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17세기 의학 — 과학의 황금기

 

“나의 신념은 진리를 사랑하고 공정함을 잃지 않는 것이다.”

혈액순환 이론을 확립한 윌리엄 하비는 자신의 신념을 이렇게 써내려갔다. 

윌리엄 하비는 1578년 영국 남서부 포크스톤에서 출생했다. 캠브리지 대학을 졸업한 후 1598년 이탈리아의 파비아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갈릴레이가 이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었으며 파비아 대학은 자유로운 분위기의 학풍으로 유명했다. 하비는 해부학에 열의를 쏟고 있었다. 그는 스승 파브리키우스(Fabricius ab Aquapendente, 1537~1619)로부터 정맥판막이 혈액의 역류를 방지한다는 사실을 배웠다. 또한 갈릴레이의 영향을 받아 물리학의 ‘질량’의 개념을 ‘혈액순환’ 실험에 이용하기도 했다. 하비의 가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좌우심실에는 각각 56g 정도의 혈액이 들어있고 맥박은 분당 72회 뛴다. 따라서 시간당 맥박 수는 4,320회이며 한 시간 동안 좌심실에서 주 동맥으로 흘러 들어가는 혈액의 양과 우심실에서 폐동맥으로 흘러 들어가는 혈액의 양은 각각 56×4,320=241,920g(약242kg) 정도 된다. 이처럼 많은 혈액의 양은 사람의 정상 체중의 세 배가 되므로 다른 장기보다 받는 압력이 훨씬 크다.”

그는 먼저 심장이 혈액순환의 원동력임을 증명했다. 심장 판막이 혈액의 역류를 막아 혈액이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게 하는 것도 혈액순환을 증명하는 사례에 해당한다.

갈레노스는 ‘간이 혈액 순환의 중심’이라고 주장했다. 좌심실 안에 공기 또는 공기를 함유한 혈액이 존재하고 심장 오른쪽에 격막이 있는데 그 격막에 눈에 보이지 않는 구멍이 있어 혈액을 좌심실로 운반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갈레노스의 주장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베살리우스가 이미 부정한 바 있지만 당시의 시대적 압력으로 인해 번복되지 못했다.

하비가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일정량의 혈액이 심장에서 흘러나와 동맥을 거쳐 전신으로 운반되며 정맥을 통해 다시 심장으로 들어온다. 이것은 심장의 소순환에 해당한다. 혈액은 우심실에서 허파로 이동하고 허파에서 좌심실로 이동한 후 전신으로 순환하는데 이는 소순환과 구별되는 또 다른 순환이라고 볼 수 있다.

1602년 런던으로 돌아온 하비는 엘리자베스 여왕의 궁정의사였던 브라운의 딸과 결혼했다. 그 후 성 바르톨로메 병원의 의사로 재직하며 해부학과 외과학 강의를 했으며 혈관체계에 대한 연구도 계속했다.

하비는 동시대 경험주의 철학자 베이컨과 찰리 1세, 제임스 1세 등과 돈독한 친분을 유지했다. 특히 찰리 1세는 하비의 연구에 매우 큰 관심을 보였다. 그는 특별히 황실 화원에 사슴을 여러 마리 기르며 하비가 해부학적

혈액순환이론을 정립한 윌리엄 하비. 파도바 대학에서 갈릴레이의 강의를 듣고 물리학의 ‘질량’의 개념을 ‘혈액순환’ 실험에 이용하기도 했다. 하비는 해부학과 외과학에 관심과 열의를 쏟았으며, 그의 혈액순환이론은 더욱 유명해졌다. 1628년에 쓴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하여라는 책에 수록된 그림이다.
혈액순환이론을 정립한 윌리엄 하비. 파도바 대학에서 갈릴레이의 강의를 듣고 물리학의 ‘질량’의 개념을 ‘혈액순환’ 실험에 이용하기도 했다. 하비는 해부학과 외과학에 관심과 열의를 쏟았으며, 그의 혈액순환이론은 더욱 유명해졌다. 1628년에 쓴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하여라는 책에 수록된 그림이다.

새로운 발견을 할 때마다 사슴을 가지고 증명해 보이도록 했다. 하루는 왕실 대신이 발을 헛디뎌 굴러 떨어지며 심한 외상을 입은 적이 있었다. 찰리 1세도 하비의 행동을 모방하며 그의 심장에 손을 대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그는 숨을 거두어 심장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찰리 1세는 당시 152세까지 살았던 전설의 장수 노인 ‘올드 파(Old Parr)’의 시신을 하비에게 검시토록 한 적도 있었다. 올드 파는 88세에 결혼했고 102세 때 강간죄를 범하기도 했으며 130세에도 밭일을 거뜬히 할 정도로 건강했다. 그러나 152세 때 런던에 온 후 오염된 공기와 기름진 음식 때문에 바로 병을 얻어 몸져눕게 되었으며 결국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하비의 검시보고서에는 그가 늑막염에 폐렴이 겹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1616년 런던 왕립의학협회의 강좌에서 하비는 드디어 혈액순환이론을 발표했다. 그러나 이 이론이 의학계에 파란을 일으킬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는 매우 신중한 자세를 취했다. 또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반복적인 동물실험을 진행하는 등 연구를 지속했다. 후에 다시 12년 동안 자신의 이론을 정리해 저서로 출간했다.

혈액순환 이론은 1571년에 피사의 내과의사이자 식물학자였던 안드레이(1524~1603)가 먼저 제기한 바 있다. 그 역시 초보적인 수준에서 대순환과 소순환으로 나누어 혈액순환을 묘사했는데 하비는 이를 완벽하게 증명해 낸 것이다.

1628년 프랑크푸르트 도서박람회에 《혈액순환론: 심장과 혈액의 운동에 관하여 De Motu Cordis et Sanguinis in Animalibus》라는 72페이지 분량의 작은 책이 등장했다. 혈액이 온몸을 순환하며 그 원동력은 바로 심장이라는 혁명적인 이 이론은 큰 반향을 일으켰다. 물론 지금은 의학의 가장 기본적인 개념에 해당한다.

혈액순환의 원리가 밝혀진 후, 질병의 원인 규명에 대한 연구도 활발하게 이뤄졌다. 현대의 생리학을 비롯해 심장학, 혈액학도 모두 하비의 이 저서를 계기로 발전하게 되었다. 수혈, 정맥주사, 바이패스 수술(bypass 手術,중요한 동맥 따위가 막혔을 때 우회로를 만들어 피가 잘 흐르게 하거나 자신의 다른 혈관을 사용하여 장애가 있는 관상 동맥 따위에 대신 연결하여 쓰도록 하는 수술) 등도 모두 혈액순환의 이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이때부터 생리학은 하나의 독립된 분야의 과학으로 자리매김했다. 또한 18세기에는 생리학에 바탕을 둔 병리학의 개념이 정립됨으로써 근대 임상의학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하비의 이론 가운데 유일한 결점은 모세혈관의 존재를 증명해내지 못한 것이다. 모세혈관은 1661년 마르첼로 말피기(Marcello Malpighi)에 의해 밝혀졌다.

하비가 혈액순환의 윤곽을 보여주긴 했지만 아무래도 관찰, 실험에 방법적인 제한이 따랐으므로 세부적인 면은 소홀할 수밖에 없었다. 후에 그를 추종한 수많은 과학자들이 더욱 더 정밀한 기기들을 이용해 세부적인 이론을 증명해 나갔다. 하비는 육안으로 확인되는 것들만 발견하는데 그쳤지만 그의 결론은 의학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발견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혈액순환론도 당시 등장했던 수많은 신이론처럼 조롱과 비판을 면할 수 없었다. 하비는 이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에든버러 대학의 프림로즈(G. Primrose) 교수는 “예전의 의사들은 혈액순환이론을 몰랐어도 환자의 병을 고칠 수 있었다.”며 하비를 공격했다. 프랑스의 해부학자 리올랑(Jean Riolan, 1577~1657)은 혈액순환의 ‘순환’이란 말에 빗대어 혈액순환론을 지지하는 의사들을 ‘순환하는 의사’, 즉 ‘떠돌이 의사’라고 비꼬기도 했다. 파리 대학의 교수들도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혈액순환이론을 인정하지 않았다. 하비는 작고 마른 체형에 까무잡잡한 피부의 소유자였다. 그는 허리춤에 찬 단검을 만지작거리는 습관이 있었으며 자신을 매도하는 학자들에게 언제나 이성적인 태도로 반박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하비를 당할 수 없었던 학자들은 “우리는 갈레노스의 오류를 따를지언정 하비의 진리를 따르지 않을 것이다.”라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 후에 하비는 찰리 1세의 지원으로 옥스퍼드 대학에서 생태학 연구를 계속해 1651년 두 번째 저서 《동물의 발생 Exercitationes de GenerationeAnimalium》을 발간했다.

이 생태학 관련 저서는 의학계 전반에 매우 깊은 영향을 끼쳤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는 고등동물과 인류의 생식은 양성결합의 결과라고 주장했는데 육체는 여성에게서 영혼은 남성에게서 나온다고 설명했다. 16세기 파라셀수스는 남성의 정액이 배태의 근원이 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화학적 방법으로 정액이 태아가 되도록 시도한 적이 있으며 ‘인조 인간’을 만들기 위한 시도도 감행한 적이 있었다.

하비는 이 책에서 71종의 동물이 배태, 성장하는 과정을 기술하고 있다. 또한 계란 안에 있는 투명한 반점에서 병아리가 발육을 시작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동물의 태아세포는 각 부분이 단계별, 순차적으로 성장한다는 후성설(後成說, Epigenesis)을 주장했다. 양성이 결합해 태아세포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여전히 모든 생명은 ‘알’에서 나온다는 생각을 견지했다. 당시에는 포유동물의 ‘알’이 발견되기 전이었지만 그의 학설은 난자론(Ovist)이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이론은 19세기 독일의 동물학자 베어(Baer)가 현미경을 이용해 증명해 보였다.

혈액순환론을 비롯해 하비가 주장한 모든 새로운 이론은 그의 경험과 실험에 바탕을 두고 있다. 그는 이 실험의 결과들을 귀납적으로 정리해 후대 의학 연구의 모범을 보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현미경이 발명되기 전이었으므로 혈액순환 이론 가운데 모세혈관 연구는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의 이론이 교착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미 예견된 결과였는지 모른다.

하비는 1657년에 세상을 떠났다. 자녀가 없었던 그는 자신의 연구 업적을 왕립의학협회에 기증해 ‘자연의 섭리’를 밝히는 데 사용하도록 유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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