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르네상스시대의 의학 — 휴머니즘 의학

네덜란드의 조각가 헨드리크 골치우스(Hendrick Goltzius)는 병세에 따라 의사에 대한 태도가 바뀌는 환자들의 심리를 예리하게 풍자한 적이 있었다. 병이 위중할 때 의사는 그들에게 희망이요 천사이지만, 건강을 되찾은 후엔 막대한 의료비를 청구하기 때문이다. 

르네상스시대는 의사들에게 극도로 혼란을 준 시대였다. 그들은 소변검사 용기를 손에서 놓을 수 없었고 4대 원소설에 입각해 시도 때도 없이 팔뚝에 사혈요법을 실시해야 했으며 페스트에서 비듬까지 온갖 질병을 치료하느라 눈코 뜰 새가 없었다. 외과의사들은 외상과 골절을 치료하고 이발사들은 발치까지 했으며 대중목욕탕에선 부항치료가 성행했다. 그렇게 모든 것이 일상 속에 녹아 있었다. 병자가 아직 살아있는 한, 의사의 권위는 여전히 막강했다.

전통적인 의사들은 긴 가운을 입고 유창한 라틴어를 구사했으며 상처에 직접 접촉하는 것을 꺼렸다. 마치 자신이 신이나 된 듯 환자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져 조수에게 지시만 내리며 입으로 모든 치료를 했다. 일반 환자들에게 그들은 너무나 괴리된 존재로서 신뢰감을 형성할 수 없었을 뿐만 아니라 고액의 치료비도 부담이 되었다. 이에 비해 돌팔이 의사들의 삶은 자유롭고 유쾌했다. 그들은 환자들 가까이 있었고 늘 자신만만했으며 못 고치는 병이 없었다. 이는 환자들에게 커다란 위안이 되었다. 마치 그 시대 위대한 예술가들처럼 그들도 인본주의적 자아를 가졌다고나 할까?

한때 뉘른베르크에서 떠돌이 의사의 의료행위를 금지하는 칙령을 반포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실효성은 없었다. 1421년에는 잉글랜드의 헨리 5세가 돌팔이 의사들을 질책하며 정식 의사들에게 치료를 받도록 유도했으나 역시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일반 민중들은 돌팔이 의사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을 찾았다. 자연과학자 베이컨은 일반 민중들의 심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정식 의사를 찾기 전에 떠돌이 의사나 점술가, 마술사를 찾는데 이미 익숙해져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병에 걸렸을 때 의사에게 치료받는 것을 포기하는 대신 스스로 관련 서적을 찾아보며 의학지식을 쌓기 시작했다. 특히 《의사들의 회진록》이란 책이 인기였는데 어려운 이론 대신 실제 치료 경험을 담은 의사들의 대화가 담긴 일종의 질병 사례집이었다.

상업과 문화의 발달에 힘입어 도시가 급속하게 발전했으며 공중위생의 안전성도 크게 높아졌다. 1518년 영국의 헨리 8세는 토마스 리너커(Thomas Linacre)라는 의사에게 의사협회를 조직해 런던의 모든 의료행위를 감독하도록 했다. 또한 옥스퍼드와 캠브리지 졸업생 외의 모든 의사는 자격증을 구비하도록 규정했다. 의료행위를 감독하는 의사협회는 어느새 정부기구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이 기구는 1551년 왕립의학협회로 재탄생했다. 유럽 최초의 순수 의학기구가 등장한 것이다.

헨리 8세는 의학의 발전에 고무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는 프랑스와의 전쟁 중에 다리에 궤양을 앓은 적이 있어서 의학의 중요성을 몸소 체험했던 것이다. 헨리 8세는 왕립의학협회 외에도 ‘이발사 외과의사 연맹’의 성립을 허가했다. 이로써 외과의사는 단순 노동자였던 구두공, 청소부 등과 구별되어 그 사회적 지위가 크게 향상되었다.

당시 영국은 종교적 변혁의 회오리에 휘말리지도 않았거니와 파라셀수스나 파레처럼 의학사상 위대한 인물이 배출되지도 않았다. 그러나 의사들이 연합해 조직을 결성하고 학생들에게 실질적인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안정적인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특히 캠브리지는 의학교육의 메카로 거듭나게 되었다.

1591년 뉘른베르크 관리위원회가 독일 최초로 의사협회를 결성해 여기에 최고 의료관리기구 직책을 맡겼다. 그 후 독일의 다른 도시에서도 점차 이러한 정책을 모방하기 시작했다.

뉘른베르크 의사협회의 주석은 대학교 의학과의 주임교수를 담당하거나 다른 실력 있는 의사를 초빙해 주임교수직을 맡길 권한도 지니고 있었다. 각종 포럼을 열어 난치병의 증상과 치료방안에 대한 열띤 토론을 벌였으며 의사의 등급 결정, 초임자 교육, 의료사고 판결 등의 일상 사무를 관장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협회에 등록된 의사들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업무 효율이 떨어지는 결과가 빚어졌다. 환자들은 동일한 병에 의사마다 처방전이 달라 골머리를 앓거나 의사들이 자기 의견만 고집하며 싸우는 통에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죽음을 맞곤 했다. 따라서 의사협회를 보는 시각이 곱지만은 않았다. 특히 전염병이 크게 유행하던 시기에 병원은 아이러니하게도 ‘죽음의 집’으로 불려졌다.

그러나 독일의 의사협회는 발전을 거듭했다. 1685년, 브란덴부르크 왕국에 의약협회가 성립되었는데 18세기 초에 ‘의약건강최고협회’로 재탄생해 체계적, 효율적으로 보건위생 사업을 추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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