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아랍 의학 - 알라의 음성

아비센나(Avicenna, 980~1037)의 본명은 이븐 시나(Ibn Sina)로 아비센나는 유럽 사람들이 그를 부르던 호칭이었다. 그는 히포크라테스, 갈레노스와 함께 ‘의학의 3대 지존’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애주가에다 떠돌이였지만 아랍의 학술을 발전시킨 위인이자 현실과 미래에 대한 호기심과 풍부한 상상력을 지닌 학자이기도 했다.

아비센나 초상화. 이슬람의 의사이며 철학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대가였으며, 중세 유럽의 의학과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비센나는 히포크라테스, 갈레노스와 함께 ‘의학의 3대 지존’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아비센나 초상화. 이슬람의 의사이며 철학자로서 아리스토텔레스 학문의 대가였으며, 중세 유럽의 의학과 철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아비센나는 히포크라테스, 갈레노스와 함께 ‘의학의 3대 지존’으로 꼽히는 인물이다.

아비센나는 980년 페르시아 부하라의 인근 마을에서 태어났다. 기억력이 매우 뛰어났던 그는 열 살에 이슬람의 경전인 코란을 줄줄 외웠으며 열두 살 때에는 법률을 논할 수 있을 정도였다. 열일곱 살이 되었을 때는 이미 철학, 자연사, 시, 수학, 법학, 의학에 모두 통달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40회나 통독했지만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했다고 시인했다. 아랍 최고의 문화도시 바그다드로 의학을 공부하러 떠났던 그는 ‘의사는 환자를 세밀하게 관찰해야 한다’는 히포크라테스의 사상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1년 후 사만(Saman)왕국의 만수르(Mansour) 국왕의 병을 고쳐준 것을 계기로 국왕의 시의(侍醫)가 되었다. 이때부터 왕실의 자료를 자주 접할 기회가 생겼으며 후에 각 나라의 궁정에도 출입하기 시작했다.

아비센나가 스물한 살 때 부친이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로부터 2년 후에 사만왕조도 멸망해 아비센나는 중앙아시아 지역의 여러 나라를 떠돌게 되었다. 우선 카스피해 부근 다이라만에 위치한 페르시아의 한 작은 나라 왕에게 몸을 의탁하려 했지만 그가 도착했을 때 왕은 이미 폐위된 후였다. 이때부터 그를 기다리고 있는 건 고난과 시련의 나날이었다. 심지어 감옥에 갇힌 적도 있었다. 한 지인의 도움으로 겨우 거처를 마련한 그는 논리학, 천문학 강의를 하며 집필 활동에 열중했다. 이 시기는 아비센나의 초기 철학 저술들이 완성되었던 때로 《의학정전》도 이때부터 집필에 들어갔다. 비록 고된 나날이 이어졌지만 아비센나는 굴하지 않고 다양한 영역에서 수많은 저서를 완성했다. 이 가운데 가장 뛰어난 작품은 역시 후세에 큰 영향을 끼친 의학교과서 《의학정전》이다.

《의학정전》에는 질병의 증상과 약리학에 대한 방대한 지식들이 망라되어 있다. 그는 《의학정전》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의학은 과학의 한 영역으로 인류에게 건강 관련 지식을 알려주는 학문이다. 건강할 때 건강을 지키고 건강을 잃었을 때 이를 다시 회복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

《의학정전》은 총 5권으로 되어 있다. 제1권은 총론으로 의학의 정의, 기본 학설, 진맥, 질병 관찰 및 분류, 소변검사법, 보건위생, 장세척, 사혈요법, 소작법 등 일반적인 내용들이 실려 있다. 제2권은 각종 약재를 소개하고 있으며 제3권은 신체부위에 따라 질병의 원인, 증상, 치료에 대한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4권은 발열, 유행병, 외과, 골절, 탈구 등 전신에 나타나는 증상을 기록하고 있으며 제5권은 처방전과 약의 조제법이 나와 있다.

내용적으로는 히포크라테스와 그 학파의 학설 및 3세기 로마 갈레노스의 일부 학술을 흡수하고 중국과 인도 의학도 참고했다. 또한 질병이나 사망의 최대 원인을 감염성 질병으로 규정했다. 현대 의학에서도 병원체 즉, 병원균, 진균, 바이러스 등을 통해 질병의 원인을 규명한다. 아비센나는 페스트, 천연두, 홍역 등의 질병이 모두 눈에 보이지 않는 병원체가 일으킨다고 생각했다. 그는 물과 토양이 질병을 일으키는 물질의 매개체가 되며 이러한 병원체는 토양과 식수를 통해 전염되므로 ‘소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십이지장충이 장내 질병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밝혀냈을 뿐만 아니라 이를 정확하게 진단해 내는 방법도 인지하고 있었다. 진단은 주로 진맥에 의존했다. 그는 진맥 부위를 48개로 구분했는데 이 가운데 35개는 중국 서진(西晉)의 학자 왕숙화(王叔和)가 지은 《맥경 脈經》에 소개된 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일부 중국 의사들도 아랍을 통해 서방으로 진출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아비센나의 《의학정전》 *<의학규범>이라고도 함책이 널리 보급되는 동시에 라틴어로 번역되어 유럽에서 의대의 필수과목 교재로 등장하곤 했다. 이 그림에서는 아비센나가 학생들을 가르치는 중세 무렵의 교수로 묘사되고 있다.

아비센나는 주거 환경과 식수의 위생문제를 매우 중시했다. 그가 소개한 수료법(水療法), 식이요법, 요도 주사법, 동물실험으로 약효를 확인하는 방법 등은 모두 과학적 가치를 지닌 방법들이다. 임상 분야에서 그가 이룩한 연구 성과를 《의학정전》에 나오는 내용들을 우선적으로 살펴보자.

안면마비 증상의 경우 중추신경 이상과 말초신경 이상 두 종류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으며 황달은 담관경색(膽管梗塞)이나 벌레, 뱀에게 물려 그 독에 중독되어 발생한 몇 가지 경우로 나누고 있다. 이밖에도 늑막염, 농흉(膿胸, 늑막 안에 고름이 괴는 병), 유문협착(幽門狹窄, 위의 유문부 내강(內腔)이 좁아져서 위의 내용물이 잘 지나가지 못하게 된 상태), 위궤양 등 수많은 질병에 대해 자세하게 설명했다. 홍채(虹彩)의 확장, 수축 작용 및 눈동자의 운동에 관계되는 여섯 가지 근육에 대한 연구 논문도 게재되어 있다. 또한 신약을 사용하거나 보급하기 전에 동물과 인체 실험을 진행해 약의 안정성을 점검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의학정전》의 결점으로는 해부학과 생리학 지식의 결여를 들 수 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그는 ‘사랑’에 빠진 상태를 일종의 ‘정신분열’ 증상이라고 단정했다. 그의 눈에 비친 ‘사랑’은 일종의 심리적인 병이었던 것이다.

《의학정전》은 12세기에 이탈리아 크레모나 지역에 거주하는 제럴드(Gerald)라는 학자에 의해 처음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15세기 후반에 《의학정전》은 30여 년 동안 무려 16차례나 출판되었다. 이 가운데는 히브리어 번역본도 있으며 후에는 영어 번역본으로 출판되기도 했다. 12세기에서 17세기에 이르는 600여 년 동안 유럽의 수많은 대학에서 《의학정전》을 교과서로 채택했다. 이 책은 히포크라테스와 갈레노스의 의학저술과 이론을 종합하여 정리했으며 아리스토텔레스의 생리학 관련 저서도 참고했다. 그의 업적은 천주교의 생물학과 의학의 관점을 하나로 통합한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중세 가톨릭 철학을 집대성한 이탈리아의 스콜라 철학자)에 비유되곤 한다. 물론 《의학정전》에도 오류는 있었다. 그러나 6세기 동안 유라시아 의학에 큰 영향을 준 대작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에 대해 캐나다의 유명한 의학교육자로 후에 존스홉킨스 대학의 내과의사로 초빙되었던 윌리엄 오슬러(William Osler, 1849~1919) 박사는 “《의학정전》은 그 어느 저술보다도 오랜 시간 의학계의 ‘성경’으로 인식되어 왔다.”라고 평가했다. 《의학정전》은 현대 의학의 기반을 형성하는데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의학정전》이 완성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비센나는 하마단으로 들어왔다. 당시 국왕의 복통을 고쳐준 인연으로 대신에 임명되었으나 자유분방한 성격 때문에 조정의 다른 대신들의 미움을 사서 도망해 은거하는 처지에 이르기도 했다. 후에 복통이 재발한 국왕이 그를 불러들였으며 다시 대신에 임명되었다. 그로부터 수개월 후 하마단과 에스파한 왕국 사이에 전쟁이 발생했다. 하마단의 왕자는 아비센나를 성에 가두었는데 후에 에스파한이 하마단 성을 점령한 후 그를 풀어주었다. 평소 의술이 뛰어난 아비센나를 존경했던 에스파한의 왕자는 그에게 시의가 되어 달라고 부탁했으며 철학과 문학 고문의 자리도 맡겼다. 이에 아비센나는 10년 동안 비교적 안정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었다. 그의 대부분의 저서도 이 시기에 완성되었다. 1037년 57세로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그는 이곳에서 생활했으며 술과 여인, 일중독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죽기 전 3일에 한번씩 《코란》을 통독하고 자신의 모든 재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아비센나의 사혈치료 강의 장면. 그가 쓴 '의학정전'은 체액설에 바탕을 두고 해석하였던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지식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그림은 제자들에게 직접 사혈치료 시범을 보이는 장면이다.
아비센나의 사혈치료 강의 장면. 그가 쓴 '의학정전'은 체액설에 바탕을 두고 해석하였던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의 의학지식을 집대성한 책이다. 이 그림은 제자들에게 직접 사혈치료 시범을 보이는 장면이다.

아비센나의 저서는 백여 종에 달하며 수학, 법학, 철학, 의학, 화학, 물리학, 천문학, 지질학, 음악, 문학, 언어학 등을 총망라하고 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부분 유실되었으며 그 가운데는 의학과 관련된 16종의 저서도 포함되어 있다. 특히 시를 잘 지었던 그는 8종의 의학 서적을 시로 써내려갔다고 한다. 물론 대부분 유실되어 지금까지 전해 내려오는 것은 드물다. 아비센나는 각 민족의 의학적 경험과 지식을 대거 흡수하거나 정리하는 업적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유럽과 아시아의 의학, 과학 지식 교류를 촉진했다. 그는 수백 년 동안 ‘의학의 왕자’로 군림했다.

아비센나의 저서는 오늘날의 시각으로 봐도 위대한 대작에 해당한다. 또한 아랍 의학의 최고 경지를 보여주는 이정표였다. 지금도 파리 대학에 가면 화랑에 걸려 있는 아랍 의학의 두 거장 라제스와 아비센나의 초상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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