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걸어보는 제주도 길] 역사가 살아있는 우리 동네
[다시 걸어보는 제주도 길] 역사가 살아있는 우리 동네
  • 남국성(여행가)
  • 승인 2018.11.16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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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성지-오현단-동문시장-산지천

내가 살고 있는 곳은 제주여고 부근이다. 거기, 그러니까 제주여고 4거리에서 바다 방향으로 좀 가면 중앙여고가 나오고, 이어서 같은 방향으로 더 가다 보면 법원 검찰청, 시청, 칼 호텔, 남문 로터리가 적당한 거리를 두고 초등학교 1학년 꼬마들처럼 착하게 줄지어 나타난다.

남문 로터리에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면 석축이 나오는데 그게 바로 제주성지다. 알다시피 ‘지(址)’는 ‘터’를 뜻한다. 그러니까 제주성지는 제주성(濟州城)이 있던 터다. 지금도 탑동 바다를 내려다 보며 동서로 늘어서 옛 흔적을 보여주고 있다.

제주성지 / 제이각
제주성지 / 제이각

제주성을 쌓은 시점이 탐라국으로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는데, 탐라국이면 삼국시대를 얘기하는 것이니 1500년 이상 됐다는 거다. 요즘은 과학기술이 발달해서 수억 년 전의 일을 마치 엊그제 일처럼 알아낸다는데, 그걸로 봐서 천오백 년의 세월쯤이야 아무것도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사실 어디 그런가? 1960년대 흑백사진을 보고서도 아주 까마득한 옛날 일처럼 여기곤 하지 않는가.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그리고 또 그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아무튼 까마득히 먼 조상이 쌓아놓은 성벽에는 ‘출입금지’ 표지판이 경계의 눈초리로 주위를 감시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 금단의 표시는 불량스러운 욕구를 부추기기 마련이다. 슬그머니 출입금지 표지를 넘어 담(성) 위로 올라섰다. 옛날 같으면 발 아래로 마을이 보이고 바다도 한 눈에 들어왔을 테지만 지금은 전망이 시원치 않다. 눈앞을 가리는 건물들 때문이다.

실없이 서서 돌담을 살펴보다가 도구 없이는 성인 열 명이 달려들어도 들기가 어려운 돌을 촘촘히 쌓아올렸을 백성들의 노고에 생각이 미친다. 먹고 살기도 빡빡한 시절 강제 동원되어야 했을 것을 생각하면 마음이 짠해진다.

오랜 시간의 차이에서 오는 감상에 잠깐 젖어있는 사이 어디선가 아가씨 둘이 나타났다. 도보여행을 하고 있는 모양이다. 공연히 반가운 마음에 눈을 맞추며 인사라도 하려고 하는데 서둘러 자리를 피하는 것 같다. 요즘 시절이 하도 수상하니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공연히 멋쩍어 자리를 옮긴 곳이 제주성지의 북쪽면과 붙어있는 오현단. 오현단은 조선시대에 제주도로 유배되거나 관리로 부임하여 이 지방의 학문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오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그 유명한 우암 송시열을 비롯해서 충암 김정, 동계 정온, 청음 김상헌, 규암 송인수 등이 그들이다. 이들 중 송인수와 김상헌은 관리로, 나머지는 정치범으로 유배를 온 사람들이다. 죄인이라고 그저 시정잡배들처럼 죄를 지은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은 다 아는 사실이다.

오현단은 원래 귤림서원이 있던 곳으로 제사기능을 가진 충암묘(沖菴廟)와 교육기능을 가진 장수당(藏修堂)이 복합되어 이루어진 서원이었다. 그 후1892년(고종 29)에 제주 조천 출신인 유생 김희정 등이 옛 터에 오현의 뜻을 기리고자 조두석(俎豆石)을 세우고 제단을 축조하여 배향했던 곳이 바로 오늘날의 오현단이다.

오현단 / 장수당
오현단 / 장수당

제주도는 유배지로서 중앙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데다가 험한 뱃길이 가로놓여 있다. 그러니까 뱃길로 오다가 중간에 풍랑으로 목숨을 잃은 이들도 많았고, 한 번 오면 돌아가지 못하고 객지에서 생을 마감하는 이들도 많았을 것이다.

유배 온 사람들 가운데 권력이 있었거나 학문이 높은 사람들은 그런대로 대접을 받으며 지낼 수 있었던 모양이다. 그 가운데 많은 이들이 중앙의 선진화된 물정과 자신의 학문을 이곳에 전해준다. 이들이 제주도에 온 것이 개인적으로는 불행한 일이지만 제주도로서는 행운이었을 거다. 제주섬도 차츰 깨어나는 기회를 갖게 되었을 테니까.

제주에서 유배생활을 한 역사적 인물 가운데 광해군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놀라지 않을 수 없다. 광해군의 어머니-계모이긴 하지만- 인목대비의 친정어머니(노씨부인)도 제주로 유배를 왔는데, 그녀는 살기 위해 술지게미를 재탕한 막걸리를 만들어 섬사람들에게 값싸게 팔아 연명했다고 한다. 사람들은 대비의 어머니가 만든 술이라 하여 대비모주라 불렀고 이를 다시 줄여 ‘모주’라 부른다고 한다. 역사적 사실 여부를 떠나 스토리는 분위기를 띄우는 역할을 충실히 한다. 비록 정치적 변란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우리의 정서상 가슴 찡한 얘기임에는 분명하다.

뿐만 아니라 승려 보우, 독립운동가 이승훈, 고종의 사위 박영효, 흥선대원군의 손자 이준용, 소현세자의 아들이자 인조의 손자인 석철, 석린, 석견 등의 특수한 신분인도 제주에 유배왔다. 저 유명한 추사 김정희나 면암 최익현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에 대해서는 지면을 따로 만들어서 이야기해야 한다.

유배지 문화는 관광과 문화사업에서 무척 중요한 주제다. 몇 년 전부터인가 추사적거지가 제주도 유배문화의 아이콘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면암 최익현이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이 귀양지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집 둘레에 가시로 울타리를 치고 그 안에 가두어 두던 일)에서 풀려나 한라산을 등반하며 적은 「유한라산기」도 매력적이다. 머지않아 그 길을 따라 걸어볼 생각이다.

여기저기 둘러보다 보니 어디선가 코를 자극하는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렇다. 오현단 바로 아래쪽이 바로 동문시장이다.

동문시장은 제주도에서 가장 오래된 재래시장이다. 중간에 화재가 나서 난리를 겪기도 했지만 지금은 새로 단장을 해서 제주시민이 먹고 입고 쓰는 것을 담당하고 있다.

시장 풍경. 젓갈류, 먹거리 등이 풍성하다.
시장 풍경. 젓갈류, 먹거리 등이 풍성하다.

재래시장에는 정말 없는 게 없다. 바다에서 막 건져올린 생선들로부터 햇볕에 바짝 말린 건어물, 제주산 흑돼지와 꿩고기, 각종 포목류와 생활용품도 갖춰놓았다. 거기다가 젊은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을 먹거리들도 많다. 대게로 만든 그라탕과 고로케는 물론이고 각종 튀김과 문어빵, 호떡, 아이스크림, 꼬치 등 종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한 마디로 제주시민의 삶이 그대로 녹아있는 곳이 동문시장이다. 상인들에게는 치열한 삶의 현장이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에게는 정겨움이 묻어나는 놀이터다. 거기에 알아듣기 어려운 제주의 사투리까지 더해 시장은 서라운드 향연장이다. 제주성이 과거에 머물러 있는 대신 동문시장은 언제나 현재형이다.

장사 잘 되죠? 하고 아주머니한테 물으니 “이마트니 롯데마트니 하는 코끼리 같은 할인매장이 들어선 데다가 경기도 예전만 못해서 먹고 살기가 만만치 않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도 말 끝에 “이 장사 하면서 자식새끼들 공부 마치고 시집장가 다 보냈다”고 뿌듯함을 덧붙인다. 주름진 얼굴에 흐뭇함이 가득하다. 죽으나 사나 자식 생각하는 건 우리네 부모가 똑같은 것 같다.

좁은 골목을 돌다가 좀 전의 두 아가씨와 또 마주치게 됐다. 이번에는 내가 슬며시 시선을 돌렸다. 공연히 남 불편하게 할 필요가 없으니까.

얼마나 돌아다녔는지 슬슬 출출해지기 시작해서 시장 안의 먹자골목으로 들어섰다. 온갖 먹거리가 소박하면서도 먹음직스럽게 진열되어 있다. 여행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은 역시 재래시장 구경하다가 이것저것 먹어보는 거다. 아가씨들도 그것을 아는 게 분명했다. 멸치국수 한 그릇을 해치우고 일어서는데 가게로 들어서는 아가씨들과 또 마주친 것이다. 세상 참 좁아서가 아니라 시장이 좁아서일 거다. 아무튼 이번에는 아가씨들도 피하지 않고 배시시 웃으며 까딱 인사를 한다. 사실 비켜 설 곳도 마땅치 않았다. 아가씨들이 떡볶이와 순대, 라면을 시키는 것을 확인하고 내가 먹은 국숫값에 덧붙여 그네들의 몫까지 슬쩍 계산하고 나왔다. 세상 무엇보다도 사람의 웃음만큼 예쁜 게 없다. 장사하는 아주머니나 여행을 하는 아가씨의 웃음이 그렇다.

시장을 빠져나오니 동문로터리가 나온다. 이곳은 동쪽으로 가는 버스 길목으로 교통의 요충지다. 서쪽으로는 칠성통과 연결돼 있고, 북쪽으로는 바다로 이어지는 산지천과 맞닿아 있다. 제주도 대부분의 내창이 건천인데 이곳 산지천은 서귀포의 돈내코, 강정천, 제주시의 외도천과 더불어 물이 마르지 않는 하천이다.

북성홍문터 표지 / 바다로 이어진 산지천
북성홍문터 표지 / 바다로 이어진 산지천

산지천은 산업화가 한창이던 1960년대에 복개(覆蓋)하여 주택과 상가건물이 형성되었지만 밑에서 흐르는 물이 썩어 환경이 오염되는 문제가 생기자 1995년도에 문화와 역사의 모습 그대로 되살리기 위한 복원사업을 시작해서 2002년에 맑은 물이 흐르는 현재의 산지천 모습을 갖게 되었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그 결과 지금 산지천 물속에는 은어(銀魚), 숭어, 밀어(密魚), 붕어 같은 민물고기들이 서식하고 있어서 여름철이면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과 아이들이 수영하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나는 아직 확인을 하지 못했다.

최근에는 하천을 따라 산책로와 공원, 음악분수대를 조성하고, 매년 여름과 겨울에는 지역관광 활성화를 위해 '산지천 예술마당'과 같은 문화행사와 공연을 펼치고 있다. 그리고 매년 9월 초가 되면 산지천 주변에는 축제가 벌어진다. 산지천 변천사 사진전을 비롯해서 김만덕 사랑나눔쉼터, 한지공예 체험, 전통놀이체험, 추억의 주전부리, 제주향토음식점 등 보고 만져보고 먹어보는 잔치마당이 흥겹게 펼쳐지는 거다. 나도 몇 년 전에 와서 즐긴 적이 있다.

자전거에서 내려 걷다 보니 어느덧 동부두 바닷가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바다냄새가 코끝을 자극한다. 여객선과 화물선이 드나드는 동부두와 횟집이 줄지어 자리한 서부두는 제주의 관문이다. 동부두는 공항과 더불어 배가 드나드는 곳이거니와 서부두는 제주를 찾는 이들이 한 번쯤은 들러 회맛을 즐기는 곳이니까.

김만덕 객줏집
김만덕 객줏집

바다와 만나는 산지천 끝자락엔 삼거리가 나오는데, 김만덕 기념관이 있고 근처에 김만덕 객줏집이 있다. 18세기 말, 제주에 5년간 흉년이 들자 사재를 털어 도민을 구호했다는 김만덕 할머니는 객줏집을 차리고 제주 특산물을 한양 등지에 팔아 큰 부자가 되었다고 한다. 나중에라도 들러볼 요량으로 객줏집으로 들어가 보았다. 여러 채로 나뉜 안팎거리에는 옛날의 모습이 살아있다. 이제 나그네가 들어와 국밥과 술을 주문하기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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