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의술이야기] 기원전 600년, 백내장 치료
[동서고금 의술이야기] 기원전 600년, 백내장 치료
  • 강선주, 이문필 등 20인(빅북 제공)
  • 승인 2019.02.20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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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르네상스시대의 의학 — 휴머니즘 의학

로마의 역사학자 플리니우스는 당시 로마의 네로 왕이 안경을 썼다고 기록한 바 있다. 네로 왕은 에메랄드로 만든 안경을 쓰고 격투기를 관람했다고 한다. 안경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빛의 굴절 현상을 알고 있어야 했다. 빛의 굴절 현상을 발견한 사람은 11세기 아랍의 의사 이븐 알 하이탐(Ibn Al-Haytham)이었다. 그는 유리구슬을 통해 사물을 보면 본래보다 더 커보인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1260년 마르코 폴로(Marco Polo)는 중국을 여행하던 중에 한 노인이 안경을 쓰고 작은 글씨를 보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중국 고대에 등장한 안경은 큰 타원형이었으며 안경알은 수정, 석영, 황옥, 자수정 등이고, 테는 거북의 등껍질로 만들었다. 당시 안경은 말 한 마리의 가격에 맞먹을 정도로 매우 고가의 제품이었으므로 신분과 지위를 상징하기도 했다.

13세기에 이르러 영국의 철학자이자 자연과학자인 로저 베이컨(Roger Bacon)은 노인들에게 돋보기를 사용하도록 권장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1세기가 지난 후 드디어 유럽에서 안경이 발명되었다. 처음 선보인 안경은 안경알을 테로 연결해 고정시킨 것으로 손으로 잡고 사용해야 했다. 이 안경은 돋보기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므로 책을 읽을 때만 사용했다. 당시 베니스와 뉘른베르크는 투시력이 뛰어난 고급 안경을 만드는 도시로 유명했다.

그 후에 코에 걸치는 안경이 발명되었으나 너무 크고 무거워 코에서 자주 떨어졌다. 이에 모자 앞 챙으로 눌러 고정시키거나 안경에 줄을 달아 귀나 뒤통수에 묶었다. 르네상스시대에 인쇄술의 발달에 힘입어 각종 저술들이 쏟아져 나옴에 따라 안경이 크게 유행하게 되었으며 안경점들은 큰 돈을 벌었다.

백내장은 지금도 안과의 주요 질환으로 꼽히는 병이다. 기원전 600년 ‘인도의 히포크라테스’로 불렸던 의사 슈슈르타(Susruta)가 백내장 수술을 실시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는 수술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수염을 깨끗이 깎았으며 증기로 수술실을 소독했다. 수술이 시작되면 먼저 환자의 눈에 입김을 쐬어 온기를 불어넣은 후 엄지손가락으로 동공 안의 수정체가 보일 때까지 백내장을 문질렀다. 이어 조수에게 환자의 머리를 손으로 받치게 한 후 환자에게는 환자 자신의 코끝에 시선을 고정시키도록 했다. 슈슈르타는 뾰족한 침을 동공 안으로 넣어 진물과 점액이 흘러나오도록 한 후, 백내장이 눈 옆으로 밀려나도록 했다. 마지막으로 기름을 묻힌 면화 천을 7일 동안 붙여놓았다. 물론 운 좋게 다시 광명을 찾은 사람들도 있었지만 의사들이 동공의 정확한 위치를 제대로 찾지 못해 시력을 잃는 경우도 많이 발생했다. 슈슈르타는 녹내장의 치료방법도 개발했으며 자신의 기술을 수많은 제자들에게 전수해 주었다.

7세기 아랍이 페르시아를 정복한 후 페르시아가 장악하고 있던 의학지식이 아랍으로 전수되었다. 아랍은 이를 유럽에까지 전파했다.

그러나 중세 유럽에서 안과 질환은 거리의 소점포에서 치아를 뽑는 발치 기술자들이 주로 치료를 해주었다. 백내장 수술도 아주 저렴한 가격으로 시술 받을 수 있었다. 통증도 출혈도 없이 몇 분도 채 안 되어 다시 광명을 찾은 환자들은 그 기술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들이 주로 사용했던 시술도구는 철이나 구리로 만든 것으로 구두공이나 도축업자들이 사용하던 뾰족한 침과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이 뾰족한 침을 이용해 수정체의 혼탁한 부분을 긁어낸 후 유리체(琉璃體: 수정체와 망막 사이의 안구 속을 채우고 있는 반고체의 투명한 물질) 안으로 밀어 넣었던 것이다. 따라서 환자들은 잠시 광명을 찾았다가 ‘의사’들이 떠나고 나면 시술 부위가 감염되어 실명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당시 백내장은 체내의 원소들이 혼탁해져서 일어난다고 생각했다.

아우구스티누스의 궁정 안과의사를 지냈던 게오르그 바티시(GeorgBartisch)는 이렇게 ‘눈을 망치는 사람’들을 강도 높게 비판했다. 그는 베살리우스와 그의 문하생들로부터 실용적인 안과 해부학 지식을 배운 바 있다. 1583년에는 안과 관련 책을 저술하여 해부학적 지식과 실용적인 치료법을 자세하게 설명했다. 특히 백내장의 종류를 세밀하게 구분했으며 사시 교정을 위한 특수 마스크를 발명하기도 했다. 그의 책 안에는 이 특수 마스크를 묘사한 삽화도 함께 실려 있는데 수직 방향으로 두 줄의 긴 타원형의 틈이 벌어져 있어 이 틈을 이용해 안구 근육 운동을 실시할 수 있었다.

또한 은으로 만든 단단하고 예리한 침을 사용해 백내장을 제거했다. 그는 당시 유행하던 안경이 무용지물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인간의 눈은 두 개면 족하므로 굳이 네 개일 필요가 없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또 하나 흥미로운 것은 수술 이틀 전부터 의사는 반드시 금욕생활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야 청결을 유지하고 수술 시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당시 의사들은 환자보다는 아내가 우선 순위였다. 따라서 이 같은 주장은 거의 실현성이 없었다.

중세 의사들의 저서 중에서는 황당한 내용이 상당히 많다. 심지어 의사는 반드시 부적을 지니고 있어야 마귀의 수작에서 안전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또한 안과의사는 남성만이 그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여성은 체내 원소의 영향으로 수술에 실패할 가능성이 많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1700년, 파리의 외과의사 피에르 브리소(Pierre Brisseau)가 백내장을 앓았던 병사의 시체를 해부하면서 백내장이 수정체가 흐려지면서 생기는 병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주장은 인정받기는커녕 오히려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다. 떠돌이 의사들과 어설프게 안과 교육을 받은 이들은 여전히 뾰족한 침을 이용해 백내장을 치료하려고만 했다. 독일의 생리학자 헤르만 폰 헬름홀츠(Hermann Von Helmholtz)가 검안경(檢眼鏡)을 발명한 후에야 브리소의 주장이 인정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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