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의술이야기] 맥박시계 발명
[동서고금 의술이야기] 맥박시계 발명
  • 강선주, 이문필 등 20인(빅북 제공)
  • 승인 2019.03.04 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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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17세기 의학 — 과학의 황금기

유럽의 해외 식민지 개척이 활발해지면서 17세기 유럽의 문화와 예술은 르네상스시대에서 바로크(Baroque)시대로 접어들었다.

‘바로크’는 스페인과 포르투갈 지역에서 유래한 말로 ‘일그러진 진주(barroco)’라는 뜻이다. 유럽에서는 ‘도리에 벗어난’, ‘비상식적인’, ‘가식적인’ 등의 뜻으로 사용되었다. 바로크시대는 17세기에서 18세기 전반기, 즉 1600년에서 1750년대에 이르는 시기로 르네상스시대(1452~1600)에 이어 등장했으며 후에 고전주의, 낭만주의로 이어졌다.

당시 유럽에는 귀족 상류사회를 중심으로 살롱문화(상류 가정의 객실에서 열리는 사교적인 모임)가 유행했다. 이곳에서 국가, 정치, 문학, 예술을 토론하고 승마, 궁술 등의 취미를 교류하기도 했다. 영국의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은 모든 지식은 경험에서 비롯된다고 주장했다. 베이컨의 명언 “지식이 곧 힘이다.”라는 말은 수세기 동안 학자들의 지식에 대한 욕구를 자극했다. 유럽에도 변혁의 회오리가 불기 시작해 네덜란드에 먼저 혁명이 일어나 새로운 국가가 탄생했다. 영국은 전제주의 왕권이 무너지고 의회제가 도입되었다. 정치가 종교의 속박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재판이 여전히 사람들의 사상 통제를 강화하고 있었지만 무시무시한 화형대도 지식에 대한 갈망을 막을 수는 없었다. 갈릴레이, 뉴턴 등 세계적인 과학자가 등장하면서 유럽은 세계문명의 중심지로 떠오르게 되었다.

초기 철학자들의 관심은 세계를 구성하고 있는 ‘원소’의 성질을 밝히는 것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는 점점 과학자들의 영역으로 옮겨지게 되었다. 1592년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1642)는 파비아에서 그의 앞에 모인 수많은 관중들에게 새로운 지식을 전파했다. 그의 강의를 듣기 위해 모인 사람들은 대부분 의사였다. 그는 이들을 상대로 자신이 발견한 새로운 이론을 들려주었다. 또한 망원경, 체온계, 시계추 등 수많은 기구를 발명하기도 했다. 갈릴레이는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강조했다.

“앞으로 측량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다.”

이탈리아의 의사 산토리오(Santorio, 1561~1636)는 갈릴레이의 발명품에 착안해 세계 최초로 체온계를 발명했다. 또한 심장박동을 측정할 수 있는 추를 만들어 환자의 맥박을 재기도 했는데 이 기구는 후에 ‘맥박시계’라고 불렸다. 맥박시계는 환자의 맥박에 따라 추를 조절할 수 있어 정확하게 맥박을 측정할 수 있었다. 산토리오는 자신이 발명한 맥박시계를 통해 맥박의 수학적 규칙성을 도출해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그의 최대 야심작은 체중계였다. 작은 방만한 크기의 저울인데 그는 이 체중계를 통해 30년 동안 자신의 체중을 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신체의 일부가 공기 중에 노출되는 순간 체중에 변화가 일어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음식을 섭취하거나 배설을 하지 않아도 신체에 일어나는 미묘한 변화, 산토리오는 이를 ‘눈으로는 볼 수 없는 땀’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인체의 신진대사의 비밀을 최초로 인식했던 것이다.

산토리오가 발명한 체온계와 맥박시계. 이탈리아의 산토리오는 갈릴레이의 발명품에 착안해 세계 최초로 체온계를 발명하였다. 1720년 독일의 파렌하이트의 의해 화씨 온도계가 발명되었고, 1742년 스웨덴의 셀시우스에 의해 섭씨 온도계가 만들어졌다.
산토리오가 발명한 체온계와 맥박시계. 이탈리아의 산토리오는 갈릴레이의 발명품에 착안해 세계 최초로 체온계를 발명하였다. 1720년 독일의 파렌하이트의 의해 화씨 온도계가 발명되었고, 1742년 스웨덴의 셀시우스에 의해 섭씨 온도계가 만들어졌다.

당시 파비아 의대를 졸업한 또 한 명의 걸출한 의사가 등장했다. 바로 혈액순환의 원리를 증명해 낸 하비였다. 그는 갈릴레이의 동력과 기계 원리를 이용해 동맥의 혈류 과정을 알아낸 후 심장의 비밀을 밝혀냈다.

당시는 모든 것이 측량의 대상이었다. 실험과 측량을 통한 과학이념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과학’은 더 이상 ‘추론’이 아니라 반복 실험을 통해 정확한 숫자로 증명되는 학문이 된 것이다.

측량을 바탕으로 탄생한 정밀의학은 기존 의학을 일신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새로운 의료기기와 약품이 등장해 그동안 점술로 추측하던 질병의 증상을 정확하게 규명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의학의 미래를 바꿔놓았다. 지금은 물론 감기만 걸려도 진찰과 검사를 통해 증상을 명확하게 규명할 수 있고 환자 본인이 체온계로 열을 재는 등 간단한 진단을 할 수도 있다. 연금술에서 분리된 화학은 점차 근대 화학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독일의 의사이자 의약 화학자인 리바비우스(Andreas Libavius, 1540~1616)는 화학의 실용성을 높인 인물로 꼽힌다. 그가 편저한 《화학적 주제에 관하여 Rerum chymicarum liber》(1611~1613)에는 수년간 그의 실험 성과가 망라되어 있으며 화학교과서의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그는 화학을 독립된 과학의 한 분야로서 확립하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실험실의 건축도안을 직접 설계하기도 했다. 1683년 알트도르프(Altdorf)란 건축가가 그가 설계한 도안대로 실험실을 건축했다.

벨기에의 유명한 의사이자 화학자인 헬몬트(J. B. van Helmont, 1597~1644)는 화학의 정량(定量)연구를 추진했던 인물로 저울을 광범위하게 사용했다. ‘버드나무를 이용한 광합성 실험’, ‘모래 실험’ 등은 초기 화학사에 있어 정량 연구의 전형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그는 화학이 연금술에서 독립해 가는 과도기를 대표하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인체의 화학적 반응을 연구해 생명의 신비를 밝힐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이에 인체의 소화과정을 유심히 관찰했으며 특히 소변량의 변화에 주의를 기울였다. 인체의 기능을 어느 정도 알게 된 후 그는 사혈요법이 흡혈귀와 다를 바가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헬몬트가 의사가 된 이유는 매우 흥미롭다. 한번은 그가 어느 여성과 악수를 나눈 후에 옴이 옮은 적이 있었다. 갈레노스파의 의사들은 간의 이상 때문이라고 진단했지만 그는 스스로 자신의 병을 치유하기로 결심했다. 반복적인 실험을 거친 후에 그는 유황 연고로 ‘옴’을 고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자신의 실험과 경험을 정리한 저서 《창조집》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질병에서 회복된 환자는 혈액 중에 면역이 생겨 같은 병이 다시 걸리지 않는다. 또한 그의 혈액으로 같은 증상이 나타나는 환자를 치유할 수 있다.”

비록 면역체계의 기본 개념이 확립되긴 했지만 의학계에는 여전히 신비주의적 색채가 남아있었으며 신구 의학 이론의 충돌은 피할 수 없었다. 위대한 과학자들의 이론에도 모순은 존재했으며 신비주의자들도 나름대로의 합리성을 갖춘 부분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때부터 물리 의학과 화학 의학이 확실히 구분되기 시작했으며 의학은 바야흐로 황금시대로 접어들었다. 현미경의 등장으로 미생물의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는 등 과학은 인간의 시야와 시력을 몇 배나 확대시켜 주었다. 당시 발명된 눈금판, 자명종, 자, 저울, 렌즈 등의 기구는 지금도 과학, 의학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과학의 새로운 시대를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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