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아랍 의학 - 만수르 의서 등장

아랍인들은 방대한 제국과 찬란한 문명을 앞세워 세계 역사에 등장했다. 그들은 특히 의학의 발달에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인정받고 있다. 《지혜의 낙원》, 《만수르 의서》, 《의학집성》, 《의학전서》, 《치료론》, 《의학정전》, 《안과의사 지침》 등의 의학 명저도 모두 이 시기에 등장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마호메트(Mahomet, 569~632)는 30여 년에 걸쳐 사막에 흩어져 있던 아랍부족을 통일한 후 이슬람 봉건제국을 건설했다. 중국의 사서 《대식(大食, 페르시아어로 ‘Tazi’, ‘Taziks’을 음역한 것)》에는 서아시아를 ‘사라센제국’이라고 칭하고 했다. 모하메드가 죽은 후 1세기 동안 아랍인들은 두건을 두르고 성전이란 미명 아래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3개 대륙을 침략했다. 예루살렘에 침입한 후 시리아, 페르시아를 거쳐 인더스 강변까지 진군했으며 서쪽으로 스페인까지 침공하는 등 전체 유럽을 휩쓸었다. 이러한 침략 행위는 731년에서야 겨우 진압되었다. 아랍제국은 600여년 동안 지속되었는데 세습 왕조 우마이야 왕조(661~750, 옴미아드 왕조)와 아바스 왕조(750~1258) 시기에 황금기를 맞았다.

아랍제국이 흥성하면서 주변의 수많은 민족도 함께 발전을 이룩했다. 후에 아랍제국은 바그다드와 코르도바를 중심으로 동서 양쪽으로 나뉘어 각각의 칼리파(khaliifa, 칼리프라고도 하며 정치와 종교의 권력을 아울러 갖는 이슬람 교단의 지배자)가 다스렸으며 고대 문명의 중심지로 성장했다.

아랍 의학은 시대별로 세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1단계는 ‘번역의 시대’이다. 즉 2세기, 그리스로마의 의학이 아랍으로 전해지던 때를 말한다. 2단계는 8세기부터 11세기 말, 12세기 초까지로 아랍 의학이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던 시기이다. 유명한 의사들이 수없이 배출되었으며 그 영향력도 매우 막강했다. 3단계는 ‘쇠퇴기’로 1258년 몽골이 바그다드를 침입해 아랍의 칼리프 왕조를 멸망시킨 이후가 해당된다. 13세기 이후에는 유럽 의학이 아랍 의학을 대체하게 되었다.

네스토리우스교(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의 불일치를 주장하여 이단시된 기독교의 한 파)를 창시한 네스토리우스는 기독교의 본질에 대해 의혹을 제기했다가 431년에 콘스탄티노플로 쫓겨났다. 그는 시리아로 거처를 옮겼다가 다시 페르시아로 달아났는데 페르시아 군주는 그를 매우 환영했다. 당시 페르시아 서남부에 위치한 준디샤푸르는 인도, 시리아, 페르시아, 유대인 의사들이 모두 모여들던 곳으로 아시아 의학의 중심지이자 아랍 의학학파의 요람이었다. 그들은 그곳에 대형 병원을 세우고 치료를 시작해 큰 명성을 얻었다. 8세기부터 조르주(Georges)라는 의사가 준디샤푸르 의학원을 경영했는데 칼리프의 요청으로 그리스 고대문헌을 번역하기도 했다.

하룬 알 라시드의 사치스럽게 목욕하는 장면. 아라비안 나이트의 '천일야화'에 나오는 위대한 지배자인 하룬 알 라시드는 아바스 왕조의 제5대 칼리프이다. 그는 학술을 보호하고 장려하여 이슬람문화를 꽃 피운 인물이다.
하룬 알 라시드의 사치스럽게 목욕하는 장면. 아라비안 나이트의 '천일야화'에 나오는 위대한 지배자인 하룬 알 라시드는 아바스 왕조의 제5대 칼리프이다. 그는 학술을 보호하고 장려하여 이슬람문화를 꽃 피운 인물이다.

그의 손자 가브리엘(Gabrielle)은 아바스 왕조 제5대 칼리프 하룬 알 라시드(786~809년 재위)의 병을 치료한 것으로 유명하다. 궁정 의사들 가운데 아무도 그의 병을 고치지 못하자 가브리엘을 부른 것이다. 하룬 알 라시드는 가브리엘의 의학지식을 시험해 보기 위해 유리그릇에 그가 아꼈던 동물의 오줌을 담아 내밀었다. “이 환자에게 무슨 약을 쓰면 좋겠소?” 칼리프의 물음에 가브리엘은 “보리올시다.”라고 답했다. 그 오줌의 주인은 바로 당나귀였다.

왕비의 불륜에 분노한 왕이 그녀를 처형하고부터 여자들과 하룻밤만 지낸 후 계속 죽이면서 고위 관료의 딸이었던 세헤라자데도 같은 위기에 처했지만 1000일 동안 신비하고 매혹적인 이야기로 왕을 감동시켜 처형을 면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그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천일야화》의 탄생과 관련이 깊은 하룬 알 라시드는 바그다드 최초의 학교를 설립해 전문적으로 그리스 문헌을 번역하고 연구토록 한 인물이다.

7세기 아랍인들이 페르시아를 침략해 준디샤푸르 의학원과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그리스 문헌 필사본을 모두 약탈해 갔다. 양가죽 위에 페르시아어로 번역된 그 문헌들이야말로 아랍인들에게 최고의 전리품이었다. 이 문헌들은 곧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유럽에서 억압당하고 있던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학설이 아랍에서 새로운 생명을 얻게 된 것이다.

아랍 수도승이 필사하는 장면. 그리스로마인들의 유명한 의학서적을 페르시아인들이 약탈한 것을 다시 아랍인들이 번역하여 의학지식을 널리 보급하기에 이르렀다. 중세에 이르기까지 종교 관련 서적뿐만 아니라 각종 서적도 필사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하룬 알 라시드의 사치스럽게 목욕하는 장면. 아라비안 나이트의 '천일야화'에 나오는 위대한 지배자인 하룬 알 라시드는 아바스 왕조의 제5대 칼리프이다. 그는 학술을 보호하고 장려하여 이슬람문화를 꽃 피운 인물이다.

후나인 이븐 이스하크(Hunayn ibn Ishaq, 808~873)는 주관이 강한 의사이자 뛰어난 번역가였다. 그는 그리스 문헌의 번역이 한 권 완성될 때마다 칼리프 알 마아문(al Ma’mun, 813~833년 재위)에게 달려갔다고 한다. 번역한 책의 무게만큼 칼리프가 금을 하사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후나인은 일부러 두꺼운 종이에 큰 글씨로 번역을 했다.

후나인이 처음 입궁했을 때 칼리프는 많은 재물을 미끼로 그에게 독약을 요구한 적이 있었다.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후나인은 이를 거절해 1년 동안 옥에 갇히기도 했다. 칼리프는 후나인에게 생명까지 위협하며 독약을 다시 요구했으나 그는 또 거절했다. 후나인은 의사는 오직 생명을 구하는 자라고 잘라 말했다. 이에 칼리프도 감동해 결국 그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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