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의술이야기] 해부학의 시조 베살리우스
[동서고금 의술이야기] 해부학의 시조 베살리우스
  • 강선주, 이문필 등 20인(빅북 제공)
  • 승인 2019.01.30 09: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제9장 르네상스시대의 의학 — 휴머니즘 의학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해부학에 큰 공헌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진정한 해부학의 시조는 바로 벨기에 출신의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Vesalius, 1514~1563)이다. 그는 브뤼셀에서 약제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부모는 라인 강변의 베젤 지방 출신이었으므로 아들의 이름을 베살리우스라고 지었다. 그는 루뱅, 몽펠리에, 파리 등지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그러나 파리에서 의학을 배울 때 해부학 강의 방식에 큰 불만을 품게 되었다. 당시 파리 대학에서 해부학을 강의하던 안데르나치(Andernach) 교수는 갈레노스의 추종자였다. 인체 해부학 실습에 하등동물의 다리가 등장하기 일쑤였으며 강의과정은 갈레노스의 학설을 증명하는데 그쳤다. 인체해부를 하는 날은 반원형으로 둘러앉은 학생들 앞에서 이발사가 커다란 칼로 근육을 무지막지하게 잘라내곤 했다.

하루는 해부 실습 도중 교수의 실수를 발견한 베살리우스가 강단 앞에 나가 이를 증명해 보인 적이 있었다. 그의 해부 기술은 강의실 전체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해부학에 대한 집념에 불탔던 베살리우스는 가끔 교수대에 매달린 죄수의 시체를 훔쳐오기도 하고, 친구와 함께 파리 외곽에서 시체를 찾아 헤맸으며 가끔 서로의 눈을 가린 채 뼈 맞추기 내기를 하는 등 다소 엽기적인 행동까지 보였다. 베살리우스도 다빈치처럼 어두컴컴한 곳에서 희미한 촛불에 의지해 시체를 관찰했지만 이를 통해 숙련된 해부 기술과 인체에 대한 귀중한 기초자료를 얻을 수 있었다.

어느 날 베살리우스는 교수대에서 뼈만 남은 시체 한 구를 손에 넣었다. 까마귀들에게 뜯겨 살점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그는 시체의 뼈를 흩뜨린 후 자루에 담아 집까지 가져왔다. 다행스럽게도 그의 이 기괴한 행동을 눈여겨 본 사람은 없었다. 베살리우스는 가져온 시체를 커다란 용기에 담아 삶은 후 뼈만 발라 말리고 표백하는 과정을 거쳐 다시 짜맞추기 시작했다. 이로써 세계 최초의 인체 골격표본이 탄생하게 되었다.

그는 학교 안에서도 이미 괴짜로 소문이 나 있었다. 학교 당국은 그에게 학위를 부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학적에서 제명시켜 버렸다. 결국 베살리우스는 파리를 떠나게 되었다.

1537년 그는 파도바 대학의 해부학 교수로 임용되었다. 당시 파도바는 유럽에서 1,2위를 다투는 의과대학교였으며 그에게 해부 연구용 시체도 충분히 공급했다. 파도바에서 그의 해부학 강의가 있을 때면 500여 명의 학생과 의사가 운집했다. 베살리우스의 강의는 체계적이면서도 전문적이었다. 특히 정맥, 혈관, 생식, 골격 구조를 도표화하여 이해를 도왔다. 이러한 도표는 티치아노(Vecellio Tiziano,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대표적인 화가의 한 사람)의 제자였던 칼카르가 그린 것이었다.

그 후에도 칼카르는 베살리우스의 저서에 정교한 삽화를 더함으로써 베살리우스의 명성을 높이는 데 일조했다. 당시 의사, 의학도 가운데 이 도표를 탐내지 않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 해 베살리우스는 파도바 지역 의학, 해부학 담당 관리에 임명되었다.

1538년 그는 칼카르가 그린 도표 가운데 여섯 장을 골라 출판했는데 그림과 설명 모두 나무랄 데가 없었으므로 출판되자마자 순식간에 모두 팔렸다.

그 후 5년 동안 베살리우스는 점차 갈레노스의 학설을 버리고 자신만의 학설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1543년 해부학 사상 불후의 명작으로 꼽히는 《인체의 구조 De corporis humani fabrica libriseptem》 7권을 출판했다. 당시 그의 나이는 스물여덟 살에 불과했다. 이 책은 같은 해에 출판된 코페르니쿠스의 저서 《지동설》과 함께 종교와 신학에서 해방되도록 영향을 끼친 양대 서적에 이름을 올리게 되었다.

베살리우스의 저서는 베니스가 아니라 바젤에서 출판되었다. 바젤의 유명한 출판상 오보린은 인문주의자로 명성이 높은 인물이었다. 그는 베살리우스 저서의 가치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 책은 의학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갈레노스의 학설을 숭배했던 당시 대다수 교수들은 베살리우스의 저서를 배척했으며 이 영향은 점차 유럽 학술계 전반을 뒤흔들게 되었다. 베살리우스의 스승이었던 실비우스(Sylvius)를 포함해 수많은 학자들이 그를 삼류학자, 미치광이로 치부했다. 베살리우스가 갈레노스의 학설 가운데 ‘인체의 다리를 굽은 형태’로 본 것은 개의 골격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라고 비판하자 실비우스는 갈레노스시대의 사람들은 본래 다리가 굽어 있었다고 반박했다. 또한 그때와 비교해 지금은 바지폭이 좁아졌기 때문에 다리도 곧게 변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만약 인위적인 변화를 가하지 않는다면 다리는 본래 굽은 형태로 돌아갈 것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나 가장 큰 압력을 행사한 곳은 역시 교회였다. 《성경》에는 아담의 갈비뼈로 하와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었으므로 교회는 남자의 갈비뼈가 여자보다 한 개 적다고 굳게 믿었다. 따라서 베살리우스의 학설은 교회와의 정면 충돌을 피할 길이 없었다. 이때부터 베살리우스는 교회의 압박에 시달리게 되었다.

《인체의 구조》는 663페이지에 달하는 방대한 저서로 278장의 정교한 목판화가 삽입되어 있다. 삽화에 등장하는 인체는 모두 운동하는 자세를 취하여 각 장기의 기능을 나타내는 데 용이하도록 했다. 이를 르네상스시대 인문주의 정신의 상징이라고 해석하는 학자도 있다. 베살리우스는 과거의 의혹을 풀 수 있는 실질적인 증거 자료를 제시했다. 그의 저서는 과학과 예술의 이상적인 결합을 보여주었으며 의학에 객관성을 부여하였음은 물론 시각적 효과를 불어넣었다. 이로써 명실상부한 해부학의 기초를 확립하게 되었다.

베살리우스는 책의 서문에서 의사는 해부학의 지식을 반드시 갖추고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장사꾼들이 의약을 장악하는데 반대 입장을 표명했으며 의사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이유 때문에 의학 발전이 더뎌지고 있다고 주장했다. 해부학 강의에 있어 그는 특히 실습 경험을 중시했다.

“나는 실제 인체해부를 통해 인체구조를 밝힐 수 있었다. 갈레노스도 시체 해부를 실시했지만 인간이 아니라 동물을 대상으로 했으며 대부분이 원숭이였다. 당시의 시대적 상황이 어쩔 수 없었으므로 그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 인체를 직접 관찰할 수 있는데도 과거의 잘못된 관점을 견지한다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의학자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잘못된 판단까지 숭배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베살리우스는 갈레노스의 학설 가운데 200여 곳의 오류를 지적하고 그는 과학이 아니라 생각에 의해 학설을 세웠다고 주장했다. 그가 가장 먼저 지적한 갈레노스의 오류는 정맥과 심장의 묘사였다. 그는 종격(縱隔: 가슴 안에서 양쪽 허파를 둘러싸는 가슴 막 사이의 부분)과 막의 해부학 구조를 자세하게 묘사했다. 또한 갈레노스가 간, 담관, 자궁, 턱뼈 등에 잘못 묘사한 부분을 수정하고 흉골의 구조와 꼬리뼈(등뼈의 가장 아랫부분에 있는 뾰족한 뼈. 사람의 경우 대개 4개의 꼬리뼈 분절이 붙어서 이루어져 있다)의 뼈 수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특히 심장의 구조와 관련해 심실에 막이 있고 그 막에 구멍이 나 있다는 설을 부인했다. 그는 심장 판막의 구조를 정확하게 묘사해 혈액순환의 기본 개념을 정립했다. 마지막 장에서는 생체 해부에 대해 논하고 있는데 역시 갈레노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그는 후두를 떼어낸 동물이 인공호흡으로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했다. 또한 인종에 따라 두개골의 구조도 다른 것을 발견했다. 게르만 민족은 얼굴 길이가 짧고 플란더스 민족은 얼굴이 길었다. 베살리우스는 해부학이야말로 살아있는 학문이라고 강조했다. 인체의 모든 기관, 골격, 근육, 혈관, 신경이 상호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며 각각의 기관은 모두 살아 움직이는 조직이라고 보았다.베살리우스의 저술에 하자나 오류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는 순환계통에 대해서는 완벽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수정체가 안구 중간에 위치하고 정맥이 간에서 나오며 코 안에 근육이 있고 뇌에 7개(본래는 12개 임)의 뇌신경이 있다고 주장한 것 등이다.

《인체의 구조》가 출판된 후 교회의 압박을 견디기 어려웠던 베살리우스는 침통한 심정으로 출판을 기다리고 있던 모든 서적을 전부 불태워버렸다. 그는 자유로운 교수직도 해부학도 모두 포기했다. 어쩌면 연구와 실전 치료 둘 사이에서 고민에 빠졌던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베살리우스는 파도바를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Charles V, 스페인의 카를로스 1세, 1516~1556년 재위)의 궁정의사가 되었다.

의사가 된 후에도 베살리우스는 해부학자 시절 부럽지 않는 명성을 누렸다. 특히 펠리페 2세(Philip II)가 궁녀를 쫓아가다가 궁궐 계단에서 떨어져 심하게 다쳤을 때 그를 치료한 일화가 유명하다. 다른 궁정의사들이 속수무책일 때 베살리우스는 그에게 ‘수술’을 시도했다. 즉 그의 이마 두 군데에 칼집을 내어 고름을 빼낸 것이다. 그 후 펠리페 2세는 빠른 회복세를 보였다.

1559년에 베살리우스는 프랑스 앙리 2세가 사경을 헤매고 있는 자리에 불려갔다. 당시 프랑스의 유명한 의사였던 파레도 그곳에 있었다. 앙리 2세는 기사들과 창술을 겨루던 중, 창에 오른쪽 눈 위쪽을 찔리는 중상을 입었다. 베살리우스는 앙리 2세가 찔렸던 창을 가지고 죄수 네 명의 시체 눈 위쪽을 똑같이 찔러보았다. 이 실험을 통해 앙리 2세가 입은 상처는 나을 가망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살리우스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스페인 궁정의사들의 질투심도 걷잡을 수 없이 커져갔다. 순수 이론 연구를 추구하던 베살리우스가 해부실험은 고사하고 온갖 음모가 난무하는 궁궐에서 얼마나 우울했을지 그 심정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는 궁정의사들의 계략으로 종교재판에 회부된 적도 있었다. 베살리우스가 스페인 귀족의 시체를 해부한 적이 있었는데 가슴을 열었을 때 심장이 뛰고 있는 것을 함께 있는 감시관이 보았던 것이다. 그는 아직 죽지 않은 인체를 해부했다는 죄목으로 기소되었다. 종교재판에 회부된 그는 결국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펠리페 2세가 나서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보내는 선에서 마무리되었다.

1564년 성지순례를 끝내고 파키스탄에서 귀국하던 베살리우스를 실은 배가 좌초되었다. 그는 겨우 그리스 자킨토스 섬까지 떠밀려 왔으나 뜨거운 태양열과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그곳에서 숨을 거두었다. 향년 50세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