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르네상스시대의 의학 — 휴머니즘 의학

“내가 의학을 구원할 것이다. 의학의 구세주 자리는 다름 아닌 나의 것이다.” 바젤 대학교의 파라셀수스(Paracelsus, 1493~1541)가 책상을 손으로 내리치며 학생들에게 열변을 토하고 있다. “갈레노스는 사기꾼이요, 아비센나는 주방장에 불과하다. 16세기를 구원할 의학의 구세주는 나뿐이다. 과학을 모르고 의술의 경험이 없는 자는 누구도 의사가 될 수 없다.”

파라셀수스는 당대의 기인이었다. 그를 존경하는 사람의 수만큼 비판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는 생전에 자연과학, 점술, 유태교의 신비철학, 연금술 등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그의 눈에 이 모든 학문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일심동체와 같았다.

파라셀수스 초상화. 스위스의 의사, 연금술사로서 르네상스시대 의학의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갈레노스로부터 발전한 교조주의와 권위주의를 경시하고 천연 물질을 이용한 치료를 중시해 화학, 약학을 임상의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파라셀수스 초상화. 스위스의 의사, 연금술사로서 르네상스시대 의학의 혁명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는 갈레노스로부터 발전한 교조주의와 권위주의를 경시하고 천연 물질을 이용한 치료를 중시해 화학, 약학을 임상의학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그는 매우 날카로운 어조로 동시대 의학자들을 비웃었다. “과거의 의학은 시체를 양산하는 재주밖에 없었으며 의사들은 얄팍한 지식을 아무것도 모르는 환자들에게 팔아넘기는 자들이었다. 의사에게 필요한 건 경험과 여행, 그리고 겸손이다.” 그는 심지어 바젤 대학교의 동료 교수들과도 어울리려 하지 않았으며 스콜라 철학파 의사들은 평생 한 무더기의 책만 끼고 살 인물들이라고 비판했다. 이에 비해 자신은 다른 의사들처럼 히포크라테스나 갈레노스의 사상을 그대로 추종하지 않을 뿐더러 경험과 노동을 통해 얻은 사실을 신뢰한다고 강조했다.

신중한 심리학자이면서 화학을 의학에 접목한 선구자였지만 지금껏 수많은 의학도가 숭배해마지 않았던 위인들의 위상을 깎아내리고 그동안 의학이 이뤄온 모든 성과를 부정했다. 파라셀수스의 이처럼 대담한 주장이 나오면서부터 의학은 여러 갈래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를 허풍쟁이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도 나오게 되었다.

파라셀수스는 1493년 스위스의 아인지델른(Einsiedeln)에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의사는 대자연이란 위대한 책을 두 발로 읽을 줄 알아야 한다.”라고 한 자신의 말을 지키기라도 하듯 1517년부터 1526년까지 그는 전 유럽을 일주했다. 그리고 여행 중 짬을 내어 비엔나, 쾰른, 파리, 몽펠리에에서 공부를 하곤 했다. 그는 자칭 1519년 이탈리아 페라라 대학에서 의학 학위를 받았고 또 모 대학에서 석사 학위까지 받았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증명할 방법은 없다.

그는 평생 유랑생활을 했다. 이베리아 반도, 폴란드, 리투아니아, 러시아 등지를 두루 다녔으며 네덜란드와 베니스에서는 군의관 생활을 하기도 했다. 영국의 콘월, 스웨덴의 주석광산까지 도달한 적도 있었다.

파라셀수스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사소한 것이라도 늘 펜을 들고 다니며 기록에 열중했다. “나는 늘 생명의 위협을 무릅쓰고 지식을 찾아 나섰다. 매춘부, 도살자, 이발사들에게 배움을 구하는 것을 왜 부끄러워해야 하는가?”라고 당당하게 말할 정도였다.

1526년 그는 마침내 유랑생활을 마감했다. 그해 그는 바젤 시에 있었는데 마침 그곳의 한 출판업자와 만나게 되었다. 다리에 병이 생긴 출판업자는 다리를 절단해야 할 처지에 놓였는데 파라셀수스가 손쉽게 그를 고쳐주었다. 이 출판업자가 도처에 파라셀수스의 의술을 칭찬하고 다녔기 때문에 바젤의 수많은 시민들이 그에게 몰려들었다. 파라셀수스는 그들의 고질병을 하나하나 고쳐주었고 이에 그곳 귀족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었다. 결국 그들의 추천을 받아 바젤 대학교의 교장과 바젤 시 의회의 고문 의사에 임명되었다. 당시 파라셀수스는 자신감에 넘쳐있었다. 그리고 바젤 시 정부에 감사를 표하며 학생들에게 자신의 모든 치료기술을 전수하겠노라 호언장담했다.

“의사가 있어야 할 자리는 환자의 병상 옆이다.” 이는 히포크라테스의 유명한 말이다. 그는 학생들에게 이 말을 강조하며 의사의 품성이 그 어떤 약보다도 환자의 회복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했다. 파라셀수스가 임상 경험의 중요성을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는 강의를 할 때도 강의실이 아닌 환자의 병상 옆에서 진행했다. 오랜 여행의 경험으로 파라셀수스는 노동자, 농민, 상인의 특정 질병을 구분할 줄 알았다. 특히 광산 노동자들의 폐병을 면밀히 관찰해 최초로 직업병의 개념을 정립하기도 했다. 그는 자신의 지식을 아낌없이 학생들에게 전수하며 그들이 진정한 임상의 전문가가 되기를 희망했다. 중세의 복잡한 처방전 대신 처방전의 간소화를 주장했다. 파라셀수스는 완벽한 의사는 의사인 동시에 철학자, 점성학자, 연금술사여야 하며 무엇보다도 후덕한 품성을 갖추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자질을 갖추었을 때 비로소 의사가 기술자와 구별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파라셀수스처럼 전통을 파괴하는 성향을 지닌 사람들이 대학에서 오래 살아남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는 결국 2년 만에 대학을 떠나게 되고 말았다. 당시 학생들에게 그는 라틴어 대신 ‘소에게나 어울리는 말’이라고 천대받았던 게르만 언어로 강의를 했다. 하루는 화로 옆에서 강의를 진행한 적이 있었다. 그는 갈레노스와 아비센나의 서적을 모두 화로에 던져버리고 나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자고 말했다고 한다. 파라셀수스는 소극적인 겁쟁이들 때문에 의학이 수세기나 퇴보했다고 비판했으며 대학 내 교수들은 잘못된 사상이나 전파하고 있다며 비판의 강도를 높였다. 그의 이러한 행보는 도처에서 물의를 일으키게 되었다. 결국 짧지만 찬란했던 교수 생활을 접고 그는 바젤을 떠나 유랑 의사의 신분으로 돌아왔다.

파라셀수스는 수많은 나라를 여행하는 중에도 놀랄 만큼 많은 저술을 남겼다. 비록 이처럼 두꺼운 전서를 남긴 이유가 동시대 의사들의 어리석음을 폭로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지만 그의 독창적인 사상과 학술은 전대미문의 성과를 담고 있다. 그는 정신병리학 영역에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했다. 영리한 정신과의사라면 인간이 신성(神性)과 수성(獸性)을 동시에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간이 자아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수성을 극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정신분석이론에 나오는 자아와 초자아의 투쟁에 비견되는 이론으로 이 개념을 주장한 프로이트보다도 앞서 나온 논리였다. 특히 ‘간질’을 유심히 관찰해 마비, 언어장애 등이 머리 손상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조금 황당한 비유지만 그는 정신병의 단계를 ‘개’에 비유해 설명했다. 정신박약자는 건강한 개, 정신질환자는 미친개라고 했는데 이는 인간의 ‘수성’이 자연스럽게 터져 나온 것일 뿐 ‘인성’은 이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인간의 내재된 본능으로 ‘발광’의 욕구를 누르고 이성으로 정상적 사고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그는 정신병 치료에 큰 자신감을 보이지 않았다. 그는 다만 철학적 입장에서 환자를 대했다. “정신병도 물론 치료가 필요하다. 정신병은 병의 근원이 정신에 있다. 믿음이 병을 유발할 때도 있지만 믿음으로 병을 치료할 수도 있다.” 그는 의지력, 정신력이 육체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다고 생각했다. 특히 여성과 남성은 완전히 다른 객체이므로 치료방법도 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잠재의식’에 대해서도 ‘실체는 존재하지 않지만 강력하게 작용을 하는 무엇’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파라셀수스는 자신을 철학자로 여겼다. 신의 지혜를 추구하며 인간의 영혼, 또는 영원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에게 의사는 ‘약을 만드는 사람’이나 ‘장사꾼’이 아니라 ‘신의 사자’로서 신을 대신해 존귀한 의술을 펼치는 자라고 주장했다. 육체는 ‘해부학의 살아 있는 실체’, 즉 우주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의학은 ‘신의 사명’이므로 의사는 ‘환자의 대소변 약탕기’에만 향하던 눈을 들어 천체를 관찰할 줄 알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가 관심을 기울인 해부학의 대상은 인체 근육이 아니라 인체를 구성하는 화학원소였다. 이는 당시의 해부학 사조와 불협화음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다. 르네상스시대의 뛰어난 의사들은 대부분 신의 영역에서 해방되어 인간에 더 가까이 접근해야 된다고 주장했기 때문이었다. 파라셀수스는 ‘신진대사’의 개념을 제기해 인체의 화학작용이 생명과 인체를 통제한다고 여겼다. 약용식물의 효능도 그 외형에 따라 결정된다고 주장했다.

파라셀수스가 1536년에 발표한 논문 〈4대 원소의 정령(Elemental Sprites)〉에는 고대 4대 원소의 개념을 새롭게 정의했다. 그러나 신화적 경향과 연금술 영역에 가까운 이러한 정의는 4대 원소를 완전히 의인화하여 의학의 범주를 벗어나 있었다. 오히려 후대의 환상, 공상 소설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바람의 원소는 실프(Sylph), 흙의 원소는 그노메(Gnome), 불의 원소는 살라멘더(Salamander), 물의 원소는 운디네(Undine, 또는 Ondine)이다.

여기서 실프는 그리스, 이집트의 신화학에서 유추한 것이고 그노메는 전설 속에 나오는 땅의 정령, 또 살라멘더는 신화에 나오는 불속에 살고 불을 먹는 도롱뇽(영원)으로 12세기부터 유럽에서 조직을 나타내는 표지로 사용한 문장에서 가리키는 불은 바로 화염 속의 ‘영원’을 상징하는 것으로 파라셀수스가 ‘영원’을 불의 정령으로 소개하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운디네는 ‘헤르메스 신화’에 나오는 물의 정령에서 기원한다.

신학과 의학의 교량을 만들기 위해 파라셀수스가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다. 의학의 새로운 기원을 열게 한 그는 훗날 ‘화학의학의 아버지’, ‘현대 화학요법의 대부’로 불리게 되었다. 과거 의학은 약용식물의 천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파라셀수스에 의해 화학요법의 개념이 등장했다. 연금술의 영역에서 이미 잊혀진 원소의 개념을 다시 끄집어내 새로운 치료법을 고안해낸 것이다. 그는 세상이야말로 신이 창조했다는 것을 굳게 믿었다. 또한 생명은 원기(元氣)라는 뜻을 지닌 ‘아르케우스(archaeus)’에서 온 것이며 물질은 유황, 수은, 소금 3대 원소로 만들어졌다고 확신했다. 이는 그가 증류실험 도중에 발견한 사실에 근거한 것이었다. 증기를 농축하였을 때 증류병 안에는 유황과 액체상태의 소량의 수은, 그리고 건조한 상태의 소금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점성술을 신뢰했던 그는 목성은 간, 화성은 담낭, 달은 뇌, 태양은 심장, 토성은 비장, 수성은 허파, 금성은 콩팥에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다.

파라셀수스와 관련해서 다음과 같은 신화적 얘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가 지니고 다니는 칼자루 속에 ‘진정한 철학자의 돌’이란 이름의 약이 들어 있는데 이는 모든 병을 고칠 수 있는 우주의 묘약이라고 알려져 있었다. 파라셀수스도 굳이 이러한 설을 부인하지 않았다. 연금술사에게 묘약이란 각종 약초, 광물질을 증류시킨 후 정제한 것이거나 금속을 제련해 얻은 것이었다. 파라셀수스는 아연, 유황, 철, 비소, 황산구리, 수은 등 화학약품의 사용을 적극 주장했으며 특히 수은을 매독치료에 사용토록 권장했다. 또한 아편을 혼합해 만든 약과 술에 적신 연고도 치료약으로 쓸 것을 제안했다.

그의 이러한 주장은 연금술이 더 이상 금을 만들어내는 허상의 작업이 아니라 광물질을 제련해 신약을 만들어내는 분야로 거듭나게 만들었다. 단순해 보이는 주석, 은, 유황 등의 광물질을 의학에 도입함으로써 갈레노스시대에 말린 약초 가루 형태나 고약에 머물던 약리학의 범주를 크게 확대시켰다. 이는 인류가 화학의 시대로 접어드는 신호탄이었다.

그러나 금속치료는 부작용이 매우 큰 단점이 있었다. 양심에 가책을 느낀 의사들은 환자에게 금속 중독을 경고하고 나섰다. 파라셀수스도 이 때문에 당혹감에 휩싸였지만 그래도 낙관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당시에는 마차 수레바퀴에 윤활유를 발랐는데 일부 의사들은 윤활유를 환자의 상처에 바르기도 했다. 이에 파라셀수스는 금속이 윤활유보다는 효능이 탁월하다고 주장했다. 비록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지기도 했지만 화학의 시대는 이미 거스를 수 없는 시대의 대세였다.

1541년 독일의 잘츠부르크의 주교는 이곳으로 피신해 온 파라셀수스를 받아들였지만 몇 주가 흐른 9월 24일 그는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후에 등장한 그의 추종자들은 파라셀수스의 신비한 분위기만 흉내낼 뿐 그의 사상과 학술은 저버리는 안타까운 결과를 낳았다.

저작권자 © 뉴스로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