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르네상스시대의 의학 — 휴머니즘 의학

“1536년 프랑스 국왕인 프란시스(Francis)는 이탈리아 토리노를 정복하기 위해 대규모 원정군을 파견했다. …… 요새를 수비하던 이탈리아군은 우리 프랑스군의 맹공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격렬한 전투가 벌어져 총상 환자가 속출한 탓에 외과 군의관들은 눈코 뜰 새 없이 분주하게 움직여야 했다. 나는 아직 초보 의사였기 때문에 총상을 치료해본 적이 없었다. …… 끓는 기름이 상처에 닿으면 분명 통증이 엄청날 터인데. 나는 우선 다른 의사들의 치료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들이 펄펄 끓는 기름을 병사들의 상처에 붓는 것을 본 후에야 겨우 용기를 내 그 방법을 따라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름이 떨어진 바람에 나는 어쩔 수 없이 달걀노른자에 장미꽃 기름과 테레빈유를 섞어 병사들의 상처에 바르게 되었다. 그날 밤 상처에 끓는 기름을 바르지 못한 부상병들은 죽을 것 같은 두려움에 잠을 청할 수조차 없었다. 결국 나는 내가 치료한 병사들이 무사한지 살펴보기 위해 동이 트기도 전에 일어났다. 그러나 예상 외로 내가 고안해낸 연고로 치료한 병사들은 약간의 통증만을 호소했을 뿐 상처 부위가 부어오르지도 염증이 생기지도 않았다. 오히려 상처에 끓는 기름을 부은 병사들이 극도의 고통을 호소했고 그 상처 부위도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총상을 입은 불쌍한 병사들에게 상처에 끓는 기름을 붓는 잔인한 방법을 다시는 사용하지 않겠다고.”

성실함과 측은지심, 그리고 천부적인 관찰력을 갖춘 한 초보 의사의 아이디어 덕분에 상처에 펄펄 끓는 기름을 붓거나 상처 부위를 뜨거운 인두로 지지는 야만적인 치료방법이 마침내 사라지게 되었다. 그 초보 의사가 바로 프랑스인 파레(Ambroise Pare, 1517~1590) 였다.

파레는 당시의 비전문적이고 이론에만 얽매여 있던 외과학을 새롭게 재탄생시켰다. 또한 이 볼품없었던 외과 군의관에 의해 전쟁터의 수많은 부상병들이 목숨을 건질 수 있게 되었다. 프랑스 북부도시 메츠 전투에 참여했던 부상병 사이에서는 파레에 대한 찬사가 끊이지 않았다. 1553년 헤이스팅스 성에 억류되어 있던 병사들도 전쟁이 끝난 후 그를 목마 태운 채 거리를 행진할 정도였다. 파레가 포위망을 뚫고 성안으로 들어가 부상병들을 치료해 주었던 것이다. 프랑스 국왕 네 명의 주치의를 담당했던 파레는 파리의 의과대학 ‘꼴라쥬 산 콤’의 교수로 추대되기도 했으며 상처를 치료하는 새로운 방법들을 수없이 고안해냈다.

당시 외과 군의관들 중에는 이발사 출신이 많았다. 파레 역시 이발사 집안 출신이었으므로 의사로서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다. 의학서적은 대개 라틴어와 그리스어로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 두 언어를 할 줄 몰랐던 그는 이론을 익히는 과정에서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다. 결국 실전 경험을 통해 노하우를 쌓아갔다. 파레의 부친은 이발사였으며 그의 형은 이발사 출신의 외과의사였다. 어린 시절 파레는 그의 형 밑에서 의술을 익혔다.

파레가 고안한 탈골 접합기. 우선 도르래를 이용해 팔뚝을 잡아당긴 후 수건으로 탈골된 팔뚝을 접합시키고 있다. 그는 32년간 외과 종군의사로 임상치료 경험과 실험을 통하여 근대 외과학에 큰 족적을 남겼다.
파레가 고안한 탈골 접합기. 우선 도르래를 이용해 팔뚝을 잡아당긴 후 수건으로 탈골된 팔뚝을 접합시키고 있다. 그는 32년간 외과 종군의사로 임상치료 경험과 실험을 통하여 근대 외과학에 큰 족적을 남겼다.

그 후 파리에 있는 ‘오텔 디외’라는 병원의 외과 레지던트로 있다가 군의관이 되었다. 1536년 파레는 그의 첫 번째 전지였던 툴롱 성 전투에 군의관으로 참전했다. 그는 언제나 이 시기에 있었던 일들을 가슴 깊이 새겨두었다고 한다.

“우리는 서로 엉망으로 뒤엉킨 채 정신없이 성안으로 진격했다. 발아래로 무수한 병사들의 시체가 밟혔고 그중에는 중상을 입고 아직 목숨이 붙어있는 병사들도 있었다. 말발굽에 채일 때마다 그들은 괴성을 지르며 울부짖었다. 그 울부짖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나는 가슴이 저며 오는 것 같았다.”

파레가 성안으로 들어가자 한 노병이 그에게 중상을 입은 병사 세 명을 가리키며 살 가망이 있는지 물었다. 진찰을 마친 파레가 고개를 가로젓자 노병은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칼로 부드럽게 그들의 후두(喉頭)를 베어 고통에서 해방시켰다. 이 광경을 지켜본 파레는 너무 놀라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마치 자신이 그 세 명의 병사를 죽인 것 같은 죄책감을 느꼈다. 이런 파레를 옆에서 위로하던 노병은 만약 자신이 중상을 입어 가망이 없는 것으로 판단되면 똑같은 방법으로 고통에서 해방시켜 달라고 당부했다.

파레는 30년간의 야전 외과의사 생애 동안 전쟁터를 학교로 삼아 외과 이론을 하나씩 정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피드먼트 전쟁의 첫 교전에서 한 병사가 심한 부상을 당했다. 다른 병사들은 이미 그를 포기했지만 파레는 그가 걱정이 된 나머지 연대장에게 부상병을 계속 돌볼 수 있도록 허락을 구했다. 파레의 극진한 보살핌을 받은 부상병은 기적처럼 살아났다. 이는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우는 효과를 가져왔다. 병사들은 자신들의 얼마 안 되는 용돈을 모아 파레에게 감사를 표했다. 그의 전기에는 겸손한 마음으로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나는 상처를 싸매줄 뿐 신이 그를 낫게 한 것이다.”

사지 절단 수술에 있어서는 파레도 ‘소작법’으로 지혈을 했다. 그 자신이 낸 통계에 따르면 절단 수술을 한 환자 가운데 3분의 1정도만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이처럼 낮은 생존 확률에 불안감을 느낀 파레는 알렉산드리아 의학교 외과의사들이 사용했었던 결찰법을 이용해 지혈에 나서는 등 절단 수술 방법을 개선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혈관 결찰법이 다시 세상에 전해지게 되었다. 비록 신이 지켜준다고 해도 상처를 싸매는 기술이 쉬운 것은 아니었다.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파레는 매춘부 네 명을 고용해 자신이 고안해 낸 붕대를 항상 청결하게 빨아서 말리도록 했다. 그러나 당시에는 양가죽처럼 두꺼운 아마포밖에 생산되지 않았으며 물과 비누도 턱없이 부족했다.

1545년 파레는 《총상치료법 La Méthod de traicter les playes faites parles arquebuses et aultres bastons à feu》이란 저서를 발표했다. 이 책에서 그는 특히 대포로 인한 외상 치료법을 획기적으로 개선한 내용을 담았는데 전통적으로 내려오던 야만적인 소작법을 거부했다. 파레는 라틴어를 할 줄 몰랐으므로 그의 저서는 모두 프랑스어로 되어있다. 이는 르네상스시대에 있어 매우 혁신적인 행위였다. 파레는 외과 전반에 고루 영향을 끼쳤다. 소작법을 개선하고 붕대를 고안해낸 것 말고도 대퇴경부 골절 치료방법을 최초로 기술했으며 안면외상 봉합의 정확한 방법을 묘사해 놓았다. 이밖에도 구순열(口脣裂, 입술갈림증), 구개열(口蓋裂, 입천장갈림증) 수술의 개선방법과 코 복원 수술, 기관지 절개 수술, 전립선 제거 수술, 골절·탈골 접합 수술, 탈장 수술, 자궁 적출 수술, 탈장대(脫腸帶, 탈장된 부분을 제자리에 넣고 밖에서 눌러 두르는 띠) 응용 방법, 머리 외상 치료 및 천공수술의 적합성 등을 소개하고 있다. 또한 제왕절개 수술을 피하기 위해 자궁 내 태아가 위치를 바꾸도록 하는 수술을 시도했으며 여성이 스스로 직접 삽입할 수 있는 관장기기를 발명해 내기도 했다.

그러나 파레도 새로운 외과 기계, 수술 방법 등 과학적인 내용을 다루면서도 파라셀수스처럼 신화적 요소를 가미한 반인반수, 인어 등의 신화와 전설에 심취했었다.

그는 외과학의 뛰어난 업적에 힘입어 미천한 이발사 출신의 의사였음에도 의원의 자리에까지 올랐다. 또한 앙리 2세, 프랑수아 2세, 샤를 9세, 앙리 3세 등 4명의 프랑스 왕의 주치의로 활약했다. 비록 소망했던 소르본 대학에 몸담지는 못했지만 1554년 꼴라쥬 산 콤의 교수로 임용되었다. 파리 대학의 의사들은 여전히 이발사 출신의 외과의사를 얕잡아 보았던 것이다. 파레와 파리 대학 사이에 일종의 ‘명예를 건 전쟁’이 시작되었으나 국왕의 격려 속에 언제나 파레가 최종 승리를 거두었다.

1569년 파레는 드디어 전쟁터를 떠나 파리로 돌아오게 되었다. 마침 전쟁에서 대포에 무릎을 다친 한 귀족이 파레를 찾았다. 그는 7개월 동안 수많은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았지만 전혀 차도가 없었다. 파레는 우선 그의 침대시트를 깨끗한 것으로 갈고 침대 옆에 매일 싱싱한 생화를 갖다 놓아 그 향기로 상처에서 나는 악취를 약화시켰다. 또한 큰 솥을 갖다놓고 위에서 가는 물줄기가 솥 안으로 떨어지도록 해 마치 비가 내리는 것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이는 환자의 수면을 도와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는 또 어릿광대를 불러 귀족에게 계속 웃음을 주도록 했다.

1572년 프랑스의 가톨릭 귀족과 시민들이 파리에서 위그노(Huguenot, 프로테스탄트) 개신교도들을 무참하게 학살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파레도 개신교도였는데 샤를 4세가 그를 자신의 궁전에 숨겨 보호함으로써 겨우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사건이 진정된 후 샤를 4세는 파레에게 신앙을 바꾸도록 권했으나 파레는 이를 단호한 대답으로 거절했다. “폐하께서는 제게 어머니의 자궁으로 돌아가는 것과 전쟁에 참전시키지 않는 것, 폐하를 떠나지 않는 것과 미사를 보도록 강요하지 않는 것 등 4가지를 약속하셨습니다. 잊지 않으셨을 줄 압니다.”

1575년 그는 1천 페이지에 육박하는 《파레 전집》을 출판했다. “나는 상처를 싸매줄 뿐 신이 환자를 낫게 한 것이다.” 파레의 이 명언은 그의 묘비에도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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