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장 중세의 의학 — 암흑시대의 예고

교회는 인체해부 반대 입장을 견지해 왔다. 교황 보니파키우스 8세(Boniface VIII, 1235~1303)는 어떠한 이유로도 시체를 절단할 수 없다는 칙령을 반포했다. 이 때문에 당시 원정을 감행하고 있던 십자군은 전사자들을 끓는 물에 삶은 후 근육과 뼈를 분리해 그들의 뼈를 배에 싣고 돌아오곤 했다. 전우를 타향의 귀신이 되게 할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교회는 다시 이러한 야만행위도 금지하는 칙령을 내렸다. 인체해부는 여전히 금기사항이었고 이 때문에 대다수 대학에서는 의학이 발전할 수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볼로냐 대학은 교회를 제압하는 몇 안 되는 대학 가운데 하나였다. 중세부터 르네상스시대가 도래하기까지 자의적 인체해부는 엄격히 금지되었으며 1년에 한두 구 정도의 시체만 해부가 허락되었다.

쿠텐베르크의 인쇄발명의 혁명. 1440년 이전에는 목판활자를 이미 활용하였으나 쿠텐베르크에 의해 금속활자가 발명된 이후부터 인쇄술의 혁신을 가져왔다. 특히 각종 서적의 보급은 물론 성서의 공급으로 인하여 종교(기독교)의 대중화를 도모할 수 있었다.
쿠텐베르크의 인쇄발명의 혁명. 1440년 이전에는 목판활자를 이미 활용하였으나 쿠텐베르크에 의해 금속활자가 발명된 이후부터 인쇄술의 혁신을 가져왔다. 특히 각종 서적의 보급은 물론 성서의 공급으로 인하여 종교(기독교)의 대중화를 도모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해부는 암암리에 이뤄졌다. 젊은 의학자들의 지식에 대한 열정을 막기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볼로냐 대학 최초의 해부학 교수 몬디노(Mondino die Liucci, 1257~1327)는 해부학을 새롭게 재탄생시킨 인물로 유명하다. 그는 볼로냐에서 1314년부터 10년 동안 후학을 가르쳤다.

몬디노의 강의 내용은 갈레노스의 학설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당시 해부학 교수들은 강의실에 단정하게 앉아 손에 든 갈레노스의 저서를 한 문장씩 읽어내려가는 역할에만 충실했다. 그러면 조수가 시키는 대로 시종이 해부를 실시했다. 만약 해부 결과가 갈레노스의 묘사 내용과 다르면 갈레노스의 잘못을 지적하기보다는 시체에 변이가 생긴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나 몬디노는 직접 해부학 실험을 집도하며 학생들에게 직접 인체를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의 해부 방법은 매우 체계적이었다.

그에게 해부학 강의를 들었던 숄리아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선생은 …… 시체를 탁자 위에 놓고 …… 4가지 관점에서 해부를 실시했다. 첫 번째는 가장 부패하기 쉬운 영양기관(생물의 영양을 관장하고 개체의 유지에 관계하는 기관. 보통 소화 기관을 말하나 넓은 뜻으로는 소화ㆍ호흡ㆍ순환ㆍ배설 따위의 여러 기관을 포함)을 먼저 살펴보는 것이었다. 그 다음은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인체를 설명하고 세 번째는 인체 본연의 모습을 하나씩 관찰했으며, 마지막으로 사지(四肢)에 대해 소개했다 …… 그는 이러한 방법으로 인체, 원숭이, 돼지, 기타 동물들의 시체를 해부하며 해부학을 가르쳤다. 몽테빌레(Mandeville, 네덜란드 태생의 영국 의사, 사상가)처럼 도표를 이용해 강의하는 법은 없었다.”

파리 대학의 해부학 강의 장면. 학생들은 교수가 설명하는 갈레노스의 학설보다 눈앞에 놓인 시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파리 대학의 해부학 강의 장면. 학생들은 교수가 설명하는 갈레노스의 학설보다 눈앞에 놓인 시체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기초의학 주요 저서로 꼽히는 그의 《해부학 Anothomia》은 200년 동안 무려 재판 23쇄로 발행될 정도로 의학계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 책에서는 “해부는 복부를 수직으로 가르는 것부터 시작한다. 배꼽 위를 기준으로 해부를 시작해 기관이 하나씩 드러나도록 한다.”라고 기록했다. 향후 3세기 동안 모든 대학의 의대에서는 몬디노의 저서를 교재로 삼았다.

몬디노는 학자들이 저술을 남겨야 하는 이유에 대해 ‘첫째, 학자들과 정보를 나누고 둘째, 두뇌활동을 활발히 하기 위해서이며 셋째, 노년이 되어서도 이러한 지식을 잊지 않기 위해서’라고 설명했다. 몬디노는 해부학을 하나의 독립된 학과로 분리시켰으며 르네상스시대가 도래하기 전에 공개적으로 인체해부를 실시한 용감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볼로냐 대학의 해부학과. 중세는 막강한 교회의 영향력으로 인체의 해부학을 금지하였으나 볼로냐 대학은 몬디노의 《해부학》을 강의 교재로 삼았으며, 뿐만 아니라 독립된 학과로 분리시켰다.
볼로냐 대학의 해부학과. 중세는 막강한 교회의 영향력으로 인체의 해부학을 금지하였으나 볼로냐 대학은 몬디노의 《해부학》을 강의 교재로 삼았으며, 뿐만 아니라 독립된 학과로 분리시켰다.

몬디노의 제자 숄리아크는 볼로냐 대학을 졸업한 후 해부학의 신개념을 프랑스로 전파했다. 과거 외과의사는 환자의 외상만을 치료하면 되었지만 숄리아크는 외과학을 의학의 한 분야로 당당히 정립해 그 위상을 제고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실제 수술에 있어서도 숄리아크는 ‘행동하는 외과의사’를 표방했다. 1363년 그는 세밀하고 정교한 해부연구 결과를 바탕으로 《대(大) 외과학 Great Surgery》이라는 교과서를 출간했다. 그는 이 책에서 외과의사가 갖추어야 할 4대 덕목으로 박학다식, 숙련된 기술, 민첩한 손놀림(당시에는 마취약이 없었으므로 수술시간을 최대한 단축해야 했다), 도덕적 수양 등을 꼽았다. 숄리아크는 견문이 넓고 미래에 대한 이상을 품은 인물이었다. 우수한 외과의사는 풍부한 의학지식, 특히 해부학에 정통해야 하며 겸손한 품성을 지녀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담하되 치밀해야 하며 위험한 상황에 대처할 수 있어야 한다. 진단은 신중하게 내리며 행동은 경건하고 자애로워야 했다. 자신의 의료행위 범위 안에서 합당한 비용을 받되 절대 탐욕을 부려서는 안 되었다.

당시 파리 대학에서 외과학을 주도하고 있던 인물은 이탈리아인 랜프랭크(Lanfranc)로 13세기 프랑스 의학 발전을 이끌었다. 1295년 외과학 협회는 그에게 파리에서 외과학 강연을 하도록 청하기도 했다. 1296년 《대외과학》 저서를 완성했다. 랜프랭크는 외과의사도 반드시 의학적 지식을 갖추어야 하며 외과를 경시하는 의사는 훌륭한 의사로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랜프랭크에 의해 외과학은 파리에서 다시 그 위상을 회복해 나갔다. 그러나 대부분의 외과수술은 여전히 떠돌이 이발사들에 의해 행해졌다. 의사들은 자신의 손에 직접 피를 묻히면 존엄성이 무너진다고 여겼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도 랜프랭크는 자신의 의학적인 경험과 의학실천 이념을 바탕으로 저술 활동을 지속했으며 이탈리아의 ‘정교한 상처치료법’을 프랑스에 전파했다. 특히 그는 상처 부위에 흔적이 남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가난한 사람을 치료할 때는 당신의 의술을 최대한 발휘하라. 부자들을 치료할 때는 최대한의 비용을 청구하라.” 랜프랭크의 이 말은 의사들의 미묘한 심리를 절묘하게 표현해 낸 명언이 아닐 수 없다.

랜프랑크의 동료였던 몽테빌레가 저술한 《외과학》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내용이 실려 있다. “환자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서는 음악을 이용하거나 그가 미워하는 사람이 죽었다는 편지를 보여주라.”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황당하기 짝이 없는 이 말이 당시에는 나름대로 일리가 있었다. 몽테빌레는 “혼자 타지의 여관방에서 음식을 시켜먹을 망정 당신이 치료해 준 환자와 함께 식사를 하지 말라. 그가 돈을 내고 나면 당신에 대한 친절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지만 환자들에게 받아야 하는 진료비 때문에 늘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그가 치료를 마치고 나면 환자들은 감격에 겨워하거나 후회하며 가슴 치기도 했지만 처음에 약속한 비용을 자진해서 내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가난한 사람이나 부자나 다 마찬가지였다. 몽테빌레의 《외과학》 서문에는 외과의사가 내과의사보다 진료비를 많이 받아야 하며 진료비를 내지 않으려고 일부러 허름한 옷을 입고 치료를 받으러 오는 부자 환자들을 잘 간파해 내야 한다고 강조했다.

중세 여의사가 환자를 진맥하고 있는 모습. 중세 기도원에서 환자를 보살피는 데서 간호의 필요성이 탄생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종교적 신념(박애주의)에 따른 것이었다면 17세기에 와서야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간호사가 탄생할 수 있었다. 특히 나이팅게일에 의해 간호 교육과 실무에 관한 개념이 정립되었다.
중세 여의사가 환자를 진맥하고 있는 모습. 중세 기도원에서 환자를 보살피는 데서 간호의 필요성이 탄생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종교적 신념(박애주의)에 따른 것이었다면 17세기에 와서야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간호사가 탄생할 수 있었다. 특히 나이팅게일에 의해 간호 교육과 실무에 관한 개념이 정립되었다.

외과수술에 대한 인식이 변화를 맞이하긴 했지만 위험성이 높은 만큼 의료분쟁에 휘말리는 경우가 매우 많았다. 1250년경 휴(Hugh)라는 의사는 어느 귀족의 수술을 거부한 적이 있었다. 수술을 하기 전에 먼저 수술이 실패하더라도 의사의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조건을 걸었던 것이다.

당시 외과의사들은 상처에 고름이 맺히는 것은 상처가 낫는 과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휴의 학생이었던 테오도르는 이러한 관점에 반대했다. 그는 수술이야말로 반드시 가장 청결한 환경 속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테오도르는 선교사였으며 후에 주교의 자리에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러나 종교적 신분은 외과의사로서의 그의 활동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았다. 그는 외과의사들에게 “상처는 저절로 아물도록 해야 하지만 갈라지지 않고 반드시 서로 붙어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상처를 치료하고 난 후에는 상처에 다른 이물질 접촉을 피해야 하며 특히 불로 지져 상처를 아물게 하는 행위는 절대 금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불로 상처를 지지면 건강한 피부조직이 상하게 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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