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중세의 의학 — 암흑시대의 예고

14세기에 페스트가 다시 세계를 강타했다. 이 병에 걸리면 환자의 피부에 수많은 검은 반점이 생기기 때문에 ‘흑사병’이라고 불렸다. 당시에는 이 병을 치유할 방법이 전혀 없었으므로 병에 걸리면 고통 속에서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흑사병의 병원균은 검은 쥐의 피부, 털 등에 기생하는 벼룩이 옮기는 것으로 14세기에 갑자기 검은 쥐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일단 발병하면 급속하게 확산되었는데 유럽에서만 2500만 명 이상 목숨을 잃었다. 이는 당시 유럽 전체 인구의 4분에 1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동양에서는 1300만 명이 사망했다. 1348년 이탈리아 플로렌스는 인구의 절반이 줄었으며 베니스와 런던의 사망자 수도 각각 10만여 명에 달했다. 점성술사들은 토성, 목성, 화성이 일직선상에 놓이면서 이 같은 참사가 일어났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성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 미첼(Michele)은 “돌림병은 호흡기를 통해 전염된다. 1347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가 사람의 몸으로 세상에 임한 날이다. 10월 첫째 날, 12척의 제노바 군함이 하나님께 죄를 짓고 도망쳐 메시나 항에 도착했다. 선원들은 심한 병에 걸렸는데 그들과 말을 나눈 사람들도 모두 감염되었다. 아무도 그들을 살리지 못했다.”라고 설명했다.

여기서 그가 ‘전염’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사용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흑사병이 동양에서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중앙아시아를 상대로 무역활동을 하던 이탈리아의 상인들이 가장 먼저 전염되었다고 한다. 또 타타르족이 제노바의 한 항구를 3년 동안 포위 공격했는데 그 사이 타타르 군대에 전염병이 돌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은 시체를 탄알 대신 성벽 안으로 떨어뜨린 후 철수했다. 이때 용케 살아남은 이탈리아 사람들이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겉으로는 건강해 보였지만 이미 병균에 감염된 상태였다. 전염병이 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흑사병으로 사망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면서 노동력이 급격히 감소했다. 마을 전체가 폐허가 되고 논밭이 황무지로 변하면서 식량부족 사태를 예고했다. 흑사병에 이어 흉년과 기근이 유럽 전역을 다시 공포로 몰아넣었다. 초유의 기근 사태에 범죄, 실업이 급증했으며 그 뒤를 이어 각종 자연재해와 유행성 독감, 괴혈병, 무도병(chorea: 경련성 신경질환) 등이 만연하게 되었다.

한스 발데즈의 저서 《전염병 치료》(1520). 전염병인 페스트가 만연해 사람과 가축이 죽어가는 가운데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의사의 모습을 묘사했다.
한스 발데즈의 저서 《전염병 치료》(1520). 전염병인 페스트가 만연해 사람과 가축이 죽어가는 가운데 아무런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 의사의 모습을 묘사했다.

흑사병의 원인이 규명되지 않았던 탓에 사람들은 이 병을 그저 하늘의 형벌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병의 전염성에 대해서는 서서히 인식하기 시작했다. 흑사병이 발생한 지역의 주민들이 타지로 대규모 이동을 감행함에 따라 전염병이 확산되는 결과를 낳았기 때문이었다. 이에 병균 보유자가 타지로 이동하는 것을 막기 위해 정부 차원의 격리정책이 실시되었다. 고대에도 전염병을 피해 섬이나 타지로 숨어드는 사례가 많았는데 중세에는 더 심했다. 1374년 베니스항과 제네바항이 먼저 통관 및 검역제도를 실시해 흑사병이 발생한 지역의 선박은 입항을 금지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너무 늦은 감이 있었다. 얼마 안 되어 흑사병이 만연했고 도시는 폐허로 변했기 때문이다. 그후로는 흑사병 발생 지역에서 온 주민은 30일 동안 격리조치 하도록 했다. 프랑스 마르세유 지역은 1383년부터 흑사병 발생 지역에서 온 주민을 특별히 40일 동안 격리했다. 따라서 오늘날 검역, 격리의 뜻으로 쓰이는 Quarantine는 모두 프랑스어 Qu-arantain에서 유래했다. 프랑스어로 ‘40’에 해당하는 단어가 ‘Quaran+aine’이기 때문이다.

인류에게 흑사병은 다시는 돌이키고 싶지 않은 기억이다. 당시 사람들은 그때의 참혹한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이 무시무시한 재앙은 극도의 공포감을 몰고 왔다. 형제가 서로 나 몰라라 하는 것은 물론 숙부가 조카를 버리고 아내가 남편을 멀리했으며 심지어 부모가 자녀를 돌보지 않는 상황이 발생하기도 했다.”

의사들은 대형 새를 연상시키는 방호복을 입고 다녔다. 새 부리처럼 입부분이 앞으로 돌출된 가면을 썼는데 이 돌출 부위에 약을 넣고 다녔다.

이 방법은 의외로 효과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혹시라도 전염이 될까 무서워 환자를 거부한 의사들도 많았다. 일단 병에 걸리면 죽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그 중에는 죽어가는 몸을 이끌고 타지로 도주하는 사람도 있었다.

일부 의사들은 환자에게 ‘악취’를 이용해 치료해볼 것을 권했다. 공복으로 화장실에 들어가 몇 시간 동안 악취를 맡도록 한 것이다. 대부분의 의사들은 팔에 피를 내는 ‘사혈요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 방법은 환자의 체력을 소모해 오히려 사망 시기를 앞당기는 결과를 초래했다. 공기를 소독한다는 명목으로 거리에는 불길이 활활 타올랐으며 설사를 통해 신체를 정화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설사약 소비가 급증했다. 물론 모두 효과를 기대하기 어려웠다. 결국 유럽 인구의 4분의 1이 목숨을 잃고 말았다.

결국 흑사병의 원인을 규명할 수 없었다. 기독교의 기도치료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불안과 공포에 휩싸인 사람들 사이에는 각종 기괴한 소문이 전염병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점술가에게 도움을 청하거나 그들이 만든 약을 맹신하는 풍조가 다시 생겨났다. 점술가들의 약방은 북새통을 이뤘으며 사람들은 점술가들이 요술을 부려 이 원인 모를 무서운 병에서 그들을 구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점술가들은 진주분말, 말린 두꺼비, 구운 두더지, 늑대와 사슴의 내장, 양의 피, 닭의 위, 꼬치고기(Sphyraenapinguis)의 이빨, 게, 새우의 눈, 심지어 동물의 배설물까지 이용해 기괴한 약을 만들었다. 물론 일반적인 병을 고치는 약도 있었다. 어느 점술가가 다음과 같은 내용을 기록해 놓았다.

전염병이 유행하던 시기에 고행을 하는 수도사들이 잇달아 나타나기도 했다. 그들은 망토를 입고 가슴에 붉은색 십자가를 걸었으며 채찍으로 끊임없이 자신을 내리치면서 지역을 순회했다. 자신들의 고행으로 하나님이 이 ‘형벌’을 멈춰주시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도사들의 고행 행렬은 점차 미치광이 행위로 변했다. 그들은 가는 곳마다 예술을 파괴하고 노략질에 방화, 강간까지 일삼았다. 그들이 아비뇽에 도착했을 때, 분노한 교황 클레멘스 5세(Pope Clement V)는 그들을 교회에서 추방했다.

15세기에 흑사병이 다시 유럽을 강타했다. 그러나 이때는 하늘의 형벌이라고 생각했던 전과 달리 공중위생 관념이 크게 대두되었다. 흑사병이 말기로 접어들 무렵에는 비누가 발명되어 감염률이 크게 떨어졌다. 현재 흑사병 병균은 미국 등 일부 국가의 실험실에만 존재한다.

중세 유럽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또 하나의 전염병은 바로 나병이었다. 사람들은 유대인과 나병 환자가 전염병을 옮긴다고 생각했다. 583년 교회는 나병 환자가 마음대로 돌아다니지 못하도록 하는 칙령을 반포했다.

나병 환자들은 외투로 온몸을 감싸고 가죽부츠를 신고 손에 방울을 들고 다녀야 했다. 각 도시로 진입하는 입구에는 문지기들이 지키고 서서 미심쩍은 사람들을 우선 구류시켰다. 그들은 나병 환자들에게 수의를 입히고 석관 안에 눕혔다. 그리고 목사가 그들의 몸 위에 흙을 뿌린 후 이미 사망했다고 공표했다. 이때부터 나병 환자들은 구걸을 하며 겨우 목숨을 부지했다. 그들은 다른 마을에 들어설 때마다 성벽을 오염시켰다는 죄명으로 극형에 처해지기 일쑤였다.

후에 교회에서 나병 전문병원을 설립해 그들을 구원하기 시작했다. 앙리 1세(Henri I)의 왕비 마틸다도 병원을 설립해 환자들을 돌보았다. 그녀는 환자들의 상처를 닦아주고 상처에 직접 입을 맞추기도 해서 칭송이 자자했다. 나병 환자들을 격리시키기 위해 유럽 각국에도 나병 전문병원이 속속 건립되었다. 프랑스에는 무려 2천여 개의 병원이 설립되었다고 한다. 13세기 기독교 국가에 세워진 나병 전문병원은 총 1만 9천여 군데였다. 17세기에 나병이 급속히 줄어들면서 이들 병원들도 다른 용도의 장소로 전환되었다.

로마인들은 대중 목욕을 즐겼다. 게르만 민족도 하천에서 목욕하는 전통을 그대로 따랐다. 13세기에 이르러 대도시마다 공중목욕탕이 생기는 등 이러한 목욕 풍습이 다시 유행했다. 공중목욕탕은 일종의 해방감을 만끽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따라서 목욕할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매우 중한 벌이었다. 교회가 헨리 4세를 추방하면서 온탕욕을 금지한 적이 있었다. 이와 반대로 누군가 함께 목욕을 하자고 청하면 이는 최고의 예우에 해당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돈을 모아 목욕탕에 가는 것이 큰 바람이기도 했다.

그러나 공중목욕탕이 좋은 취지로 세워지긴 했지만 온갖 사람들이 한 탕에 들어가기 때문에 매우 비위생적이었다. 결국 목욕탕은 전염병의 온상이 되었다. 페스트가 발생하면서 사람들은 전염병의 개념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14세기에 이르러 정부 차원의 목욕탕 사용의 제재초치가 내려졌다. 즉 전염병이 유행하는 동안에는 목욕을 금지시킨 것이다. 또한 전염병 환자의 경우 병이 나은 후 4주에서 8주 동안에는 공중목욕탕 출입이 금지되었다. 16세기 매독이 유행하면서 공중목욕탕에 치명적인 일격을 가했다. 이후 너도 나도 위생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유럽의 공중목욕탕은 그 매력을 상실했다.

콜럼부스가 신대륙을 발견한 후 그의 선원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져온 건 갈취한 황금보석 뿐만이 아니었다. 반갑지 않은 손님인 매독을 함께 데려온 것이다. 1493년 프랑스가 이탈리아를 침략해 전쟁이 벌어진 후 매독이 크게 유행했다고 한다. 프랑스의 샤를 8세(Charles VIII)가 고용한 군인 가운데 콜럼부스의 선원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들이 각자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가면서 매독은 유럽 전체에 급속하게 퍼지기 시작했다. 1498년 포르투갈 귀족 출신의 탐험가 바스코 다가마(Vascoda Gama)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에 도착했다. 인도에도 매독이 상륙하게 된 것이다. 1517년 포르투갈 선박이 중국에 입항하면서 중국에도 매독이 만연하기 시작했다. 터키 사람들은 매독을 ‘기독교나라병’이라고 불렀다.

영국인들은 ‘프랑스 수두’, 프랑스인들은 ‘나폴리병’, 이탈리아인들은 ‘프랑스병’, 중국인들은 ‘광창(廣瘡: 당시 포르투갈 선박이 상륙한 곳이 광동(廣東)이었으므로 매독은 이곳에서 먼저 유행하게 되었다)’이라고 불렀다. 매독(Syphilis)이란 명칭은 1530년 이탈리아 의사 프라카스토로(Girolamo Fracastoro, 1478~1553)에 의해 명명되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 15, 16세기부터 매독 전문병원이 다수 설립되어 매독환자를 수용해 치료를 실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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