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르네상스시대의 의학 — 휴머니즘 의학

중세에는 의사도 등급이 있었다. 내과의사는 지위가 매우 높았던 데 반해 외과의사는 학술단체에도 참가할 수 없을 정도로 지위가 낮았다. 스콜라 철학파 의사들도 외과학을 배우고 또 이를 가르쳤지만 메스, 즉 수술용 칼을 잡는 것을 매우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그들이 외과수술을 위해 하는 일이란 대장장이, 사형집행인, 목욕탕 인부, 이발사들 중에서 조수를 선택하는 것뿐이었다. ‘외과’라는 뜻의 ‘Chirurgie’는 ‘손’을 의미하는 ‘cheir’와 ‘작업’을 의미하는 ‘ergon’이 합쳐진 말로 손을 써서 하는 작업에서 유래된 말이다. 황제가 칙령으로 외과의사와 그들의 치료 행위가 ‘고상’한 것이라고 발표까지 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르네상스시대의 외과의사의 사회적 지위는 지금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방광결석을 제거하는 의사들의 지위가 그나마 조금 높았을까? 당시 유행했던 사혈요법과 손발의 굳은살을 제거하는 간단한 수술을 하는 의사들은 사회적 지위가 매우 낮았다. 그들은 법적 지위에도 차이가 있었으며 학위가 없어 의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수도 없었다. 옷차림도 서로 달랐는데 특히 전쟁터에서 화살, 탄알 등을 빼내고 외상, 골절을 치료하는 사람들은 반팔 옷을 입은 하급 의사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전통적 편견은 18세기 말 파리의 외과의사 피에르 조제프 드소가 외과학을 확립하고 난 후에야 조금씩 누그러졌다.

초기 봉건군주에 종속된 군인들은 전쟁에서 부상을 당하면 스스로 의사와 약을 찾아다녀야 했다. 16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상황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기병부대가 점차 쇠퇴하고 보병부대가 보편화되었으며 화약병기의 시대에 진입하면서 화상, 열상(裂傷), 그리고 원인불명의 생리적, 정신적 질환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새로 개발된 무기는 사정거리, 기동성, 화력 등이 뛰어나 군인들이 부상당할 위험성이 그만큼 높아졌으며 부상의 심각성도 나날이 커졌다. 따라서 예전처럼 부상병들이 스스로 의사와 약을 찾아다니기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해졌다.

대규모 전쟁이 연이어 발생하면서 외과의사들의 지위도 격상되기 시작했다. 장병들의 치료를 보장하기 위해 군의관을 충분히 확보해야 할 필요성이 크게 대두되었으며 보수도 협의하여 책정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1449년부터 1450년까지 뉘른베르크가 포위공격을 받은 적이 있었다. 뉘른베르크 위원회는 현지의 외과의사 두 명을 고용했는데 모두 지위가 낮은 하급 의사들이었다. 그러나 이 두 명의 외과의사들은 빈부귀천, 주야를 가리지 않고 환자들에게 수술, 치료를 수행하여 그 명성이 매우 높았다. 외과 군의관들은 지위, 보수는 차치하더라도 고루한 고대 의학 이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압박까지 받고 있었다. 갈레노스와 히포크라테스가 어떻게 화약병기의 위력을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그때까지도 대포에 의한 총상은 치료방법이 전무한 상태였다. 외과의사들은 그들이 본 적도 없는 상처를 단지 상상해낸 치료법으로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터의 후방에 마련한 야전병원에는 연일 대포에 부상당한 환자들이 밀려들었다. 이처럼 밀려드는 부상병들을 치료하면서 외과의사들은 노하우를 축적하기 시작했으며 갈수록 손놀림도 빨라졌다.

16세기 무렵 불에 달군 철로 상처를 지지는 모습. 원시적인 상처치료를 할 때 지혈의 일환으로 시행되던 치료법인데 세균 감염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16세기 무렵 불에 달군 철로 상처를 지지는 모습. 원시적인 상처치료를 할 때 지혈의 일환으로 시행되던 치료법인데 세균 감염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전란의 화염이 유럽 전역에 퍼지면서 거리마다 팔, 다리를 잃은 사람들이 늘어났다. 그들 대부분은 대포의 포탄에 맞아 부상당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의 수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인력 부족 현상이 심각해졌으며 정부가 더 이상 좌시할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을 막기 위해서는 외과 군의관들이 한시라도 빨리 고대의 접골법을 응용해 새로운 치료법을 개발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인들은 부목, 견인 방법을 비롯해 붕대에 풀을 먹이고 점토로 고정하는 방법들을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14세기의 숄리아크는 중력과 도르래를 사용하기도 했다. 외과 군의관들의 주도 아래 기술자들은 고대 접골의 다양한 방법들을 부활시켰다. 이에 따라 골절 환자에게는 부목을 대고 정교한 견인기를 발명해 척추수술에 활용했다. 16세기 말엽에 이르러서는 정형외과의 개념이 완벽하게 정립되었다.

게르스도르프의 《외용 약제에 관한 야전서》에 수록된 삽화. 보병부대의 군사의학에 대한 기반을 다진 작품이다. 최초로 마취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지 절단 수술을 하고 있다.
게르스도르프의 《외용 약제에 관한 야전서》에 수록된 삽화. 보병부대의 군사의학에 대한 기반을 다진 작품이다. 최초로 마취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사지 절단 수술을 하고 있다.

1517년 독일과 프랑스의 접경에 위치한 스트라스부르에서 일종의 도해 서적인 《외용 약제에 관한 야전서 Feldtbüch der Wundartzney: Neulichgetruckt und gebessert》가 출판되었다. 17세기까지 독일어판으로 출판되었으며 그 후에 네덜란드어와 라틴어판으로 선보였다. 이 책은 자신을 ‘사팔뜨기 한스’라고 칭한 ‘한스 폰 게르스도르프’가 지은 것으로 보병부대의 군사의학에 대한 기반을 다진 작품이다. 위대한 외과 군의관으로 명성이 높았던 게르스도르프는 1450년 알프스의 한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여느 외과의사들과 마찬가지로 그 역시 이발사로 출발했다. 학업을 마친 후에는 떠돌이 의사로 지내다가 후에 외상을 주로 치료하는 군의관이 되었다. 군의관으로서 뛰어난 업적을 인정받은 그는 스트라스부르의 시민권을 획득하고 이 도시의 외과의사로 임용되었다.

《외용 약제에 관한 야전서》 서문에는 그림이 한 점 소개되어 있다. 전쟁에서 온몸에 부상을 입은 사람이 독자들에게 전하는 말이다.

“온몸이 상처투성이가 된 나는 피부가 썩어들어 갈 정도로 비참했다. 신이시여, 속세의 의사 ‘사팔뜨기 한스’를 만나게 해 나를 고통에서 해방시켜 주소서.”

이 책에는 저자 자신이 발명한 각종 치료도구와 수술과정 모식도가 소개되어 있으며 직접 설계한 견인기 도안도 실려 있었다. 이밖에도 부상으로 움푹 들어간 두개골을 복원하는 기계를 비롯해 항문과 질을 진찰하는 내시경 등 그의 천재성이 엿보이는 기계들도 볼 수 있다. 그의 견인수술과 천공수술은 매우 정교했다. 당시 사람들은 총상이 중독과 같다고 생각했지만 게르스도르프는 총알탄두를 조심스럽게 꺼내고 부드러운 기름을 상처에 발라 아물도록 했다. 이 책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내용은 총상 치료법이다. 특히 괴저(壞疽, 혈액 공급이 되지 않거나 세균 때문에 비교적 큰 덩어리의 조직이 죽는 현상) 현상이 나타날 경우 먼저 죽은 조직을 제거하고 상태가 극도로 심각하면 절단을 고려하도록 당부했다. 또한 상처는 우선 봉합하도록 강조했다. 봉합 방법은 불에 달군 철로 상처 부위를 지지거나 약품을 바르는 전통적인 방법을 비롯해 혈관 결찰, 상처 부위가 깊은 경우는 이를 꿰매어 지혈하는 방법 등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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