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의술이야기] 최초의 의학 전문잡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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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강선주, 이문필 등 20인(빅북 제공)
  • 승인 2019.03.13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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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17세기 의학 — 과학의 황금기

독일의 유명한 천문학자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1639)는 대자연의 소박함, 일관성, 그리고 나름대로의 역할이 주어진 모든 생명체를 찬미했다. 이 말은 17세기의 과학적 이념을 잘 대변해 준다. 이 시기에는 케플러를 비롯해 갈릴레이, 데카르트, 뉴턴 등 천재적인 학자들이 배출되어 과학의 신기원을 열어주었으며, 의학 역시 괄목할 만한 발전을 이룩했다.

바빌론, 이집트, 인도, 중국, 이스라엘, 그리스, 로마의 의학은 주변 여러 나라에 매우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이러한 영향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퇴색해 의학의 학문적 영역에만 머무는 데 그쳤으며 의사, 과학자들 사이의 교류와 협력은 거의 전무했다고 볼 수 있다. 근대 의학은 자연과학에서 실험 연구의 영역으로 점차 이동하게 되었다. 갈릴레이는 모든 현상에는 그 변화를 주도하는 수학적 법칙이 존재하며 학자들의 사명은 이를 찾아내는 것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데카르트가 신봉했던 철학의 기저는 너무나 유명한 그의 명언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에 모두 함축되어 있다. 베이컨은 과학자들에게 지식을 체계화하는 방법을 연구하도록 요구했다.

중세 후기에 건립된 대학들은 오랜 기간 스콜라철학 사상에 속박되어 있었기 때문에 생명력을 거의 잃어버린 상태였다. 당시 학자들은 대부분 서한을 주고받으며 문제를 토론하곤 하였지만 바로크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 모든 편견과 교조주의적 사상에서 벗어나 수학적 방법으로 세상의 법칙을 공식화하곤 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로마, 플로렌스, 런던을 중심으로 점차 과학협회가 성립되기 시작했다. 1603년 로마에 설립된 이탈리아 스라소니 아카데미를 비롯해 1635년 프랑스 학회, 1662년 런던 왕립학회, 그리고 1700년 라이프니츠(Leibniz)가 프리드리히 1세(Friedrich I)를 설득해 베를린 과학학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1680년을 전후해 파리에서 처음으로 의학전문 잡지가 발간되었으며 영어, 독일어 번역서도 출간되었다. “과학은 법칙이다.” 갈릴레이의 이 말은 의학전문 잡지 탄생의 전주곡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과학은 점차 국경이 사라졌다. 영국의 근대 화학을 이끈 보일(Boyle)은 이탈리아에서도 활약했으며 이탈리아의 생리학자 말피기의 명성은 볼로냐를 넘어 런던까지 자자했다. 하비의 혈액순환론 또한 영국, 독일을 거쳐 전 유럽에 알려지며 대규모 토론이 벌어지기도 했다.

국제교류를 통한 협력은 이미 거부할 수 없는 대세로 굳어졌으며 17세기 의학의 가장 큰 특징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네덜란드의 라이덴 대학교는 이 시대의 정신을 대표하는 요람이었다. 스페인 대군이 라이덴을 포위하고 맹공을 퍼부었지만 라이덴 시민들은 용맹하게 싸우며 성을 지켜냈다. 1574년 10월 2일 네덜란드 오렌지 왕가의 윌리엄 왕자는 댐의 수문을 열어 스페인 군대를 수장시켰다. 윌리엄 왕자는 라이덴 시민들의 강인한 의지에 감동해 두 가지 상을 제정하고 시민들 스스로 선택하게 했다. 첫 번째는 10년 동안 세금을 면제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라이덴에 대학을 설립하는 것이었다.

라이덴 시민들이 두 번째 조건을 선택함으로써 탄생한 라이덴 대학에 윌리엄 왕자는 ‘자유의 전당’이란 이름을 붙여주었다. 라이덴 대학은 대문을 활짝 열고서 파비아나 이탈리아 대학으로 가려던 학생들에게 새로운 의학의 전당으로 올 것을 독려했다. 이 때문에 라이덴 대학의 명성은 전 유럽에 퍼지기 시작했다. 네덜란드 화가들의 그림에서도 볼 수 있듯 당시 회화의 소재로 가장 각광받던 것이 바로 의사의 모습이었다. 네덜란드의 유명한 풍속화가 얀 스텐(Jan Steen)도 의사가 병상을 지키는 모습만 20여 폭을 그렸다. 물론 이 가운데는 머릿속에서 결석을 꺼낼 수 있다며 떠벌리고 다니는 유랑의사들의 모습도 포함되어 있다. 의사를 빙자한 이들 사기꾼들은 조수에게 결석을 미리 맡겨두었다가 수술을 진행하며 몰래 자신의 손에 넘겨받는 수법을 썼다. 암에서 백내장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못 고치는 병이 없었다. 그들은 자신의 의사 학위를 대개 모자에 붙여두었다.

그전까지 학생들은 환자를 직접 대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다만 경전을 암송하고 구술과 필기시험을 통과하면 누구나 학위를 발급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점차 ‘의학은 환자 옆에 존재한다’는 말이 현실화되기 시작했다. 1658년 프랑스의 화학 의학파 실비우스가 라이덴 대학에 부임하면서 임상학 강좌를 개설했다. 그는 열두 개의 병상이 마련된 진료소를 근거지로 삼고 학생들에게 직접 환자들과 접촉토록 했다. 학생들은 매일 병원에 들러 환자의 증상을 관찰하고 그들의 고통어린 하소연을 들어준 후 병에 대한 의견을 기록해야 했다. 실비우스는 그들의 기록을 확인하고 질병을 판단하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라이덴 대학은 의학계에 새바람을 불러일으켰다. 경전을 달달 외던 교육방식이 환자를 직접 대하는 임상의학을 중시하는 방향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학풍은 곧 유럽 전 대학으로 퍼지게 되었다.

라이덴 대학의 명성이 높아질수록 이곳으로 몰려드는 학생들의 수도 늘어났다. 또한 각종 학술대회가 빈번하게 개최되면서 학자들이 이동하는 기회가 많아짐으로써 학문은 유구한 역사 도시에 머물지 않고 새로운 도시에서 새로운 학풍을 형성하게 되었다. 라이덴 대학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지식은 급속도로 발전했다. 르네상스시대에 자연과학은 여전히 철학의 한 갈래였다. 그러나 17세기에 이르러 관찰과 실험이 중시되면서 새로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과학적 해석이 무엇보다도 중요하게 되었다. 물론 철학적 해석도 무시할 수 없었다. 지식은 실험과 고증의 고리에 묶여있었기 때문에 매 과정 검증을 거쳐야 했다. 이는 현대의 과학도 마찬가지이다. 그리고 이 과정은 폭넓은 국제교류를 통해 실현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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