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의술이야기] 인체 해부의 역사
[동서고금 의술이야기] 인체 해부의 역사
  • 강선주, 이문필 등 20인(빅북 제공)
  • 승인 2019.01.2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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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르네상스시대의 의학 — 휴머니즘 의학

독일의 유명한 문학가 괴테(Goethe)는 해부학이 지식욕을 만족시켜 주기는 하지만 잔인한 광경을 참고 봐야하는 고충이 따른다는 이중적인 견해를 밝힌 적이 있었다.

우리는 인체의 비밀이 모두 밝혀진 시대에 살고 있다. 인체를 구성하는 뼈, 근육, 심장, 간, 비장, 허파 등에 대해 이미 속속들이 알고 있는 상태이다. 인간이 자신의 신체구조를 이해하기 위해 메스와 나누는 대화, 그것이 바로 ‘인체 해부학’이다. 해부학은 의학의 기본으로 건축설계사의 설계도면과 같은 존재이다.

기원전 2800년 전, 이집트의 상형문자에는 당시 미라를 제작할 때 내장은 해부해서 처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비록 단편적인 형태이긴 했지만 그때부터 인류는 이미 초보적인 해부학 지식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고대 그리스 크로톤(지금의 이탈리아 남부 크로토네 지역)의 알크마이온(Alcmaeon, BC 500년 전후)은 역사상 최초의 해부학자이다. 그는 생물학 사상 처음으로 해부학 저서를 저술했다고 한다. 그의 해부학 저서는 수많은 동물 해부의 경험을 바탕으로 쓰였다. 알크마이온은 해부학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동물을 체계적으로 해부해 보아야 하며 특히 살아있는 동물을 대상으로 해부를 실시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 후 일부 의사들은 외상을 입은 환자, 나체 운동선수, 레슬링 선수, 사고로 사망한 자, 그리고 미라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해부학 지식을 얻기 시작했다. 몇몇 대담한 사람들 중에는 인체해부 금지 명령을 어기는 자도 있었다. 기원전 3세기경 알렉산드리아 의학원의 교수들은 교수형을 당한 죄수의 시체를 가지고 해부를 실시했으며 때로는 죄수를 산 채로 해부하기도 했다. 이때 해부 기술이 개선되고 용어가 정리되는 등 해부학, 생리학이 초보적 발전을 이룩했다. 중국에서는 기원전 4세기경 인체해부 지식과 기혈의 순환 등을 다룬 의서 《편작난경 扁鵲難經》, 《내경》 등이 등장했다.

그러나 고대에는 종교의 영향으로 시체 해부가 금지되었다. 해부는 인간을 존중하지 않고 신을 모독하는 행위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인도의 힌두교는 시체를 접촉하는 것조차 교리로 금지하고 있었다. 이 교리를 어기면 바로 종단으로부터 추방되었다. 이 때문에 동물의 내장과 부패한 동물의 시체만 가지고 해부학을 연구했으므로 그 성과는 미미할 수밖에 없었다.

파격적이고 역동적인 의사 파라셀수스. 그는 연금술, 약리학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바젤대학에서 강의할 때 갈레노스와 아비센나의 저서를 학생들 앞에서 불태우는 기행을 저지르고 고전 의학을 강하게 비판하다가 결국엔 추방되었다.
파격적이고 역동적인 의사 파라셀수스. 그는 연금술, 약리학에도 관심이 많았으며, 바젤대학에서 강의할 때 갈레노스와 아비센나의 저서를 학생들 앞에서 불태우는 기행을 저지르고 고전 의학을 강하게 비판하다가 결국엔 추방되었다.

갈레노스는 동물해부에서 발견한 사실을 그대로 인체에 적용했다. 따라서 그의 학설 가운데는 실체 인체의 구조와 다른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중세 의학사에서 ‘원숭이 해부학자’로 불린 갈레노스는 오랜 시간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러나 의학의 새로운 돌파구를 찾으려는 진보적인 의사들(이 가운데는 신부, 일반 신도들도 있었다)은 교회의 속박에 울분을 터뜨렸다. 《성경》 어디에도 시체 해부가 종교적 신앙에 위배된다는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유럽에 대학이 발전하면서 볼로냐, 파도바, 살레르노 등이 의학교육의 메카로 떠올랐다. 교회가 대학의 인체해부를 극렬하게 반대하고 나섰지만 최초의 대학 내 인체해부실은 종교의 교리가 가장 엄격했던 이탈리아에 처음 등장했다. 그 뒤를 이어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의 의학교에서도 이탈리아를 모방한 해부학이 속속 개설되었다.

후에 베살리우스가 현대 인체해부학을 확립한 뒤부터 대학마다 ‘해부실’을 설치한다고 법석을 떨게 되었다. 일부 급진적인 의학자들은 실제 인체해부 시범을 보이며 해부학 지식을 전수하기도 했다. 16세기 해부학 강의를 받은 한 의학도가 당시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해부실은 수많은 의학도와 일반 시민, 젊은 여성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또한 수도사들도 자리에 앉아 교수의 강의에 귀를 기울이며 인체해부의 전 과정을 빠짐없이 지켜보았다. 해부 첫날, 복부의 내장 해부를 시작으로 둘째 날은 흉부의 장기, 셋째 날은 두개골 내부, 넷째 날은 사지의 근육, 혈관, 신경, 뼈, 척추 등이 차례로 해부되었다. 일반인들은 별도의 비용을 지불해야 해부과정을 볼 수 있었고 인체 생식기 등의 해부를 참관할 경우 추가비용을 내야 했다.”

혈액순환 모식도. 갈레노스 학설에 소개된 혈액순환의 원리를 표현한 그림이다.
혈액순환 모식도. 갈레노스 학설에 소개된 혈액순환의 원리를 표현한 그림이다.

그러나 해부학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이에 상응하는 시체 확보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정부는 해부학이 사망자의 사인을 밝히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보고 14세기 중엽부터 사인이 불분명한 사망자가 발생하면 법관은 대학의 외과의사에게 검시를 요청했다.

법관이 의사들의 검시결과를 점차 신뢰하게 되면서 1526년 뷔르츠부르크 법원은 법정에 참여해 검시를 담당하는 의사들에게 시체 한 구당 20페니의 보수를 지급하기로 결정했다. 그로부터 4년 후 카를 5세(Karl V)는 독일 최초의 형사·형사소송법인 《형사법》을 제정해 의사들이 상해나 사인을 검사하는 데 협조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폭력으로 상해를 입었거나 사인이 불분명한 사건에서 해부는 필수적인 조사과정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독일의 형법학자 포이에르바흐(Feuerbach, 1775~1883)는 법의학을 의학의 독립된 분야로 정립한 인물이다.

당시는 해부용 시체가 늘 부족한 상황이었으므로 이를 빙자한 살인사건이 빈번하게 발생했다. 1828년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에서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엽기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게리 부부가 그들이 묵고 있던 여관에서 혈흔과 낯선 사람의 시체를 발견해 경찰에 신고했는데 경찰이 의사와 함께 도착했을 때는 시체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들은 곧 인근 해부학교의 교수 로버트 녹스(Robert Knox)를 떠올렸다. 그는 부족한 해부학용 시체를 금품으로 사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경찰이 해부실로 들어가서 시체를 보관하는 지하실의 문을 열었을 때 게리 부부는 자신들이 보았던 시체를 찾아냈다. 범인은 바로 여관주인이었다. 그는 재물에 눈이 어두워 자신의 여관에 투숙한 손님을 죽인 후 팔아넘겼던 것이다. 또한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는 것이 밝혀져 더욱 충격을 안겨줬다. 이 사건으로 당시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한동안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1829년 1월 28일 이 여관주인은 교수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유럽 각국은 해부학 관련법을 제정하기 위한 토론회를 연거푸 개최했다. 그리고 1889년 최초의 해부학 관련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 조항에는 “자살한 자, 교수형에 처한 죄수, 사망 후 시체를 수습할 가족이 없는 죄수, 고아, 신원불명의 사망자 등의 범위 내에서 해부학 연구를 추진할 수 있다.”라고 규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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