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그림이 있는 풍경] 모든 생애의 길이
[시와 그림이 있는 풍경] 모든 생애의 길이
  • 김용국(시인)
  • 승인 2019.02.25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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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리, 혼합재료, 40x30cm, 양희자
잠자리, 혼합재료, 40x30cm, 양희자

모든 생애의 길이


문득 저 들녘을 핥는 아지랑이나
허공의 옅은 향기 같은 색깔이나 
그 허공을 그으며 사라지는 별똥별이나
한나절 동안 입을 벌리고 닫는 나팔꽃이나
밤낮을 합해 하루를 산다는 하루살이나
매섭게 먹이를 노리는 한철의 버마재비나
고래희古來稀라는 내 삶이나
내 가슴에 흐릿흐릿 맺힌 당신의 얼굴이나
천년만년 파도나
파도에 부딪히는 바위나
온천지가 한 번 피고 지는 시간이라는 겁劫이거나
겁의 겁이라는 영겁이거나,
 
지나고 나면
모든 생애의 길이는 다르지 않습니다.

시간은 균등한 것일까요. 나에게 한 시간이 당신에게도 한 시간일까요.

우리는 시간의 양적 단위에만 집중했습니다. 그래서 시계를 만들고 초침과 분침, 시침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우리가 만나는 사람에 대해 얼마나 살았는가 하는 나이는 알려고 해도 어떻게 살았는지는 잘 알려고 하지 않지요. 이게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지만 사회적 질서가 시간으로 결정되는 장유長幼로 삼는 일이 대부분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인격이나 아량, 학식, 업적은 그 사람이 살아온 시간에 비례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진정한 의미의 시간은 양이 아니라 질일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이에게 물리적으로는 같게 흐르는 시간이지만 사람의 내면에 스며들면 사람마다 각각의 다른 색채와 무게의 시간으로 변용됩니다. 사람마다 자기의 특별한 시간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우리가 늙는다는 것도 다르게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자신의 시간을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늙은 젊은이’도 ‘젊은 늙은이’도 될 수가 있지요. 죽어도 산 사람일 수 있고, 살아도 죽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하루살이가 하루만 산다고 가볍게 볼 일도 아니고 버마재비가 한철만 산다고 무시할 일도 아닙니다. 비록 인간의 시간으로는 아주 짧지만 그 곤충들의 시간은 우리의 시간보다 더 충만할지도 모릅니다.

확대해 보면 우주의 한 주기가 아무리 무량無量의 시간이라고 해도 탄생과 성장과 쇠퇴와 소멸을 겪는다는 의미에서 태양이나 별, 동물이나 식물, 사람이나 곤충, 그 한 생애의 주기는 내용적으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 안의 시간은 우주의 시간과 견줄만한 위대한 시간일 수도 있습니다. 우주가 겁으로 살아야 할 시간을 우리는 고래희古來稀의 생애로 압축해서 살아갈 뿐이지요.

이렇게 우리의 시간도 우주의 시간처럼 끝없이 신비롭고 황홀합니다.

김용국(金龍國) 시인 약력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30년 넘게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타악기풍으로』, 『생각의 나라』, 『다시 나를 과녁으로 삼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당신의 맨발』 등이 있으며 동인지 『비동인 (非同人)』으로 활동했다. 월간 『베스트셀러』에서 제정한 제1회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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