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로드]  얼마 전 황해북도 사리원시 제1고교 부교장(교감)출신의 탈북인사 김태욱 씨를 만났다. 그는 마시고 싶은 술 한 잔을 마시지 못해 죽은 황해북도 미술가연맹 허영 지부장에 대해 이야기했다. 제1고교는 1987년에 평양에 설립된 것을 시작으로 북한의 전국 도에 하나씩 세운 수재 양성을 위한 명문고라고 한다. 허 지부장과 김 부교장은 당이 제공한 사리원 최고의 아파트 위아래 층에서 친구로 살았다.
 어느 날 밤 위층의 허 지부장이 윗 베란다에서 소리쳤다.
 “어이 김 부교장, 집에 술 좀 없소?”
 “이 밤에 웬 술 이야기를 하시오? 술 배급된 지가 언젠데, 지금 무슨 술이 있겠소!”
 “한 방울도 없단 말이오?”
 “아무렴요. 있다면 왜 안 드리겠소?”
 “한모금도 마실 수 없다니…, 나 원 참, 할 수 없군.”
 허 지부장의 허탈해하는 목소리가 한 밤에 깊은 여운을 남겼다.
 그 다음날 아침 허 지부장은 죽은 채 발견됐다. 병원에서는 사인을 밝히지 않았다. 김 부교장은 그의 사인을 스트레스로 인한 심장마비라고 추정했다. “술 한 잔을 드렸더라면 틀림없이 죽지는 않았을 것이오. 나는 그의 빈소에서 목이 터지도록 울었소. 친구에게 술 한 병 구해주지도 못한 나는 친구의 자격도 없소!”
 “그렇게 술 한 병이 없었단 말입니까?”
 “당연하지요. 술파는 가게가 있습니까, 뭐가 있습니까? 그러나, 그렇게 다급한 사정인줄을 알았더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술 한 병 구해오는 것인데….”
 그의 말을 듣고 나는 이렇게 물었다. “그가 술 한 잔 마시지 못해 죽었다는 김 선생님의 판단을 팩트로 받아들이기 어렵네요. 술 한 잔 마시지 못해 죽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그러자 그의 표정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깊어졌다. 얼굴에는 수심이 가득해졌고, 입에서는 커다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는 깊은 지하갱도에서 솟아오르듯 서늘하고 떨리는 음성으로 소리쳤다. “내 말은 사실이오. 내가 왜 내 친구의 죽음을 헛되이 이야기 하겠소? 그는 북한에서 알아주는 천재화가였소. 우리는 오랫동안 위아래 층에 사는 친구였지만 서로의 깊은 절망과 스트레스를 알지 못했소!”
 절규하듯 한 그의 눈가에는 물기까지 비쳐났다. 그것은 그의 진심을 확인해주는 순금 같은 증표였다. 나는 그 때 알았다. 아니 확신했다. 세상에는 술 한 모금 마시지 못해 죽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고. 그가 그날 밤 술 한 잔을 마실 수 있었더라면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스트레스는 생명의 현(絃)을 끊을 수 없었을 것이라고.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렇게 생각했다. 어떤 경우라도 다 터놓을 수 있는 친구가 한 명이라도 있다면 참혹하게 죽지는 않는다고.
 로마의 정치 철학자이자 고대 라틴산문의 완성자라고 불리는 마르쿠스 키케로(기원전 106~43)는 명저 ‘우정에 관하여’(단테는 자신이 동경하는 여인 베아트리체가 죽은 후 이 작품을 읽으며 위안을 얻었다고 한다)에서 나이든 사람들의 빗나가는 우정을 염려한다. “소년들은 소년의 토가를 벗으면서 동시에 애틋한 우정도 벗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보통사람의 경우 우정의 가장 큰 재앙은 금전욕 때문이고, 상류층의 경우 관직과 명예에 관한 경쟁 때문이다”라고.
 그래서 키케로는 미덕에 기초한 선의의 우정을 강조한다. “진정한 친구들에 의해 구현된 우정은 행운을 더욱 빛나게 하고, 불운은 나누어 가볍게 해주지. 자네가 어느 쪽으로 향하든 우정은 항상 그곳에 있네. 어떤 장벽도 우정을 막을 수는 없다네.”
 포도주가 오래 되었다고 모두 시어지지 않듯, 나이가 든다고 인간들의 관계가 모두 변질되는 것은 아니다. 이해관계를 떠나 선의로 맺어지는 관계, 모든 것이 진짜이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지는 관계. 키케로는 그것을 참된 친구의 관계라고 말한다.
 한 해가 저물어간다. 올해에도 만나지 못한 친구들이 있다. 만나고 싶지만 십수년째 만나지 못한 친구도 있다. 친구여, 친한 사람들이여, 우리 모두 진짜이면서 자발적으로 이어가는 관계로 살아가고 싶지 않은가.

언론인 / 전 국민일보 편집인 ·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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