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르네상스시대의 의학 — 휴머니즘 의학

콜럼버스는 신대륙을 발견한 위대한 항해가였지만 화류병이라고 불렸던 매독을 유럽에 상륙시킨 불명예도 안고 있다. 이 위대한 항해가의 발길이 닿는 곳마다 매독은 급속히 유행하기 시작했다. 인도, 중국, 일본은 물론 스페인에서 유대인과 이슬람교도를 추방하면서 매독은 북아프리카까지 퍼지게 되었다. 문명인의 명함이란 풍자적인 비유로 매독은 콜럼버스가 닻을 내리는 항구마다 그 이름을 내밀었다.

오늘날 아메리카 대륙에서 발굴된 4000~6000년 전의 유골 687개 가운데서도 매독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매독은 최소한 800년 전부터 유행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중국 명나라시대에 포르투갈 사람들이 중국에 들어오면서 먼저 광동에 매독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중국에서 매독은 ‘광창’이라고 불렸다. 명나라의 유명한 문인이자 희극작가였던 탕현조(湯顯祖)가 매독에 걸린 그의 벗 도융(屠隆)에게 칠언절구 10수를 지어 보낸 적도 있었다.

1494년 프랑스의 샤를 8세가 이탈리아를 침략했다. 나폴리 왕국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해온 샤를 8세는 프랑스, 스페인 연합군을 나폴리에 투입했다. 스페인 군인 가운데는 콜럼버스의 항해에 참여했던 사람도 있었다. 이들이 서인도제도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서 기이한 병, 즉 매독에 걸렸다고 한다. 콜럼버스가 다시 배를 돌려 바하마제도에 도착했을 때 그는 이곳이 인도라고 착각했다. 이에 곧 진지를 갖추고 군대를 재정비하기 시작했다.

이 기간 동안 콜럼버스의 선원들은 현지 토착민과 함께 생활하며 그곳 여성들과 성관계를 맺었다. 그러나 바하마제도의 인디언들은 이미 아주 옛날부터 매독 병균을 지니고 있었던 것을 그들이 어찌 알았을까?

매독에 감염되면 온 몸에 궤양이 생겨 얼굴조차 알아볼 수 없게 된다. 매독 병균은 생식기에 딱딱한 궤양이 생기는 것을 시작으로 몇 주 안에 전신에 피부 발진을 일으키며 심하면 진물이 흐르는 구진(丘疹: 피부 표면에 돋아나는 작은 병변)이 발생하기도 한다. 수년 후에는 인체조직이 변형을 일으키고 신체적 혹은 정신적으로 무기력해진 환자는 결국 사망하고 만다.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군인들은 나폴리의 매춘부들에게 매독을 옮겼고 프랑스의 승리로 전쟁이 끝난 후 이 매춘부들에 의해 프랑스 군대에도 매독이 유행하게 되었다.

1년 후 프랑스 군대는 나폴리에서 돌아왔다. 그로부터 3년 후 매독은 프랑스, 독일, 스위스, 네덜란드, 헝가리, 러시아에까지 만연했다. 르네상스시대 위대한 화가의 한 명으로 꼽히는 뒤러가 유럽을 여행하며 벗에게 보낸 편지에는 거의 모든 사람이 이 병에 걸린 것 같다고 개탄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아메리카 대륙이 발견될 당시, 로마는 기방에서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이고 있었다. 이탈리아의 어느 역사학자가 소개한 바에 따르면 당시 베니스 인구 30만 명 중에 12만 명이 매춘부였다고 한다. 매독의 전염속도가 얼마나 빨랐을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매독이 처음 유행했을 때 사람들은 나병과 많이 혼동했다. 이 병은 성 접촉뿐만 아니라 다른 감염경로도 전염이 되었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병을 ‘프랑스 병’이라고 칭했으며 프랑스 사람들은 ‘나폴리 병’이라고 칭하며 분개했다. 또한 독일 사람들은 ‘스페인 종기’라고 불렀다.

매독이 급속하게 만연하면서 이탈리아, 터키, 영국은 프랑스를 탓하고 프랑스는 이탈리아를, 러시아는 네덜란드를, 스페인은 토착민을, 인도와 일본은 포르투갈을 탓했다. 1497년 파리 정부는 본래 파리 시민이 아닌 사람들 중에 매독에 걸린 모든 사람을 추방한다는 명을 내렸다. 스코틀랜드 또한 매춘을 금지하는 명을 내려 이를 어겼을 경우 신체에 낙인을 찍는 엄한 벌로 다스렸다.

매독이 유럽에 만연하면서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던 프랑스는 나폴레옹의 패배를 매독에 돌리기도 했다. 전체 군대의 40%가 매독으로 사망했기 때문이었다. 모차르트, 모파상, 베토벤 등도 심한 매독에 걸렸었다고 한다. 매독은 유전되기도 했다. 노르웨이의 극작가 입센(Henrik Johan Ibsen)의 작품 《유령 Gengangere》에는 주인공 오스왈드가 유전성 매독에 걸린 인물로 나온다. 매독 환자는 말기에 정신이상을 일으킬 수 있다. 프랑스의 극작가 브리외(Brieux)는 《매독 환자 Les Avar iés》라는 희곡에서 방탕한 생활을 하는 청년이 결국 아내의 사촌 여동생에게 유전성 매독에 걸린 아이를 낳게 만든다는 내용을 소개했다.

2006년 영국 브레드포드 대학 연구팀은 헐 시의 한 수도원 묘지에서 매독에 걸린 것으로 보이는 시체를 발굴하기도 했는데 약 1300~1450년 전에 생활했던 수도사로 추정되었다.

콜럼버스는 1492년에서 1502년까지 항해를 계속했으며 1502년에 아메리카 대륙 카리브해 연안에 도착했다고 한다. 따라서 콜럼버스가 항해를 떠나기 전에 유럽에는 이미 매독이 유행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이 시기에 즈음해 유행하기 시작한 매독은 서양문명의 발전과 발을 맞추어 5세기 동안 만연했다. 일부에서는 아메리카 대륙이 유럽에 자신의 존재를 알린 선물이라고 비꼬기도 한다.

어느 나라, 도시를 막론하고 매독과 자신을 연관시키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당시 의사들도 이 ‘불명예스러운 병’을 진찰조차 하려 들지 않았다. 매독은 유럽의 공중목욕탕, 매춘업소, 여관 등에서 주로 발생했으므로 사람들은 이를 ‘성병(性病)’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병의 정확한 원인을 알 수 없었으므로 의사들은 금식, 땀내기, 사혈, 배설 등의 방법으로 이를 치료하려 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질병이 발병한 곳에 그 치료방법도 있다고 했던가! 아메리카 대륙에 정착한 스페인 사람들은 현지의 유창목(癒瘡木), 스페인어로는 팔로산토(PaloSanto, 성스러운 나무)라고 하는 납가샛과의 상록 교목이 매독에 특효가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곳의 인디언들은 이 나무로 수많은 피부병을 고치고 있었던 것이다.

기적을 불러일으킨 이 나무는 르네상스시대의 새로운 ‘묘약’으로 떠올랐다. 스트라다누스(Stradanus)의 동(銅)으로 만든 작품 ‘매독 보고(NovaReperta)’에는 의학계가 유창목의 효과를 극찬한 대목을 찾아볼 수 있다.

조각의 왼쪽은 매음이 행해지는 장소로 환자 한 명이 침대 위에 누워 유창목으로 만든 탕약을 마시고 있다. 이는 환자가 10여일 만에 처음으로 섭취한 영양분이었다. 의사가 환자 앞에 유창목 가지를 들고 서 있으면 환자가 이미 건강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림 오른쪽에는 한 시종이 바닥에 앉아 유창목을 쪼개고 있다. 그 옆에는 두 명의 조수가 무게를 달아 탕약을 끓이고 있다. 유창목에서 나온 거품은 매독환자의 하감(下疳, 매독의 초기 궤양으로서 무통ㆍ경화성(硬化性)ㆍ부식성 구진이 감염 부위에 발생하는 것)에 바르는 약으로 사용했다.

아우구스부르크의 거상 푸거가(Fugger家)는 유창목 무역을 독점해 막대한 이윤을 챙겼다. 그러나 유창목을 남용하면 생명을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 명성도 차차 수그러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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