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르네상스시대의 의학 — 휴머니즘 의학

세르베투스(Servetus, 1511~1553)는 인체해부학의 창시자로 불리는 베살리우스의 벗이자 제자였다. 그는 베살리우스보다 세 살 위였다. 1511년 스페인 북부 나바라에서 출생했으며 스페인에서 보통교육을 받은 후에 어머니의 고향이었던 프랑스로 떠났다. 처음에는 리옹의 한 인쇄소에서 교열 일을 하다가 파리로 옮겨와 점성학을 공부했다. 후에 파리 대학 의학과에 입학해 베살리우스와 같은 실험실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의 저서 《그리스도교 회복》에는 혈액이 심장에서 흘러나와 허파를 지나 온몸을 순환한 후 좌심실로 돌아온다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허파가 붉은 이유도 심장에서 흘러나온 혈액이 통과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당시 이 혈액순환이론은 가설에 불과했을 뿐, 완벽하게 증명되지 못한 상태였다. 또한 그는 신학의 입장에서 의학을 연구했기 때문에 의학을 크게 발전시키지는 못했다.

《그리스도교 회복》은 당시 유럽 전체에 광범위하게 퍼져있던 알렉산드리아의 신학자 아리우스(Arius)의 교의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 교의의 핵심은 ‘유일신론’으로 삼위일체를 반대했다. 영국의 위대한 과학자 뉴턴(IsaacNewton)도 이 교의를 따르는 신도였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각국 정부는 이 주장이 이단적 성향을 띠고 있다고 격분했다. 1723년 영국이 신앙의 자유를 허락하는 방식으로 기독교를 허용했지만 ‘삼위일체론’은 여전히 단호하게 반대하고 있었다.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저서 《그리스도교 회복》을 16세기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칼뱅에게도 보냈다. 여기에 칼뱅의 착오와 잘못을 지적해 놓은 서한을 함께 동봉했다. 그는 칼뱅과 진지한 토론을 벌이길 원했지만 오히려 종교계의 논쟁으로 번지면서 파장을 일으켰다.

세르베투스의 학설을 본 칼뱅은 분기탱천하여 세르베투스가 자신이 있는 성에 오는 날이 눈을 감는 날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리고 천주교에 그에 대한 수배령을 내렸다. 결국 세르베투스는 체포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감옥에 있던 죄수들의 도움으로 탈옥해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로 도주했다. 그는 제네바에서 다시 칼뱅과의 설전을 준비했으나 불행히도 제네바의 한 교회에서 또 체포되고 말았다. 직접 재판에 참석한 칼뱅은 세르베투스에게 그의 저술이 ‘이단적 진술’이며 ‘선동적인 책자’임을 인정하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세르베투스는 자신의 신념을 견지했다. 결국 그는 이교도로 판정되어 1553년 10월 27일 제네바에서 화형을 당했다.

독일의 철학자 엥겔스는 세르베투스가 혈액순환 과정을 발견하려는 순간 칼뱅이 그를 잔인하게 태워 죽였다고 개탄했지만 실은 혈액순환 과정과 세르베투스의 죽음은 큰 상관이 없었다. 세르베투스가 혈액순환 과정을 발견해 죽음을 당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죽은 후 발베르데(Valverde)라는 의사가 재판에 참여했던 주교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우연히 세르베투스의 혈액순환 이론을 듣게 되었다. 그는 세르베투스의 이론을 도용해 1556년 해부학 논문을 발표했다. 사실 허파에서 나온 혈액이 전신을 순환한다는 이론은 쉽게 증명할 수 있는 학설이 아니었다. 세르베투스에 앞서 13세기 아랍의 과학자 이븐 알 나피스(Ibn al Nafis)가 혈액순환의 개념을 먼저 소개한 적이 있었다. 따라서 세르베투스의 죽음 때문에 혈액순환 이론이 75년이나 늦게 등장했다는 주장은 어불성설이다.

이탈리아 파비아에서 태어난 카르다노(Jerome Cardan, 1501~1576)는 수학자로 명성이 높으며 인류역사상 최초로 발진티푸스의 임상 경험을 묘사한 인물이다. 그는 사생아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으며 도박에 빠져 마흔 살이 될 때까지 한 푼 없는 빈털터리였다. 젊은 시절 그의 손에는 하루도 주사위가 떠날 날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젊은 시절에는 수학과 물리에 심취하기도 했었다. 1520년 파비아 대학에 들어갔으나 나중에 파두아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사생아라는 이유만으로 밀라노 의대로부터 거절당했지만 얼마 후 보란 듯이 유럽에서 가장 명망 높은 의사의 반열에 올랐다. 이탈리아의 수많은 대학에 임용된 그는 수학 강단에도 서게 되었다. 뛰어난 의술을 바탕으로 귀족, 추기경, 국왕의 주치의를 담당하기도 했다. 카르다노는 점성의학을 굳게 믿었으므로 별자리로 모든 병을 진단하고 치료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루는 검은 고양이 한 마리가 자신이 집필하고 있던 의학 논문을 찢어버린 일이 발생했다. 그 후 마치 무슨 계시라도 받은 듯 그는 파비아 대학의 총장직을 사퇴하고 의사로서의 길을 걸었다.

1545년 카르다노는 《위대한 술법 Ars Magra》이란 저서를 통해 ‘3차 방정식’의 해법을 발표했다. 이는 ‘카르다노 공식’, 또는 ‘타르탈리아(Tartaglia, 독학으로 수학에 통달한 이탈리아의 수학자로 3차 방정식의 해법을 발견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공식’이라고 하는데 카르다노가 타르탈리아의 해법을 도용했다는 소문이 나면서 두 사람이 원수지간이 되었다고 한다.

《위대한 술법》에는 4차 방정식의 해법도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제자 페라리가 발견한 것이다. 카르다노는 ‘복수(複數)’의 개념을 가장 먼저 사용했으며 ‘확률’의 기본 이론도 정립했다. 그의 저서 《확률이라는 게임에 관한 책 Liber de ludo aleae》에는 주사위를 두 개, 또는 세 개 던졌을 때 특정 숫자가 나오는 계산법이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도 시각장애인들이 사용하는 점자(점자체계를 만든 루이 브라유의 이름을 따서 브라유(Braille)라고도 함)로 청각장애인들과 교류하는 방식을 고안해 냈으며 만능 회전축, 자물쇠 등을 발명하기도 했다. 그는 유체역학(流體力學 기체, 액체 따위의 운동을 연구하는 학문) 연구에 있어서도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1552년의 어느 날, 스코틀랜드의 에든버러 지역을 여행하던 카르다노는 그곳의 대주교가 병에 걸렸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현지 의사들은 대주교가 결핵에 걸렸다고 판단했으므로 이미 모두 포기한 상태였다. 하지만 카르다노가 6주 동안 세심하게 관찰한 결과 대주교는 결핵이 아니라 천식에 걸렸을 뿐이었다. 이에 대주교의 깃털 베개를 생사 베개로 바꾸고 10시간 이상 숙면을 취하게 했으며 화원을 산책하고 자주 머리를 감도록 조치했다. 또한 닭 스프나 우유 등 담백한 음식을 섭취하도록 식단을 새로 짜는 등 대주교가 건강을 회복할 때까지 그를 곁에서 보살폈다.

카르다노는 매우 불행한 가족사를 지닌 인물이었다. 먼저 그가 가장 사랑했던 막내아들이 부정한 아내를 죽인 죄로 사형을 언도받았다. 집행 시간이 다가오자 그는 고통스럽게 주먹을 움켜쥐었는데 손에서 피가 배어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의 딸은 매춘부가 되어 매독으로 세상을 떠났으며 또 다른 아들은 도박에 미쳐 몰래 그의 재산을 빼돌리기 일쑤였다.

1570년에 그는 예수가 탄생했을 때의 별자리를 계산하다가 이교도로 몰려 감옥에 갇히기도 했다. 그의 아들마저도 그를 이교도로 모는데 동조했다고 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주교가 그를 점성술사로 고용해 감옥에서 풀어주었다. 그 후 로마로 건너가 교황 그레고리 13세로부터 연금을 지원받아 《나의 생애 De propria vita》라는 자서전을 집필했다. 그는 점성술로 자신이 죽는 날을 계산하기도 했다.

카르다노는 실로 파란만장하고 매우 광적인 삶을 살았다. 또한 그 자신이 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의사란 직업을 매우 혐오했다. 부자나 귀족을 치료하는 건 운 좋은 의사들의 몫이었다고나 할까? 의사는 비천하고 고달픈 직업이며 노예의 병이나 고치는 저급 노동으로 치부했다.

당시 연금술사들도 점성학을 신봉했다. 이들은 스스로 별자리를 주재할 능력이 있다고 믿는 자들이었으므로 질병을 고치는 것쯤은 식은 죽 먹기로 여겼다. 자신들이 마음만 먹으면 우주의 비밀을 밝혀 새로운 생명도 창조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 시대에 명성이 높았던 연금술사로 투른나이저(Leonhard Thurneyser, 1530~1596)란 사람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아들이 금세공사가 되기를 바랐지만 그는 파라셀수스에 심취해 몰래 오스트리아 티롤 지방의 광산에서 야금술을 연구하러 다니곤 했다. 그의 정성에 감동한 오스트리아 페르디난트(Archduke Ferdinand) 공작은 그가 전 유럽을 다니며 야금술의 비밀을 연구할 수 있도록 경제적 지원을 해주었다. 충분한 자원과 설비를 확보한 그는 그만의 ‘묘약’을 만들기 시작했다.

투른나이저는 한 번도 제대로 의학을 공부한 적이 없었지만 자신이 ‘만들어낸’ 금덩이로 병을 고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금속에 대한 지식만 있으면 의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후에 세계 각지에서 그의 점성술 그림을 구하려는 편지가 쇄도했다. 이를 처리하기 위해 비서를 열두 명이나 두었을 정도였다. 또한 직접 인쇄소를 세워 자신의 작품들을 인쇄하기 시작했다. 그는 페르디난트 공작에게 베를린 부근의 한 시내에서 금을 정제해 낼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지만 결국 실패해 페르디난트 공작의 마음도 그에게서 멀어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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