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로드] 가을이 너무 깊어지기 전에, 가을의 깊은 황량함 때문에 존재하는 것들의 향기를 맡는 일이 슬퍼지기 전에, 서둘러 서울 용산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으로 갔다. 적어도 열 번 이상 와 본 곳이라 꽤 익숙해졌고 우리 문화재에 대한 인식도 약간은 생겼다는 생각을 하니 이제 박물관에 가는 발걸음이 가볍기만 하다.

“우리나라에 인재가 많이 나오기로는 세종 때보다 성대한 적이 없었다.”

중박(中博)은 이런 문구로 방문객을 맞아주었다. 세종대왕(재위 1418-1450) 즉위 600년을 기념해 세종 시대 문화의 정수와 그 계승을 보여주는 국가지정문화재를 특별 공개(전시기간 12월20일까지)하고 있었다.

지난 여름부터 보고 싶었던 것이 《봉사조선창화시권(奉使朝鮮倡和詩卷)》이다. 1450년 명나라 경제(재위 1450∼1457)의 조서를 갖고 조선에 사신으로 온 한림원시강(翰林院侍講) 예겸(1415∼1479)이 정인지(1396~1478), 신숙주(1417~1475), 성삼문(1418~1456) 등 집현전 학사들과 주고받은 글 37편을 수록한, 총길이 16m에 달하는 두루마리 문서. 지난여름 국보로 승격됐다.

세종의 총애를 받았던 이들은 당시 정인지는 55세, 신숙주는 34세, 성삼문은 33세였다. 명의 사신 예겸은 36세였다. 명나라 사신과 조선 학자들은 미묘한 대결 구도를 보였으나 시일이 지나면서 상대에 대한 문학적, 인격적인 존경심을 나타냈다고 한다. 전시에서 유심히 본 것은 신숙주와 성삼문의 필체였다. 당시 두 사람은 당대 최고의 천재로 꼽히는 친구 사이였다. 그러나 세조의 왕권찬탈 당시 성삼문은 세종대왕과 문종의 유지를 이어 불사이군의 길을 선택함으로써 38세로 사지가 찢겼고, 신숙주는 충절보다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58세까지 부귀영화를 누렸다.

신숙주의 글씨는 날카롭고 죽순처럼 꼬장꼬장하다. 저런 글씨를 쓰는 사람이 계유정난 당시 몸이 찢기면서도 곧은 소리를 하는 친구 성삼문의 기개를 어떻게 지켜봤을지 그의 필체는 두렵기조차 하다. 성삼문의 행서는 부드럽고 힘차다. 조선의 대표적인 절신(節臣)으로서 오늘날까지 존경을 받고 있는 그의 필체는 부드럽기 이를 데 없는데, 그 부드러움이 봉래산 제일봉의 낙락장송으로 변하는 힘이 놀랍다. 

그러나 이 전시회를 준비한 사람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세종 즉위 600년 기념전이나 중박의 문화재 전시는 뭔가 부족한 점이 많다.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외국의 유명박물관에 비해 크게 부족하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중앙박물관인가 하는 회의가 드는 것이 사실이다. 소장 유물 약 33만점, 세계 10위의 박물관이라고 하지만 전시내용은 바뀌는 적도 거의 없다. 규모가 방대한 기증전시관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언제까지 이렇게 유지할 것인지도 의문이다.

중박의 소장 문화재가 이렇게 부족한 느낌을 준다면 국립민속박물관을 지근에 둬 두 박물관이 함께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현재 경복궁 안에 있는 국립민속박물관을 세종시로 이전하려는 이 정부의 계획은 문화계의 반발을 부르고 있다. 서울은 땅값이 비싸고, 원래 이전예정지인 용산 미군이전 부지는 면적이 부족하다는 재정당국의 논리가 반영된 것이지만, 국가의 문화재를 다루는 일은 그렇게 쉽게 판단해서는 곤란할 것이다.

오래 전에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서 있었던 바이올리니스트 안네 소피 무터 연주회에 갔다가 콘서트홀 입구에서 수필가인 고 피천득 선생을 만난 적이 있다. 인사를 드렸더니 대뜸 차를 갖고 왔느냐고 묻는 것이었다. 소피 무터 연주회에 오고 싶어 일찍이 입장권을 구입해뒀지만, 막상 예술의전당에 오고 보니 음악회가 끝나고 밤늦게 집으로 돌아갈 일이 걱정이라는 것이었다. 예술의 전당에서 선생의 아파트가 있는 구반포까지는 불과 몇 정거장 되지 않는 거리지만 밤늦게 음악회가 끝나면 대중교통 연결이 쉽지 않아 거동이 불편한 사람들에게는 힘든 귀가길이 될 수밖에 없다. 지금도 예술의전당의 가장 큰 문제는 대중교통과의 연계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예술의전당 부근에 지하철역이 들어서지 않은 이유에 대해 들은 적이 있다. 지하철 2호선 공사 당시 문화부장관이 서울시장에게 직접 부탁을 하지 않았더니 역을 내주지 않더라는 것이다. 해당 장관으로부터 들은 말이니 사실일 것이다. 이런 것이 당시 우리나라 행정의 현주소였다. 장관이 아쉬운 소리를 하며 부탁하느냐 아니냐와 관계없이 국가행정은 먼 미래를 내다보고 추진돼야 한다.

국립민속박물관은 2005년 국립중앙박물관이 지금의 용산 부지로 옮길 때 함께 이전했어야 마땅하다. 국가의 미래보다 당면한 현안만 생각하는 행정은 훗날 통탄할 수밖에 없다. 지금 돈이 없다는 이유 때문에 국립민속박물관을 세종시로 옮긴다면 오랜 세월이 지나 다시 가슴을 치는 일이 발생할 것이다. 연간 300만 명의 내외국인이 찾는 국립민속박물관을 30만 명의 세종시로 옮기겠다는 발상은 국립박물관이 국가적으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모르는 사람들의 편의적 발상이라고 여겨진다.

아무리 어렵더라도 국립중앙박물관과 국립민속박물관은 가까운 거리에서 박물관 복합단지로 기능함으로써 시너지 효과를 거둬야한다. 그래야 자연사박물관도 없는 우리나라의 국립박물관의 위상이 높아진다. 국립박물관의 위상을 높이는 것은 국가의 위용을 높이는 일이다.
(언론인 / 국민일보 편집인·편집국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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