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17세기 의학 — 과학의 황금기

르네상스시대에는 광학(光學)이 눈부신 발전을 이룩했다. 1590년 네덜란드 미델뷔르흐에는 안경점을 운영하던 얀센(Hans Jansen)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어느 날 아들이 크기가 서로 다른 볼록렌즈를 겹쳐 보며 놀고 있는 것을 무심코 보게 된 얀센은 갑자기 멀리 있는 물건이 마치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가깝게 느껴지는 현상을 발견하게 되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두 개의 볼록렌즈를 동관(銅管)에 고정시켜 보았다. 세계 최초의 망원경은 이렇게 탄생했다. 한편에서는 얀센이 아니라 그 옆에서 또 다른 안경점을 운영하던 다른 이웃 사람이 발명했으며 전쟁에 이용하도록 네덜란드 정부에게 바쳤다는 설이 있다. 망원경에 대한 소식은 유럽 전역에 급속하게 퍼졌다.

천문학자들은 망원경을 이용해 우주를 관측하기 시작했다. 돋보기가 등장해 작은 물건이 크게 보이는 기이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그리고 드디어 현미경이 탄생했다. 1609년 6월 베니스를 방문했던 갈릴레이도 망원경에 대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는 곧바로 파비아로 돌아와 망원경 연구에 몰두한 결과, 우주를 관측하는 망원경은 물론, 본래 크기보다 70배나 크게 볼 수 있는 ‘복식현미경(대물렌즈와 접안렌즈로 확대된 상을 관찰하는 현미경)’까지 제작했다. 이때부터 학자들 사이에 현미경 제작 붐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레벤후크의 현미경. 우리가 알고 있는 망원경을 탄생시킨 원동력은 안경점을 운영하던 얀센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며, 초기에는 천문학자들에 의해 망원경과 현미경이 발명되었다. 특히 미생물(세균)의 존재는 레벤후크의 250배율의 현미경으로 인하여 밝혀지게 되었다.
레벤후크의 현미경. 우리가 알고 있는 망원경을 탄생시킨 원동력은 안경점을 운영하던 얀센에 의해서 비롯되었으며, 초기에는 천문학자들에 의해 망원경과 현미경이 발명되었다. 특히 미생물(세균)의 존재는 레벤후크의 250배율의 현미경으로 인하여 밝혀지게 되었다.

1665년 영국의 레벤후크(Leeuwenhoek, 1635~1703)는 복식현미경을 모방해 배수가 140배나 되는 현미경을 제작해 최초로 세포를 관찰했다. 이때부터 육안으로는 볼 수 없었던 신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게 되었다. 인류의 시야는 동물 체내의 세포구조까지 관찰해 낼 수 있을 정도로 넓어져 수많은 기적을 불러일으켰다.

레벤후크는 1632년 네덜란드의 델프트에서 출생했다. 열여섯 살 때 부친이 세상을 떠나면서 학업을 그만두고 암스테르담으로 올라와 잡화점 점원으로 일했다. 그러나 그는 틈만 나면 옆집 안경점으로 달려가 안경 기술자에게 렌즈에 광을 내는 법을 배웠다. 이 방법을 금방 터득한 그는 방직제품의 실 가닥을 세는 데 렌즈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1674년에 레벤후크는 드디어 단식현미경을 제작하는 비법을 깨우치게 되었다. 장방형의 금속판 두 개에 작은 구멍을 낸 후 그 사이에 자신이 직접 광택을 낸 렌즈를 끼웠다. 이 금속판 두 개를 나사못으로 연결시킴으로써 관찰 대상에 따라 거리를 조절할 수 있도록 했다.

처음 단식현미경을 이용해 물체를 관찰한 그는 스스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닭털의 섬모(纖毛)가 마치 나뭇가지처럼 굵게 보였으며 벼룩과 개미의 다리가 한 그루 나무와 같이 거대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현미경 앞에 펼쳐지는 세계가 마치 기대에 가득 차서 열어보는 선물상자처럼 환상적이었다고 회고한 바 있다.

잡화점 점원 생활을 마감하고 다시 고향인 델프트로 돌아온 그는 시청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며 남는 시간에 현미경으로 자연현상을 관찰하기시작하면서 점점 현미경에 매료되어 갔다. 레벤후크는 90세까지 장수했는데 그동안 무려 250개의 현미경을 비롯해 렌즈 400여 개를 수집했다. 이 가운데는 본래 크기보다 200~300배까지 확대해서 볼 수 있는 렌즈도 포함되어 있었다.

레벤후크는 대학에 다닌 적이 없기 때문에 모국어인 네덜란드어 외에는 라틴어도 다른 어떤 언어도 할 줄 몰랐다. 그는 현미경의 비법이 혹시 다른 사람에게 알려질까 조바심 내며 혼자만 독점하려 했으므로 당시 과학자들은 오히려 그와 친해지려고 안간힘을 썼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해부학자 그라프(Reinier de Graaf, 1641~1673)도 예외일 수 없었다.

그라프는 췌장액을 발견하고 연구한 인물로 유명하다. 췌장에서 분비되는 인슐린은 현대 의학의 중요한 연구 분야에 해당한다. 그는 누관(瘻管, 장기와 몸 표면 또는 두 장기 사이에 생긴 비정상적 통로)을 이용해 개의 췌장에서 분비되는 물질을 다른 용기에 담아 저장해 두고 같은 방법으로 침샘에서도 타액이 분비되도록 하는 실험을 했다. 어느 날 그는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아직 온기가 남아 있는 프랑스 선원의 시체를 해부한 적이 있었다. 마침 췌장액이 분비되어 나오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것을 조금 들이켜 보았다. 그리고 인체에 있는 각종 ‘샘’ 기관이 질병치료의 열쇠일지도 모른다고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라프의 이러한 생각은 그로부터 200년이 흐른 뒤, 프랑스의 생리학자 베르나르(Claude Bernard)가 췌장액이 소화에 관여한다는 사실을 밝혀낸 후에야 비로소 증명되었다.

그라프는 실비우스의 제자로 런던 왕립학회와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1680년 그라프의 추천을 받은 레벤후크는 왕립학회의 회원이 되었다. 그는 한 번도 학회에 출석한 적은 없었으나 1673~1723년까지 자신이 발견한 사실을 학회에 보고했다. 그가 보고한 내용은 왕립학회의 《철학회보 Philosophical Transactions》에 수차례 실렸다. 1683년에는 레벤후크가 그린 세균 그림이 소개되기도 했다. 이때부터 레벤후크는 의학계에서 ‘세균학의 아버지’란 칭호로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이 무엇을 발견한 것인지 잘 알지도 못했다. 그러나 뛰어난 현미경 제작 기술자임에는 분명했다. 과학의 문외한이었던 레벤후크가 오직 현미경만을 이용해 어떠한 과학적 성과를 거두었는지 살펴보자.

1668년, 그는 처음으로 적혈구 세포가 토끼의 귀에 있는 모세혈관을 통해 흐르는 모습과 개구리의 다리에서 순환하는 과정을 관찰해 냈다. 이는 인류 최초로 기기를 이용해 눈에 보이지 않은 세포를 관찰한 기원이 되었다.

1674년, 적혈구 세포의 모양을 정밀하게 묘사해 냈으며 세균과 원생생물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1675년, 빗물을 받아놓은 통에서 단세포 미생물, 즉 원생생물을 발견하게 되었다. 1676년, 트리코모나스(Trichomonas, 동물성 편모충류에 속하는 원생동물로 긴 편모를 가지고 있다)를 발견함으로써 미생물학의 신기원을 열었다. 그는 자신의 잇몸에 낀 이물질을 현미경으로 관찰한 적이 있는데 현미경 너머로 꿈틀거리는 무수한 미생물들의 움직임을 보고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자신의 말을 빌리자면 그 작은 생물들은 무척 신이 난 듯 움직였으며 그 수는 유럽 인구보다도 훨씬 많았다고 한다. 그러나 이 발견은 인류의 존엄성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으며 수많은 학자들의 분노와 반발을 샀다.

1677년, 그는 동물의 정자 모양을 묘사하며 정자가 태아세포 발육에서 차지하는 중요성을 증명했다. 그 당시 정자는 섬모충의 모양일 것이라는 설이 150여 년이나 내려오고 있었다.

생리학 실험의 기초를 제공한 베르나르. 글리코겐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로서 생리학 연구를 위해 의사를 포기하였다. 토끼를 해부한 그는 동물보호론자인 아내와 이혼하기도 하였다.
생리학 실험의 기초를 제공한 베르나르. 글리코겐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한 인물로서 생리학 연구를 위해 의사를 포기하였다. 토끼를 해부한 그는 동물보호론자인 아내와 이혼하기도 하였다.

1683년, 다시 자신의 잇몸에 낀 이물질을 관찰하며 더 작은 단세포 생물을 발견했다. 그는 이 생물들이 마치 작은 뱀처럼 유연하게 움직였다고 기술했다. 그로부터 200년이 흐른 후에야 사람들은 당시 레벤후크가 발견한 것이 세균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684년, 레벤후크는 매우 정확하게 적혈구 세포를 묘사함으로써 모세혈관의 존재를 입증했다. 이로써 하비의 혈액순환론은 완벽하게 증명될 수 있었다.

1688년, 그는 올챙이 꼬리를 관찰하면서 혈액순환 과정을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러한 혈액순환 현상은 서로 다른 부위 50여 군데에서 관찰되었다. 가느다란 혈관을 통해 꼬리 중앙에서 가장자리로 혈액이 운반되고 있었으며 각 혈관 끝에 구부러진 부분, 즉 방향을 전환하는 부분이 있어 혈액을 다시 꼬리 중앙 부분으로 수송하고 있었다. 이처럼 꼬리 중앙 부분으로 혈액이 다시 돌아오는 것은 심장으로 되돌아가기 위해서였다. 혈액을 신체 각 부분으로 보내는 혈관이 동맥, 다시 심장으로 되돌아가는 혈관이 정맥인 것이다. 동물의 혈관이 동맥과 정맥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이 입증된 셈이다.

1702년, 수많은 하등동물과 곤충의 생활사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그는 물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미생물이 살고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곤충의 알이 부화해서 유충이 되는 과정을 관찰하기도 했다. 세균은 다른 생명을 먹이로 살아가는데 먹이가 있는 곳에서는 급속하게 번식하는 것을 발견했다. 그러나 먹이가 없어지는 순간 바로 대량 사망으로 이어졌다. 이처럼 먹고 먹히는 관계는 생명을 담보로 한 잔인한 전쟁이었다. 그는 ‘굴’의 번식과정을 관찰하면서 세균이 아무리 많아도 굴을 멸종시킬 만한 위력은 없으며 세균과의 전쟁에서 단 한 마리의 ‘굴’만 생존해도 굴은 다시 순식간에 엄청난 양으로 번식하는 것을 관찰했다. 그러다가 번식이 과잉상태에 달하면 다시 세균이 출현해 생태계의 균형이라도 이루려는 듯 ‘굴’들을 공격했다. 생존, 생태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조물주의 지혜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레벤후크는 곤충의 구조를 관찰하면서 대부분의 곤충들이 겹눈을 가지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주변의 다른 생명체를 신속하게 발견하기 위해서였다. 또한 진딧물은 수정 없이 번식하는 것을 발견했다. 현대 과학에서는 ‘단성생식(單性生殖)’이라고 부르는데 암컷이 수정 없이 유충을 만드는 방법을 말한다.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획기적인 발견으로 레벤후크의 명성은 전 세계에 퍼졌다. 영국 여왕과 러시아의 표트르대제를 비롯한 수많은 명사들이 그를 직접 방문할 정도였다. 그는 대학의 정규 과학교육을 받진 못했지만 육안으로 볼 수 없는 미생물의 세계를 밝혀냄으로써 18, 19세기 초 세균학과 원생생물학 연구의 발판을 마련했다.

레벤후크와 동시대를 살았던 유명한 과학자로 키르허(Athanasius Kircher, 1602~1680)를 들 수 있다. 독일 태생의 성직자였던 그는 고대 이집트를 연구하는 고고학자였다. 1656~1657년에 페스트가 로마에 유행했을 때 그는 페스트로 죽은 환자의 몸에서 혈액 몇 방울을 채취하여 현미경으로 관찰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현미경 너머로 꿈틀거리는 무수한 생명체의 움직임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아주 작고 재빠르게 움직이며 육안으로 볼 수 없는 이 기생균이 바로 동물 사이에 페스트를 전염시키는 주범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키르허는 유기체에 의해 전염이 일어나는 과정을 처음으로 관찰했다. 파리 한 마리가 병균이 든 과즙을 마신 후, 날아가는 중에 분비물을 음식물에 떨어뜨렸는데 사람이 그 음식물을 먹으면 바로 병에 감염되었다. 이러한 결론은 이탈리아의 자연과학자 프라카스토로(Fracastoro)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키르허가 본 것은 세균이 아니라 혈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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