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장 17세기 의학 — 과학의 황금기

16세기 해부학은 인체의 정확한 구조와 기본적인 장기의 형태도 파악하게 됨으로써 획기적인 발전을 이룩했다. 그러나 시체를 해부하다 보면 어딘가 어색한 구조와 병변을 일으킨 부위를 종종 발견하게 되곤 했다. 이 때문에 이러한 변이 구조와 질병의 관계를 밝히는 새로운 학문이 등장했다. 바로 병리해부학이다.

처음에는 병변을 일으킨 장기를 육안으로 관찰하는 데 그쳤지만 점차 병변의 원인 찾기에 역점을 기울이게 되었다. 병변의 원인을 환자에게 설명함으로써 환자의 신뢰를 얻어 치료 효과를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651년 테르트르라는 의사가 자신의 방광에 결석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거리의 의사들에게 수술을 맡기기가 두려운 나머지 여러 증인들이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직접 자신의 복부를 절개해 100g이 넘는 결석을 꺼냈다. 이 사건은 ‘역사상 가장 용감한 수술’이라고 당시 신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으며 한 화가에 의해 그림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지금도 그 때 꺼낸 결석과 수술에 사용했던 나무 손잡이로 된 칼이 라이덴 대학 병리실험실에 보관되어 있다.

이 시기에 등장한 서적 가운데 몇 권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658년 스위스 샤프하우젠의 웹퍼(JJ. Wepfcr, 1620~1695)는 중풍의 원인이 뇌출혈에 있다고 주장했다. 이탈리아 란치시(G. M. Lancisi, 1654~1720)는 그의 저서 《돌연사에 대하여 De subitaneis mortibus》에서 심장비대, 판막이상, 각종 심장병, 주동맥 협착 등이 돌연사의 원인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이탈리아의 해부학자 보렐리(G. A Borelli, 1608~1679)는 역학의 원리와 수학적 방법을 동원해 골격 운동 과정에서 발생하는 지렛대 작용, 근육운동, 인체 중심의 위치 등을 규명했다. 그는 1680년 〈동물의 운동에 대하여〉란 논문을 발표해 근육의 크기, 구조, 공기와 물에 저항하는 힘 등을 설명했다. 이러한 공로에 힘입어 보렐리는 ‘현대 운동역학의 창시자’, ‘생물역학의 아버지’ 등으로 불리고 있다. 17세기 후반기에 덴마크의 해부학자 닐스 스텐슨(Niels Stensen, 1648~1686)은 근육 기능의 바이블로 불리는 《근육학 원리》를 발표했다. 이 책에서는 근육의 구조와 수축현상에 대해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괄목할 만한 성과들도 외과학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당시 파리 대학 의대 총장이었던 바딘(Ba-Dinh) 교수 역시 외과의사를 ‘장화 신은 시종’, ‘수염을 기른 채 면도날을 휘두르는 바람둥이’라고 비하하는 발언을 서슴지 않을 정도로 그들의 사회적 지위는 매우 낮았다. 정식 외과의사도 이발사보다 조금 나은 수준일 뿐이었다.

거리의 의사들은 이발사들보다도 더 지위가 낮았다. 그러나 이들 중에도 간혹 기술이 뛰어난 의사들이 있었다. 특히 음부 부위를 횡으로 절개해 결석을 제거해 내는 수술을 하는 볼리외(Fererjacques de Beaulieu)는 궁정 의사들까지도 감탄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1698년 궁정 의사로 왕궁에 들어간 그는 자신을 멸시하던 외과의사들의 눈을 휘둥그레지게 만들었다. 결국 앞다투어 그에게 지도를 청하게 되었다. 그러나 자유로운 생활을 원했던 볼리외는 얼마 지나지 않아 고향으로 돌아와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술을 베풀기 시작했다.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결석을 치료해 주기도 했다.

17세기에도 전쟁이 30년 동안 지속되어 외과 군의관들은 전쟁터에서 수많은 지식과 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파레의 활약에 힘입어 프랑스 궁정은 꼴라쥬 산 콤 대학에 외과의 훈련 과정을 개설하는데 동의했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여전히 이발사들이 앞치마를 두르고 정통 의학의 길과는 다른 길을 걸었다. 각 학회를 중심으로 깊이 있는 연구가 이뤄지면서 대담한 의사들이 전례 없이 행한 수술도 교과서에 실리게 되었다.

특히 마테우스(Matthaus Gottfried Purmann, 1648~1721)와 스쿨테투스(Jehn-nesScultetus, 1595~1645)가 공저한 교과서에는 수혈에 대한 내용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다. 전쟁터에서 의사는 대담한 기지와 민첩한 융통성이 요구될 때가 많다. 따라서 이 책에는 복부를 두드려 진찰하는 타진(打診) 기술에 대한 내용도 수록되어 있다. 타진 기술은 위장에 대해 상당 수준 파악하고 있어야 진찰이 가능하다.

17세기에 외과학이 방향을 잃고 방황했던 것이 사실이지만 일부 국소적으로 발전을 이룬 부분도 있었다. 특히 유방암 수술은 의사들이 자신감을 많이 회복한 분야였다. 유방암 수술은 고대 그리스시대부터 시행되었다. 당시에는 유방 전체를 절제하지 않았기 때문에 병의 진전 속도를 늦추는 데 그쳤다. 13세기에 이르러서야 랜프랭크가 유방을 완전히 절제해야 수술의 효과를 제대로 거둘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 때문에 이 책에는 의사들이 암을 치료할 때 지나치게 보수적인 방법, 일례로 약물치료만 고집하면 환자에게 더 큰 고통을 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따라서 유방암이 발견되면 유방을 완전히 절제하고 소작법(燒灼法)을 이용해 상처를 처리하도록 했다. 소작법은 수술용 칼을 불에 데워 무균상태로 만들어주기 때문이었다. 비록 소독의 개념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지만 그들은 경험을 통해 소작법이 대량 출혈을 막고 암세포 재발을 막을 수 있음을 깨달은 것이다. 이로써 암 수술도 외과 영역에 처음으로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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