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르네상스시대의 의학 — 휴머니즘 의학

여성은 인류 역사에서 늘 차별받는 존재였다. 지금도 이러한 경향은 여전히 존재한다. 여성의 난소는 1672년 네덜란드의 해부학자 그라프(Reinier de Graaf, 1641~1673)가 처음 발견했다. 그보다 훨씬 이전인 기원전 300년 알렉산드리아의 의사이자 해부학자인 헤로필로스(Herophilos, BC 340~250)가 시체를 해부하면서 여성의 생식선을 발견해 ‘여성 고환’이란 명칭을 붙인바 있다. 그리스 고대 문헌에는 이집트인들이 피임을 목적으로 난소를 절제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르네상스시대에 베살리우스가 컬러 삽화까지 넣어 출판한 7권의 대작 《인체의 구조》에도 여전히 ‘여성고환’이란 용어를 그대로 사용했다. 1827년에야 동물학자이자 발생학자(생명의 근원을 밝히는 일에 종사하는 사람)인 칼 에른스트 폰 베어(Karl Ernst vonBaer, 1792~1876)가 처음으로 여성의 난자를 발견했다. 여성의 생식구조에 무지했던 그 시대에 출산이 여성에게 얼마나 큰 고통이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숄리아크의 《외과학총론》에는 산부인학과 관련된 부분이 단 세 단락뿐이다. 또 다른 저서에서는 ‘여성’을 자연생물학 가운데 ‘독사’ 뒤에 안배하기도 했다. 여성을 독사보다도 더 강한 독을 지닌 존재로 인식했기 때문이었다. 월경 현상도 성경에 나오는 하와의 원죄에서 비롯된 당연한 결과라고 여겼다. 일부에서는 체내 4가지 원소의 과잉현상의 소치로 보기도 했다. 여성이 남성보다 본래 혈액이 더 많기 때문에 한 달에 한 번씩 이를 배출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도미니크교단(1215년 도미니크가 세운 탁발 수도회로 정통 신앙 옹호, 신학의 학문적 중요성 인식, 복음 전파를 목적으로 한 가톨릭의 한 교단)의 이론가 마그나는 여성이 남성보다 ‘열’을 많이 지니고 있으므로 여성의 정상적인 성행위 금지는 잘못된 행위라고 비판했다. 르네상스시대에는 이처럼 기괴한 이론을 담은 의서들이 무수히 등장했다. 그리고 정통파 의사들은 여성의 생식기 질병을 치료하면 자신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것처럼 여겼다. 여성은 하와의 후손으로 원죄의 화신들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산과를 매우 중시했으며 특히 조산사의 역할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남자 의사들은 ‘히포크라테스 선언’에 입각해 여성의 생식기관 접촉이 엄격하게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중세 무렵 살레르노 의학교의 여학생들이 아기를 받아내는 기술을 배우긴 했지만 이는 당시 상류사회 여성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사회 하류계층의 산모와 영아 사망률은 여전히 증가 추세에 있었다. 15세기에 이르러서야 정부에서 교육시킨 조산사가 등장했다.

당시 대부분의 조산사는 정부가 고용한 사람들이었다. 정부 당국은 산부인과 관련된 문제, 심지어 강간을 당한 여성도 이들이 처리하도록 했으므로 의사들은 여성과 괴리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산과에 무지한 조산사들 때문에 중세 산모들은 산욕열과 난산의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그들의 생존확률이 3분의 1에 미치지 못한 때도 있었다. 심지어 분만이 임박한 산모들에게 계단을 오르내리게 하고 크게 소리를 지르게 하는 등 우매한 행위도 서슴지 않았다. 재채기를 유도하기 위해 약품가루나 후춧가루를 코에 들이대거나 아무런 효과도 없는 약물을 끝도 없이 들이키게 했다. 또한 더러운 손으로 산모의 허리에 기름을 발라 꾹꾹 문지르기 일쑤여서 정상적인 분만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결국 외과의사가 불려오고 나면 태아는 조각난 형태로 자궁에서 끄집어내지기 일쑤였고 혹시 산모가 이미 사망한 후라면 제왕절개 등으로 태아를 살려내고자 시도하기도 했다. 1280년 쾰른 의회가 공표한 법령에는 태아가 질식하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조산사는 반드시 사망한 산모의 입을 벌려 놓아야 한다는 규정이 등장했다. 원시부족의 산파들도 중세 조산사보다는 그 기술이 앞서 있지 않았을까?

르네상스시대에도 여전히 조산사들이 출산을 담당했으며 의사는 관여하지 못하도록 법으로 금지했다. 1522년에는 함부르크의 한 의사가 산모의 분만을 유도하던 중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조산사는 그에게 억지로 여성 옷을 입혀 바로 화형시켜버렸다.

사람들은 산모가 고통 속에서 신음하며 아이를 낳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이 때문에 의학의 모든 분야가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던 시기에도 산과는 여전히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다. 스트라스부르에서 1513년 《산모와 조산사의 장미화원》, 1595년 《조산사》란 책이 발간되고 1610년 4월 21일 최초의 제왕절개 수술이 실시되었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뿐이다.

《산모와 조산사의 장미화원》의 저자는 단 한 번도 태아를 받아본 적이 없는 로슬린이라는 내과의사였다. 그는 단지 고대문헌에 나오는 출산 관련 기록과 우화들을 편집해 책으로 발간했기 때문에 참신한 내용을 기대하기 어려웠다. 그런데도 이 책은 무려 200여 년 동안 산과의 교재로써 최고의 판매량을 기록했다. 다만 여성의 임신과 출산을 다룬 아름다운 삽화가 실려 있는데 그림에는 열 살은 되어 보이는 태아가 거대한 자궁 속에 버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1537년 헨리 8세의 세 번째 왕비 시모어가 왕이 그토록 원하던 아들(에드워드 6세)을 낳았으나 분만 후에 바로 숨을 거두었다. 이 사건은 잉글랜드에 산과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545년에는 레이놀드(Reynolds)가 《산모와 조산사의 장미화원》을 《인간의 탄생》이란 제목으로 새롭게 단장해 출판했는데 역시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조산사》를 저술한 메르퀴르는 본래 도미니크수도회의 수도사였다. 후에 유럽을 떠돌며 베니스, 파도바 등지에서 의술을 펼치기도 했다. 이 책에는 골반이 수축되었을 때 제왕절개 수술을 실시해야 한다는 논리가 처음으로 소개되어 있으며 조산사들이 개선해야 될 방법들이 조목조목 실려 있다. 그는 또한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분만하는 방법을 다시 권장했는데 이는 1889년 발허가 다시 응용하기도 했다.

민간에서는 제왕절개 수술을 ‘카이저슈니트(Kaiserschnitt)’라고 불렀는데 이는 로마황제 카이사르에게서 유래했다. 카이사르는 제왕절개로 탄생했다는 설이 있다. 중세 가톨릭교는 정식 세례를 받은 사람에게만 제왕절개 수술을 할 자격을 주었다. 17세기에 이르러 만약 태아가 모체 자궁에서 바로 사망할 가능성이 큰 경우에 ‘세례 침’을 이용해 태아에게 세례를 주었다.

1610년 4월 21일 뷔르템베르크 대학 의대에서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살아있는 산모를 대상으로 한 제왕절개 수술이 실시되었다. 그 산모는 포도주통 테를 만드는 직공의 아내로 실수로 부딪히면서 자궁의 위치가 잘못되었던 것이다. 목사까지 참석한 자리에서 예레미아스(Jeremias)라는 의사가 수술을 집도했다.

그러나 결과는 매우 비관적이었다. 태어난 아이는 9년 동안 생존했으며 산모는 수술 후 4주 만에 원인불명의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다. 이후에도 제왕절개 수술은 빈번하게 이뤄졌지만 대개 산모의 죽음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외과의사들의 제왕절개 수술 실패에 은근히 고소해 하던 조산사들은 이를 ‘고의적 살인’이라고 비하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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