 다음 날 함덕리 대대본부로 모이라는 명령이 떨어졌어. 그런데 일부는 산으로 도망을 치고 일부는 대대장의 명령이니 가야 한다고 해서 대대본부로 갔어. 제 발로 대대본부에 갔던 사람들은 빨갱이 가족을 숨겼다는 혐의로 또 총을 맞아죽었어. 그 숫자가 100명쯤 된대. 철모르는 아이들에게까지 아버지 삼촌 형이 숨은 곳을 대라고 윽박지르다가 대답을 않는다고 쏘았다는 거야.

이 일이 발생하기 전에도 북촌리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 여기서 가까운 낸시빌레라는 곳에서도 24명을 끌어가서 총살을 시켰는데, 5·10선거에 투표를 하지 않았다는 죄목이야. 군경은 입산자를 돕거나 숨겨준 사람도 자수하면 살려준다고 홍보를 해놓고 정작 자수를 하면 모두 즉결처분을 해버린 거야. 자수를 한 사람들 중에는 살려준다는 말만 믿고 거짓으로 자수를 했다가 죽기도 했대. 이래도 죽고 저래도 죽을 수밖에 없었던 거지.

설명을 마치고 둘러보는 기념관에는 만장 같이 길게 드리운 검정색 천 석 장에 흰색 글씨로 희생자들의 이름과 나이, 학살 날짜와 장소가 빽빽하게 적혀 있다. 두 살짜리 젖먹이부터 95세에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구분이 없다. 너무도 평등하게 죽음을 선사한 토벌대의 총부리. 그리고 가나다 순으로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는 명부.

“두 아이를 잃고도 울음이 나오지 않은 것은 공포로 완전히 오관이 봉쇄되어버린 때문이 아니었을까.” (현기영의 ‘순이삼촌’ 중에서)

400명이 넘는 희생자의 명부 앞에서 아무런 슬픔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 것은 나나 어린 친구들이나 마찬가지다.

-아무개 남 25세 1949년 1월 17일 북촌교 인근 밭에서 토벌대에게 총살당함. 아무개 여 49세 1949년 1월 17일 북촌교 인근 밭에서 토벌대에게 총살당함. 아무개 남 15세 1949년 1월 17일 북촌교 인근 밭에서 토벌대에게 총살당함.

희생자 나이와 학살날짜를 하나하나 소리 내어 읽어보던 승혜가 어떻게 같은 날짜, 같은 장소에서 저렇게 많은 사람들을 죽일 수가 있죠? 하며 독백하듯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전시실을 옮기자 눈에 들어오는 것이 있다. 엄마가 죽은 줄도 모르고 젖을 빨고 있는 아기의 그림, 강요배의 그림 ‘젖먹이’다.

이 광경을 목격한 사람의 증언이 전해져 온다. 순이 삼촌처럼 지옥문에서 되돌아 나온 홍 모 할머니는 어제처럼 그 일을 기억한다. “피가 괄락괄락 쏟아지는데 세 살배기 아이가 젖인 줄 알고 빨아먹고 있었어. 징그러운 시절이야. 또 신혼 이틀 만에 죽은 사람이 제일 안 되었어. 어디 갔다 오다가 번쩍하게 군인들이 나타나서 돌아서니까 그냥 죽여 버렸어. 처는 그 당시는 안 죽었지만 곧 죽었지. 개 죽은 것처럼 묻지도 못했어” (허영선 지음 ‘제주 4·3을 묻는 너에게’)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 아기 / 사망자 명부
엄마의 젖을 빨고 있는 아기 / 사망자 명부

슬픔을 끝까지 참아내기에는 어린 친구들의 심성이 모질지 못하다. 끝내 승혜가 고개를 푹 숙였고 나연, 승훈, 재호의 시선 역시 각기 다른 곳을 향했다. 그러면서 누구는 코를 풀고 누구는 화장실로 간다.

이 순간 나는 죽은 이들보다 풀잎처럼 여린 나의 어린 친구들이 더욱 염려되었다.

‘그 시간이면 이 집 저 집에서 그 청승맞은 곡성이 터지고 거기에 맞춰 개 짖는 소리가 밤하늘로 치솟아 오르곤 했다. 한날한시에 이 집 저 집 제사가 시작되는 것이었다.’(현기영, 『순이삼촌』)

-여기서는 해마다 음력 12월 18일, 한 날 한 시에 동네 전체가 제사를 지내.

-일가족 전체가 희생당한 집은 제사를 누가 지내죠?

-글쎄, 옆집에서 지내줄까?

-옆집도 남은 사람이 없었을 텐데......

모두가 쓸쓸한 얼굴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 이름을 기념관 대신 4·3희생자 추모관으로 바꾸는 게 낫지 않을까요? 기념관 하니까 좀 좋은 일을 기념하는 것 같아서...

승훈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했다.

-그래 좋은 제안이야. 그렇지 않아도 그런 얘기가 나오기도 했는데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았나 봐.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어요.

이번에는 재호도 한 마디 한다.

-지난 번 4·3평화공원에는 북촌리에서 희생된 숫자가 398명이라고 적혀 있는데 여기는 400명이 훨씬 넘는다고 나와 있어요.

-4.3평화공원에 있는 게 잘못인 것 같아. 여기 적혀있는 이름만 해도 400명이 넘으니까.

와, 하는 친구들의 감탄에 재호가 쑥스러워한다. 우울했던 금방 분위기가 바뀌었다.

-이제 밖으로 나가보자.

기념관 마당 옆에 어른 키만 한 돌탑이 있고 그 아래에 꼬마들이 가져다 놓았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작은 인형과 장난감, 앙증맞은 손글씨편지 등이 말 없이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그 옆으로는 다듬지 않은 돌로 덮인 무더기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다.

주인 없는 애기무덤
주인 없는 애기무덤

-애기들 무덤이라고 했는데 이건 무덤이라기보다는 돌무더기에 가까운데요?

-그래, 돌무더기야. 당시에 죽은 아이들의 무덤을 만들어 줄 경황이 없었겠지. 다들 죽어나가는 판이다 보니까. 그래서 애들 시신을 임시로 돌로 덮어놓은 게 여태껏 그대로 남아있는 거지.

-그럼 저 돌 밑에 애기들 시신이 있다는 건가요? 아, 어떡해.

나연이가 물으면서 불쌍한 생각이 들었는지 울상을 짓는다.

아름다운 꽃이 세상을 수놓는 봄과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 무성했던 잎도 다 떨어지는 쓸쓸한 가을과 매서운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은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애기무덤 위로 무심히 지나가고 있다. 그러나 살아있다면 모두 70이 넘은 노인이 되었을 ‘애기’들은 여전히 돌무더기 밑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그럼 나중에라도 무덤을 만들어 줘야지...

나연이가 안타까이 말을 꺼내자 재호가 말을 받는다.

-무덤을 안 만든 이유를 알 것 같아. 아까 ‘아이고 사건’이라는 걸 봤지? 그게 1954년도 일인데, 그 때까지도 4·3이라는 말을 꺼내면 안 되는 분위기였잖아. 그렇게 살벌한 상황인데 아기 시체를 묻겠다고 나서면 또 잡혀 들어가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재호의 그럴듯한 추리에 친구들은 또다시 우와 하며 감탄을 한다. 나는 재호의 말이 맞을 거라고 했다. 그 근거로, 재호는 적어도 당시의 시대상에 대해 조금씩 이해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기의 시신을 거두지 못한 이유는 가족들이 잘 알 것이다. 아니면 시신을 거둘 어른들마저 다 잡혀죽었든지...

아이고 사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54년 1월 23일, 북촌리 청년 하나가 군대에서 죽어 마을장례를 하게 되었다. 시신 대신 죽은이의 옷을 꽃상여에 넣고 망자가 생전에 살고 놀던 곳을 찾아다니는 의식을 치르던 중 북촌초등학교에 들렀다가 5년 전 마을사람들이 집단학살당한 일이 떠올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우리 여기서 그 때 죽은 조상들을 위해 술 한 잔 올리자’고 제안하였다. 너도나도 한 잔씩 술을 올리다 여기저기서 ‘아이고’ 곡소리가 터지면서 운동장 전체가 눈물바다가 되었다. 그 때 지나가던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경찰에 신고하는 바람에 이장을 비롯한 몇 명이 불려가 문초를 당한 후 다시는 4·3을, 눈물을, 집단행동을 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서야 풀려나왔다.

-이제 옴팡밭으로 가보자.

움푹 패인 밭이라는 뜻의 옴팡밭에는 칠성판 같이 생긴 석판이 ‘마치 무를 뽑아 널어놓은 것 같이’ 어지럽게 뉘여 있다. 1949년 1월 17일 학살당한 사람들의 시신을 형상화한 것이다. 석판에는 <순이삼촌>의 내용이 발췌되어 새겨져 있다. ‘순이삼촌’은 바로 이 옴팡밭에서 극적으로 살아남았다. 그러나 몸만 살았지 영혼은 이미 30년 전에 죽었던 것이다.

-여기는 현기영 선생님이 쓴 <순이삼촌>이라는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이야. 책의 내용은 다들 알고 있겠지?

-네.

모두들 착하게 대답을 한다. 이 어여쁜 친구들에게 필요한 것은 소설의 내용이 아니라 작품이 탄생하게 된 배경에 대한 이해일 것이다.

널브러진 시신을 형상화한 석판
널브러진 시신을 형상화한 석판

-4·3사건이 발생한 이후부터 노태우정부가 끝날 무렵까지 4·3은 마치 옷 속에 감추어진 상처와 같은 거였어. 아무도 4·3에 대해 말을 꺼내는 사람들이 없었어. 그랬다가는 쥐도 새도 모르게 잡혀들어가서 죽거나 병신이 돼서 나오니까. 특히 이 작품이 발표된 1978년도는 군부정권이 나라를 총칼로 억누르고 국민의 입을 틀어막고 있던 살벌한 시절이야. 그런데 제주 출신의 고등학교 영어선생님이 세상을 향해 그동안 감추어진 비밀을 고발하기 시작했으니 그 충격은 말도 못했지. 당장 잡아서 고문을 하기 시작했지. 역시 죄목은 빨갱이!

제주 출신의 교사 현기영이 앞으로 닥칠 일을 몰랐을 리가 없었겠지. 그러나 나약한 지식인이 아니라 실천하는 지성인으로서 죽음을 각오하고 나선 거야. 현기영 선생님은 지금 귀가 어두워. 그 때 당한 고문 때문이야.

옴팡밭을 나와 도로를 따라 동쪽으로 가니 방사탑이 나온다. 상생과 평화, 번영을 위해 북촌면 주민들이 세운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좌우 균형이 반듯하게 잡혀 전문가의 솜씨가 느껴지는 방사탑이 어쩐지 좀 낯설어 보인다. 마을 주민들이 시간을 들여 하나하나 쌓아올리는 정성이 배제된, 기성품 같은 느낌이 들어서 그렇다. 상생과 평화, 번영이라는 관(官) 주도의 구호같은 느낌이 든다.

방사탑을 지나 조금 더 가니 북촌초등학교가 나온다.

‘사랑과 꿈이 영그는 즐거운 학교’의 운동장에서 뛰어놀고 있는 아이들의 모습에서 그날의 참극은 찾을 수는 없다. 교문 현수막에는 4·3을 주제로 한 백일장에서 입상한 학생들의 이름이 자랑스럽게 걸려있다.

초등학교를 건너면 곧이어 ‘당팟’이 나온다. 당팟은 할망당이 있는 밭이다. 지금 할망당은 사라지고 없지만 밭은 여전히 남아있다. 북촌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서쪽의 너븐숭이와 서쪽의 당팟이 학살 현장이다. 당팟 안내판 옆에 나란히 붙어있는 정지퐁낭 기념비 안내판에는 ‘이곳에 800년 된 정지퐁낭과 연못이 있었는데 태풍에 쓰러졌다’고 적혀 있다. 대신 옆에 남아있는 목사들의 선정비에는 4·3 때의 총탄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당시를 증언하고 있다.

-여기서 더 가면 꿩동산과 낸시빌레, 마당궤가 나오는데 오늘은 여기서 끝내고 시원한 곳에 가서 팥빙수를 먹을까?

-오, 예!

모두가 환호하는 것을 보니 나도 기쁘다. 나는 어린 친구들의 솔직하고 즉각적인 감정표현이 좋다. 그러나 사실 우려한 것은 다른 데 있다. 꿩동산과 낸시빌레, 마당궤를 가기 위해 거쳐야 하는 호텔과 리조트, 펜션, 게스트하우스를 보이기 싫었기 때문이다. 이들도 언젠가는 이해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만 아직은 마음이 내키지 않다.

팥빙수를 주문해 놓고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오늘 어땠는지 자유롭게 이야기해 보자.

-책을 통해서 알던 것과 직접 현장을 답사하면서 알게 되는 것은 차이가 많다는 걸 느꼈어요.

-죽은 엄마 품에서 젖을 빨던 아기 그림. 그게 자꾸 생각이 나요.

-맞아. 그 분은 4·3과 관련된 그림을 많이 그리셨나봐. 나도 여러 번 본 적이 있어.

-지난 번 4·3평화공원에서 본 건데, 다랑쉬굴 속에 남아있다는 농기구, 솥, 항아리, 그릇과 수저 같은 것들이 자꾸 떠올라요. 나중에라도 살아나오면 농사를 짓고 먹고 살겠다는 뜻이잖아요. 그러니까 살아남을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거기에 담겨있다고 생각해요.

-난 애기무덤이 자꾸 생각나. 그 아이들은 따뜻한 엄마 품이 아니라 차가운 돌무더기 속에 갇혀있는 거잖아.

-난 4·3백비가 잊히질 않아. 아직도 4·3에 대한 이름이 없다는 거잖아.

어린 친구들의 이야기는 결코 유치하지 않다.

-우리 앞으로 계속해서 유적지 답사를 하면 어떨까요?

-맞아, 그러면 좋겠어요. 답사회 이름도 정하고...

다들 좋다며 나를 바라봤지만 정작 나는 대답을 보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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