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사진을 보고 있다. 이제 갓 스물을 바라보는 나이, 속에는 색깔 없는 남방을 받쳐 입고 그 위에는 베이지색 라운드셔츠를 걸쳤다. 짧고 말쑥한 머리에 코르덴바지를 입고 있다. 책상 앞에 앉아 이쪽을 바라보고 있다. 한 쪽으로 세워진 책장에는 이런저런 책들이 가지런하다. 눈은 맑고 반짝인다. 뽀얀 색감이 우러나오는 표정을 하고 있다.

둘째 아이가 외국에 교환학생으로 갔다가 누군가 찍어준 것이라며 봉투에 넣고 우표를 붙여 달팽이메일로 보내준 사진인데, 며칠 전 집 어느 구석에서 튀어나온 것이다. 싱싱한 젊음이 아름답다. 사진을 보는 사람은 누구나 아이의 덜 여문 싱싱함에 감전될 것 같다.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때가 있다. 나이든 사람의 케케묵은 근심이나 걱정 따위와는 관계없는, 철없는 맑음과 설명하기 어려운 설렘 같은 것이 가득한 표정. 나도 사진을 찍으면 그런 표정이 나오는 때가 있었다. 불안이라고 해봤자 귀를 살짝 덮는 정도의 머리 길이 때문에 경찰관이 뒤에서 나타나 파출소로 좀 가자고 할 것 같은 걱정이 지상최대의 골칫거리였던 때였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아이의 표정에는 일말의 긴장감과 불안 같은 것이 서려있다. 검은 눈동자와 흰자위의 대비가 선명한데, 약간 위쪽 방향을 바라보는 시선에서 일말의 불안감이 느껴진다. 얼핏 평온하게만 느껴지는 분위기이지만, 아이의 눈빛과 눈동자의 콘트라스트 속에서 피어오르는 무언가가 있다. 지금은 디지털 카메라로 맘대로 찍고 바꾸고 요술을 부리지만, 사진을 찍고 인화해서 뽑아주던 시절에 누군가의 앞에서 포즈를 취하는 행위는 자신의 영혼의 행방을 숨길 수 없는, 아무리 그런 것은 의식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자신도 모르게 내부의 열쇠를 열고 그것을 노출시킬 수밖에 없는, 영혼의 술래잡기 같은 것이 아니었을까. 그런데 왜 아이는 긴장의 그림자를 거느리고 있는 것일까.

20대 남성층의 문재인 대통령 지지율이 낮은 것이 일종의 트렌드가 돼가는 것 같다. 지난 연말을 앞두고 각종 여론조사에서 공통적으로 20대 남성 지지율이 전체 남녀별 연령집단 중 최저치를 보여준데 이어 최근(1월 둘째 주) 여론조사까지 약간의 변화는 있으나 20대 남성층의 지지율은 상대적으로 낮은 수치를 이어가고 있다. ‘20대 남성 지지율’이라는 말이 하나의 단어로 만들어지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문 대통령은 10일 가진 신년기자회견에서 “젊은 남녀 간에 젠더 갈등이 있다는 것은 잘 알고 있다. 사회가 바뀌는 과정에서 생기는 갈등”이라고 말했지만, 이런 추세가 언제까지 지속될 지는 여러 측면에서 주목해야 할 우리사회의 새로운 현상이라고 봐야 할 것 같다.

물론 20대 남성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자리 걱정, 정부의 성 평등정책으로 인한 기회축소, 군 복무로 인한 취업준비의 상대적 미흡, 격지·오지근무 등 20대 남성이 ‘불공평’을 외칠만한 요인은 적지 않다. 그러나 그런 분노를 당연시할 수는 없다. 동년배 여성들에게 화살을 돌린다고 나아질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20대는 시대의 상처를 자기 내부의 순수함으로 이겨야 할 나이다.

그런 정신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이 미국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꼽히는 월트 휘트먼(Walt Whitman, 1819∼1892)이다. 휘트먼은 가난한 가정 형편 때문에 5∼6년 정도의 교육밖에 받지 못하고, 11세의 나이에 학교를 그만두었던 소년이다. 그는 법률사무소, 병원, 인쇄소, 신문사 등에서 잡일을 하면서 혼자 공부했다. 휘트먼은 23세에 에머슨이 뉴욕에서 행한 ‘자연과 시인의 능력’이라는 제목의 강연을 듣고 감명을 받아 “미국의 시인”이 되고자 결심했다.

순전히 자신의 신념과 비전을 갖고 써낸 그의 시가 미국에 끼친 영향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 미국의 정신을 만들어낸 것으로 평가되는 그의 대표작 ‘자기 자신을 위한 노래’의 첫 단락에서 그는 “나는 내 자신에게 예배하고 내 자신을 찬양한다”고 썼다. 자신의 존재를 찬양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여 세계를 확장하는 사람은 누구를 미워하거나 부정할 시간이 없다. 그는 이 시의 뒷부분에서 이렇게 외친다. “자연은 인간의 삶을 영원한 것으로 만든다. 나는 그것을 알리고 싶다. 나의 꿈이며 야심이다. 이제부터 읽게 될 페이지엔 햇빛과 풀과 옥수수의 향내와 새들의 속삭임과 밤하늘에 박힌 별의 반짝임과 눈송이가 가득할 것이다. 무더운 도시에서 잠들어야 하는 노동자들을 위해, 병실과 감옥에서 고열로 신음하는 쇠약해진 맥박을 위해 신선한 미풍이 되고 싶다.”

20대가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것은 잘 닦여진 유리창처럼 그들의 존재가 선연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선연한 젊은이들이 긴장돼 있고, 연약해 보이는 것은 그들의 특권이다. 세대의 아름다움이다. 스무 살짜리들아, 그 특권과 아름다움으로 가라. 휘트먼처럼. (*)

 

언론인 / 전 국민일보 편집인 ·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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