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와 그림이 있는 풍경] 송어리, 봄눈
[시와 그림이 있는 풍경] 송어리, 봄눈
  • 김용국(시인)
  • 승인 2019.03.04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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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양 송어리 전경 , 사진 전영권
양양 송어리 전경 , 사진 전영권

송어리, 봄눈
- 여산如山* 선생에게


눈꽃이 목련처럼 피고
창문은 한 장, 
크리스마스카드 같았습니다.

송어리, 산골, 여산 선생이
난로의 잦은 불에 입김을 불면,
장작에는 연한 불이 새순처럼 돋았습니다.

눈은 산길을 지우고, 덩달아
나도 내 갈 길을 지우며 멈칫하는데
냇물만 봄길 따라 흘렀습니다.

봄이 봄에 겨워 잠시 조을 때
봄꽃 위에 봄눈이 무량無量으로 내려
더 황홀한 봄이 되는데,

봄눈, 송어리에, 나는
크리스마스카드 속 소년처럼
영영 갇히고 싶었습니다.

‘처녀지처럼 순결한 오지에 심취하는 버릇이 있는 사람 가운데 하나인 나는 그래도 어딘가에 오지가 남아 있겠지 하는 기대로 서면 동사무소를 찾아든다.

“그런 게 어디 있을까요?”

직원들은 난감하게 눈을 끔벅이다가 오히려 그렇게 되묻는다. 그러다가 머리를 맞대고 꿍얼꿍얼 의논하더니 한마디 귀띔한다. 아하, 송어리로 가보세요!

나는 이제 송어리 마을길을 들어가고 있다 적막하다. 아늑하다. 산중턱 위아래로 인가가 종렬 형태로 띄엄띄엄 늘어서 있다. 인가의 지붕 면적만한 옹색한 비탈 밭이 또한 드문드문 눈에 들어온다. 넥타이처럼 비좁은 한 가닥 농로가 구불구불 산을 오르고 있다. 그리고 또 무엇이 있지? 없다. 있는 게 별로 없다. 구멍가게도 마을회관도 서면 어디에도 그토록 흔한 민박 집 하나가 없다.

그러나 있다. 정말 있어야 할 것들은 다 있다. 새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 숲 향기가 지천으로 가득하다. 순수한 자연의 선물들이 송어리에 초만원을 이루고 있다. 박수 쳐서 환호할 만한 자연의 부품들이 무진장한 분량을 가지고 있다.’《산촌 여행의 황홀 187~188쪽, 박원식, 도서출판 청해, 2009》

* * * * *

우연히 강원도 중에서도 오지인 송어리에 들어 여산 선생의 집에서 하루를 묵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날 뜻하지 않던 봄눈이 무릎까지 내려 길도 소식도 끊길 것 같은 이 산속에서 마음과 어깨의 무거운 모든 것을 내려놓고 세상과의 인연도 끊고 영원히 그곳에서 나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날 송어리는 나에게 무릉도원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이곳을 종종 다녀오는데 그 풍경은 옛날과 많이 다르지 않습니다.

아직도 송어리는 ‘크리스마스카드 속 소년처럼/영영 갇히고 싶’은 나의 무릉도원입니다.

*여산如山 선생-송어리에 사시던 주민. 한학漢學과 불학佛學에 많은 관심을 가졌고, 세상사에 초탈하고 너그러운 성품을 가지신 분이다. 송어리에 가면 항상 귀한 친구처럼 웃음으로 나를 대해 주시던 고마운 분이다.

김용국(金龍國) 시인 약력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졸업. 1984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해 30년 넘게 시인으로 활동하고 있다. 작품으로는 『타악기풍으로』, 『생각의 나라』, 『다시 나를 과녁으로 삼다』, 『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 어렵습니다』, 『당신의 맨발』 등이 있으며 동인지 『비동인 (非同人)』으로 활동했다. 월간 『베스트셀러』에서 제정한 제1회 베스트셀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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