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의술이야기] 교황 요한 21세의 의서
[동서고금 의술이야기] 교황 요한 21세의 의서
  • 강선주, 이문필 등 20인(빅북 제공)
  • 승인 2018.12.10 0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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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장 중세의 의학 — 암흑시대의 예고

의학은 신이 배제된 과학의 영역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흥성하면서 의학은 다시 원시 점술의학시대로 회귀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다. 믿음치료, 부적, 마귀를 쫓는 의식 등은 정부의 인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신뢰를 받았다. 특히 기독교는 어떤 병자라도 받아들여 치료를 해주었다.

또한 로마의 요양원을 모방한 작은 여관을 지어 성지순례자들을 보호했는데 이 여관들은 병원의 역할도 했다. 수도사와 수녀는 갈 곳이 없는 유랑자들을 수용해 식사와 의복을 제공하는 등 세심하게 보살폈다. 그러나 치료를 해주지는 못했다. 그곳은 의사가 없는 병원이었기 때문이었다. 선교사들은 대개 무료로 병자들을 치료했다. 그들은 연민과 사랑으로 병자를 치료해 구세주의 찬사를 얻는데 만족해야 했다.

370년 성 바실(St. Basil)에 의해 최초의 카톨릭병원(크세노도키아 Xenodochia, ‘빈자의 피난처’라는 뜻)이 세워졌다. 서양의 최초 병원은 400년경 로마에 세워졌다고 알려져 있다. 그러나 교회가 주도한 병원은 바닥에 타일을 깔기는 했지만 위생, 서비스 등이 매우 열악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사방으로 다니며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고 질병을 치료하는 등 예전 유랑 의사들의 역할을 대신했다. 그리스도의 제자들과 교회의 목사들은 모두 의사가 되었다. 그들은 병자를 돕는 것은 일종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의식을 그들이 접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회 전체에 주입시켰다.

정신적 요소가 질병치료에 영향을 끼친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동정심으로 충만한 마음은 정신력을 진작시키는 효과가 있다. 성경의 복음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러한 능력을 발휘해 기적을 일으킨 사례들이 기록되어 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고 팔뚝이 오그라든 환자를 회복시켰으며 심지어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기도 했다. 예수는 하나님에게 도움의 손길을 청하는 기도를 드림으로써 기적적인 치료를 가능하게 했다. 사람들은 성유를 바르고 기도, 안수를 하는 방법으로 약물치료를 대신했다.

예수는 이 사람들이 몸에 마귀가 붙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가 환자를 치료하는 방식은 따뜻한 말과 안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사실로 기독교도들이 의학에 무지했다고 단정하는 것은 무리이다. 누가복음에는 수종(水腫)에 걸린 병자의 이야기가 나오는데 그리스어로 수종은 ‘hydropikos’이다. 또한 ‘선천적 절름발이’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임상학적 의의도 찾아볼 수 있다. ‘위축(atrophy)’과 ‘퇴화(withered)’된 손이라는 표현에서는 의학적 의미가 매우 세분화되어 있음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누가복음은 병자들에 대한 연민으로 가득하다. 의사였던 누가는 또한 여성의 신체적 약점을 잘 알고 있었으며 질병이 주는 정신적 고통에 대해서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초기 기독교 의사들은 병자를 치료하기에 앞서 자신의 사지를 절단하거나 눈동자를 찌르거나 치아를 뽑는 등의 순교의식을 먼저 거행했다. 이는 일종의 시험으로 순교의식을 거치고 나면 자신이 고통을 당했던 부분의 의사로 임명되었다. 즉 다리의 고통을 겪은 사람은 다리를 치료하는 의사로 임명되었던 것이다. 일례로 성 에라스무스(St. Erasmus)는 창자를 꺼내 보인 후 장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었으며 성 저스트(St. Just)는 불에 달군 철모를 머리에 쓴 후 두통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었다.

이 시기에는 믿음치료가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레고리(Gregory of Tours)주교는 지방 의사에게 치료를 받는 병자들은 모두 이교도로 규정했다. 그는 성 마르티알리스(St. Martialis)의 성지를 순례하면 모든 병이 나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질에 걸린 사람은 그의 성지를 순례할 때 무덤에서 흙 한 줌만 가져오면 나으며 혓바닥에 염증이 난 사람은 성전의 손잡이만 핥으면 바로 낫는다는 것이다. 그 결과 중세의 의학은 퇴보할 수밖에 없었으며 과학에 근거한 의학은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러나 기독교가 점점 세속화되면서 수도원 부속 병원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802년 풀다 수도원의 원장이었던 마우루스는 일반 환자 병실, 전염병 환자 수용 전문병원, 그리고 의사들의 숙소 등을 짓는 방안을 구상했다. 후에 약방을 추가하고 우수한 민간의 의사를 초빙하여 병원을 운영하도록 했다. 영국의 한 편년체 사서에게는 수도원이 소속 병원의 의사들에게 지급했던 봉록이 기록되어 있다. 즉 빵 한 조각, 맥주 한 항아리, 연봉 40실링을 지급했으며 생선이나 고기를 먹을 때는 수도사들처럼 신에게 기도를 드리도록 했다. 수도원 부속 병원에 대한 권리는 교회와 수도사의 수중에 있었다. 수도사들은 종종 치료와 종교의식을 결합했기 때문에 실제 의료수준은 그리 높지 않았다. 그러나 전반적인 구조는 현대적 개념의 병원에 매우 근접해 있었다. 봉건주의가 붕괴하고 병원이 재정적 곤란을 겪기 전까지 교회는 진료소와 병원을 계속 지원하며 가난한 환자들에게 희망을 심어주었다.

특히 교황 중에 의학에서 뛰어난 업적을 거두어 교황의 자리에 오른 사람이 있었다. 바로 요한 21세 페드로 히스파노(Pedro Hispano, 1210~1277)였다. 의사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안과도감》이란 명저를 남겼다. 이 책에 소개된 기이한 처방은 민간에서 수집한 것으로 보인다. 일례로 어린 아이의 소변으로 눈을 씻는 방법은 높이 평가되었다. 그는 또한 가난한 사람들이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 병을 치료할 수 있는 방법을 책으로 엮기도 했다. 이 가운데는 가정의 응급구조 방법을 다룬 것도 있다. 예를 들어 히스테리를 일으켜 기절한 경우에 후추 가루와 소금을 코로 흡입시키면 바로 깨어난다고 기록했다.

1276년 그는 교황의 자리에 올라 요한 21세라고 칭해졌다. 그러나 교황이 된지 불과 7개월 만에 갑자기 붕괴된 지붕에 깔리는 사고로 숨졌다. 그와 대립했던 자들은 요한 21세가 지붕이 붕괴될 때도 거울을 보며 자기도취에 빠져 있었다고 성명을 낸 후, 이 사건은 직위에 자만한 사람들에게 울리는 경종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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