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장 아랍 의학 - 알라의 음성

중세 아랍의 의사들은 서로를 적대시했다. 말 한 마디만 귀에 거슬려도 독약을 만들어 사생결단을 내려 들었다. 옛날 어느 궁정에 두 명의 의사가 있었는데 사이가 굉장히 나빴다. 그 중 한 명이 돌도 녹일 만큼의 강력한 독약을 만들었다. 그는 누구도 이 독약의 해독제를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그러나 그의 상대는 그보다 훨씬 더 막강했다. 단지 해독제를 만들어냈을 뿐만 아니라 바로 옆에 피어있던 장미 한 송이를 꺾어 저주를 건 후 다시 상대방에게 건네 향기를 맡도록 권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 의사는 향기를 맡자마자 바로 죽어버렸다. 사실 그 장미는 그냥 장미일 뿐이었다. 공포가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이다.

이 이야기는 아랍 의사들 사이에 경쟁이 얼마나 심했었는지를 대변해 주는 증거인 셈이다. 이러한 경쟁구도가 의학의 발전을 이끈 면도 있었다. 특히 아벤조아르(Avenzoar, 1113~1162, 아랍 이름은 이븐주르(Ibn Zuhr))는 아비센나의 《의학정전》이 휴지조각에 불과하다며 강력한 비판을 가했던 인물이다. 그는 갈레노스의 사상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기존 사상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 때문이었던지 그는 위, 식도에 암이 발생한다는 사실을 발견했으며 이 경우 위장으로 관을 넣어 영양분을 공급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게 되었다. 당시 한 고위 대신이 식도 폐쇄 증상을 보이자 그는 양의 방광을 이용하여 환자의 위에 직접 우유, 계란, 죽 등을 넣어 영양분을 공급했다.

아벤조아르는 선대의 저술을 무조건 맹신해서는 안 되며 자신의 논점으로 비평할 줄 알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사로서 그는 이론보다 임상 경험을 더욱 중시했다.

아벤조아르와 그의 제자들은 ‘주석의 달인’ 아베로에스(Averroes theCommemtator, 1126~1198, 아랍 이름은 이븐 루슈드(Ibn Rushd))와 친분이 두터웠다. 아베로에스는 의사보다 철학자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인물로 법률, 철학, 의학 등의 분야를 연구했다. 그는 세비야, 코르도바의 법관이었으며 안달루시아 지역의 총독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슬람교도 기독교도 아니었던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에 꼼꼼하게 주석을 단 것으로 유명하다. 아베로에스는 일생 중 단 이틀 밤만 책을 보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부친이 세상을 떠난 날과 결혼한 날 밤이었다. 아벤조아르의 저서 《의학개설》은 갈레노스의 저서처럼 백과사전식으로 되어 있으나 임상 실험보다 이론에 더 치중하는 경향이 있다. 또 다른 저서 《의학원리》는 포괄적인 의학입문서에 해당한다. 조직학 연구의 선구자로 꼽히는 그는 천연두를 한번 앓고 난 사람은 다시 천연두에 걸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또한, 혈관, 운동, 보건위생 분야까지 연구 범위를 넓혔다.

아벤조아르의 제자 가운데 가장 뛰어났던 인물은 모세스 벤 마이문(Moses ben Maimum, 1135~1204)으로 마이모니데스(Maimonides)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아랍인이 아니라 유대인이었다. 코르도바 출신으로 이슬람의 이교도 박해를 피해 모로코, 예루살렘, 카이로 등지로 피해 다녔다. 아랍인들은 유대인의 언어능력을 높이 샀다. 이러한 능력을 알고 있던 칼리프도 이들에게 고전의학서를 히브리어와 라틴어로 번역토록 했다. 후에 유대인 의사들이 이러한 역서를 중앙아시아로 들여오면서 의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그들은 곧 궁정 의사의 지위에 오르는 등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마이모니데스는 부친과 형이 죽은 후 의술로 밥벌이에 나섰다. 후에 그는 살라딘(Saladin, 1138~1193,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시조)의 궁정 시의로 발탁되었다. 살라딘은 1187년 십자군을 격파하고 예루살렘을 탈환했으며, 제3차 십자군도 격퇴하여 세력을 확보했다.

마이모니데스는 아리스토텔레스와 갈레노스의 학설을 비롯해 모세의 율법까지 연구했다. 그는 유대 신앙과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조정해보려고 시도했으나 히브리 전통에 위배된다는 이유로 정통 신앙인들의 배척을 받았다. 그의 스승 아벤조아르처럼 마이모니데스도 의사보다 철학가로 더 유명하다. 그의 의학저서 가운데 우울증에 걸린 살라딘의 장자를 위해 지은 책이 있는데 식이요법과 보건위생 관련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의 일부 내용은 13~15세기 이탈리아 작가들의 건강 위생 관련 서적에 인용되기도 했다. 마이모니데스가 세상을 떠나자 유대인과 이슬람교도 모두 슬픔에 빠져 3일 동안 통곡하며 애도했다고 한다.

아랍의 조산사 자궁탈출증 치료. 아랍 의학이 낙후된 원인을 종교적인 이유로 인한해부학 지식의 부족에서 찾을 수 있다.
아랍의 조산사 자궁탈출증 치료. 아랍 의학이 낙후된 원인을 종교적인 이유로 인한해부학 지식의 부족에서 찾을 수 있다.

이슬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외과의사로 꼽히는 인물은 아부 알 카심으로 라틴어로는 알부카시스(Albucasis)이다. 그의 일생에 대한 자료는 거의남아 있지 않으며 저서로 의학백과사전에 해당하는 《방법》이 있다. 이 책에는 그 시대의 외과수술과 관련된 방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는데 당시 아랍인들이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200여 종의 외과수술 도구 도안과 설명도 실려 있다.

그는 갈레노스를 가장 존경했으며 아랍 의학이 낙후된 원인을 해부학 지식의 부족에서 찾았다. 그는 외과의사들에게 다음과 같이 경고했다. “알라는 알고 계신다. 당신이 지금 환자를 위해 수술을 하고 있는지, 아니면 단지 재물을 위해 수술을 하고 있는지.”

아랍의 과학, 철학은 인류 문화에 귀중한 유산을 남겼다. 의학은 당시 아랍의 군주 칼리프의 지지와 비호를 받으며 특히 그리스 문화, 고적을 보존하는 데 공헌했다. 그 당시의 화학자들은 약리학의 과학적 기초를 확립하는 데 기여했을 뿐만 아니라 세속 의사들의 존재 중요성을 입법자들에게 일깨워주었다. 이로써 아랍 의학은 오랜 기간 번영을 누렸다.

1258년 몽골이 바그다드를 침략해 아랍제국을 폐허로 만들었다. 이때부터 아랍의 생활 풍속은 과거의 기억 속에만 존재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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