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17세기 의학 — 과학의 황금기

혈액은 생명을 상징한다. 외과수술에 있어 수혈은 가장 기본적인 조치에 해당한다. 만약 어느 나라에서 대규모로 혈액을 비축하기 시작하면 바로 전쟁이 일어날 신호로 볼 수 있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혈액으로 목욕하면 체력을 회복할 수 있다고 여겼다. 고대 로마시대의 격투사들은 결투에서 패해 죽기 직전의 상태에 놓인 사람의 피로 체력을 보충했다고 한다.

1628년 하비는 혈액이 허파에서 정맥을 통해 동맥으로 이동한다는 혈액순환이론을 발표했다. 런던왕립학회에서 먼저 이 학설을 옹호하고 나섰으며 학회의 회원들은 객관적인 실험을 통해 이를 증명하고자 노력했다. 그 후 로버트 후크(Robert Hooke, 1635~1702)가 현미경을 이용해 인체의 가장 기본적인 단위, 세포를 발견했으며 이어 이탈리아의 저명한 학자 말피기에 의해 모세혈관의 기능이 밝혀졌다. 세포학, 미생물학의 창시자 레벤후크는 닭 벼슬, 토끼 귀, 박쥐 날개, 뱀장어 꼬리 등을 관찰해 모세혈관의 존재를 다시 한번 입증하며 하비의 혈액순환 이론을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이러한 새로운 발견과 학설에 힘입어 왕립의학협회는 처음으로 수혈을 시도하게 되었다. 하비의 순환이론에 따르면 혈액에 액체상태의 약물을 넣고 인체의 각 부위에 주사할 수 있다고 했다. 이에 의학협회의 한 회원이 새의 깃털과 개의 방광을 이용해 주사기 대용품을 만든 후 이를 이용해 약을 ‘생명체’에 주입하는 시도를 하게 되었다. 그는 건축가였다고 한다.의학학회의 관련 문헌에는 “투여하는 약물에 따라 구토, 설사, 중독, 흥분, 심지어 사망까지 동물들의 반응이 다를 수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시도가 성공한 후 1665년 영국의 해부학자 리처드 로벨(Richard Lovell)은 혈액을 인체에 직접 주입하는 방법을 생각해 내게 되었다. 그는 우선 학회회원들 앞에서 동물을 대상으로 공개적인 첫 수혈을 실시했다. 은으로 만든 가는 관을 이용해 개 두 마리의 목동맥과 목정맥을 서로 연결해 혈액이 흐르도록 한 것이다. 수혈 실험에 이용된 개는 생명을 유지했다.

동물을 이용한 첫 수혈 실험이 성공하자 그는 양, 소, 개의 혈액을 혼합해 다시 한번 실험을 시도했다. 이 실험에서 그는 공기 중에 그대로 노출된 동물의 허파에 검은색 정맥혈을 주사한 후 혈액의 빛깔이 점점 선홍색으로 변하는 과정을 관찰했다. 혈액의 빛깔이 변화하는 것은 동물의 허파가 공기 중에 노출되면서 일부 물질을 그대로 흡수해 빚어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수혈의 결과가 이처럼 이상적이라면 질병을 막을 수 있는 것은 물론 불로장생도 가능할 것 같았다. 당시 회원들은 만약 양의 피를 개에게 수혈하면 개의 등에도 보드라운 양털이 자라날 것으로 예상했다. 이와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도 전해진다. 아무도 자신을 해치지 못하도록 암사자의 피를 수혈 받으려는 여성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부부 사이가 원만하지 못할 경우 서로의 피를 수혈하면 모든 원한이 해결된다고 여기기도 했던 것이다.

1667년 11월 23일 드디어 인체 수혈이 시도되었다. 왕립의학협회의 ‘수혈부’의 주재 아래 로벨은 아서 코가(Arthur Coga)라는 이름의 가난한 목사에게 양의 피 340g 정도를 수혈했다. 실험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수혈을 받은 후 목사는 다시 태어난 듯 몸이 훨씬 좋아졌다고 진술했으며 다만 약간의 두통을 호소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프랑스의 궁정의사였던 데니스는 1667년까지 수 차례 동물수혈 실험을 한 인물이다. 로벨이 아서 코가에게 수혈을 실시하기 4개월 전, 데니스는 흑열병(黑熱病)에 걸려 사혈요법으로 치료를 받느라 매우 허약해진 젊은이에게 230g의 양의 피를 수혈한 적이 있었다. 수혈을 받은 젊은이는 다소 기운을 차리게 되었다.

그 시대에 혈액은 정신, 성격, 영혼 등과 긴밀하게 연관이 되어 있었다. 데니스는 인체 수혈에 성공하며 이와 관련해 학술논문을 발표한 바 있다. 그는 이 논문에서 인류가 동물의 피를 수혈 받는 정당성을 철학적 입장에서 설명하고 나병, 궤양, 정신병 등 혈액에 기인한 질병의 치료방법 등을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데니스의 두 번째 수혈수술의 결과는 향후 150년 동안 수혈이 다시는 의학계에 등장하지 않을 정도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당시 수혈 치료를 받게 된 환자는 파리 근교 귀족의 시종이었던 자로 매독을 앓고 있었다. 그가 발작을 일으킬 때면 아내를 심하게 구타하는 것은 물론 온 마을에 불을 지르고 다닐 정도였다. 1667년 겨울 그 시종이 다시 발작을 일으켜 알몸으로 파리 시내를 활보하기 시작했다. 한 귀족이 그를 발견해 데니스의 거처로 데려오게 되었다.

데니스는 약 280ml 정도의 송아지 피를 그에게 수혈했다. 온순한 송아지의 피로 그의 발작을 멈출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데니스는 두 차례 수혈을 실시했는데 첫 번째 수혈이 끝난 후에 환자의 병세는 다소 호전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두 번째 수혈을 실시하자 환자는 갑자기 발열, 복통에 식은땀, 혈뇨 등의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현대 의학의 관점으로 보면 이는 명백한 ‘거부 반응’이라고 볼 수 있다. 고열과 쇼크에 시달리던 환자는 사경을 헤매다가 기적적으로 회생했으며 당분간 발작 증상도 없어졌다.

그러나 1668년 1월말 그는 또 다시 발작을 일으켜 세 번째 수혈을 받게 되었으나 결국 수혈 도중에 사망했다. 환자의 아내가 데니스를 살인죄로 고소했는데 그는 의학적인 입장에서 법정을 설득하지 못하였고 환자의 아내가 남편에게 독을 먹였거나 남편을 방치해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답변했다.

수개월의 소송으로 프랑스 사람들은 모두 ‘수혈’이란 단어를 인식하게 되었다. 법정은 결국 데니스의 무죄를 선고했으나 파리의학교수협회는 허가받지 않은 수혈은 일체 금지한다는 성명을 냈다. 그 후 수혈은 의학 교과서에는 계속 등장했지만 아무도 다시 시도하려는 이가 없었다. 적어도 공개적인 수혈은 더 이상 이뤄지지 않았다. 이 사건은 프랑스 의회에서도 큰 논쟁을 일으켰으며 결국 수혈을 금지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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