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서고금 의술이야기] 근대 임상학의 아버지 토마스 시드넘
[동서고금 의술이야기] 근대 임상학의 아버지 토마스 시드넘
  • 강선주, 이문필 등 20인(빅북 제공)
  • 승인 2019.03.18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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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0장 17세기 의학 — 과학의 황금기

의사들이 논쟁과 탁상공론으로 시간을 허비하는 동안 병자들은 죽음으로 내몰렸다. 이는 17세기의 의학계에선 흔한 일상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의사들에게 환자들이 있는 병상으로 돌아가자고 호소한 이가 있었다. ‘근대 임상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토마스 시드넘(Thomas Sydenham)이다. 18세기에 나타난 임상학을 빛낸 또 하나의 인물인 라이덴 대학의 헤르만 보어하브(Hermann Boerhaave)는 사람들이 시드넘의 이름만 언급해도 모자를 벗고 예의를 표할 만큼 시드넘을 존경했다.

대영박물관을 창건한 것으로 유명한 영국의 내과의사 슬론(Hans Sloane, 1660~1753)이 젊은 시절 추천서를 받아들고 시드넘의 문하에 들어가기 위해 그를 찾아간 일이 있었다. 식물학, 해부학을 비롯해 모든 학과를 섭렵했다고 자신을 소개한 슬론에게 시드넘은 “해부학, 식물학이라니 무슨 되지도 않는 말을 하고 있는가! 환자의 병상에 직접 가보라. 그곳에서만 질병이 무엇인지 배울 수 있다.”라며 호통을 쳤다고 한다.

시드넘은 영국의 와인포드이글에서 출생했다. 찰리 1세와 의회의 전쟁이 한창이던 시절 그의 집안은 의회파에 속한 상류사회 가정이었다. 1642년 옥스퍼드 대학에 입학했으나 내전(청교도 혁명)이 발생하자 학업을 포기하고 의회파 크롬웰 군대에 입대했다. 이 전쟁에서 그의 두 형이 목숨을 잃었으며 그 자신도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겼다. 시드넘의 큰 형은 크롬웰의 동료이자 혁명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다. 형의 후광을 업고 그는 1년 정도 공부한 후 캠브리지의 의학학사 학위를 얻게 되었으며 위령의 날(All Souls’ Day)에 마침 공석이던 학교의 임원으로 선임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임상의학에 매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근대 임상학의 아버지 시드넘의 초상. 시드넘은 환자의 병상이 아닌 책상에서 탁상공론을 벌리는 의사들에 실망하였다.
근대 임상학의 아버지 시드넘의 초상. 시드넘은 환자의 병상이 아닌 책상에서 탁상공론을 벌리는 의사들에 실망하였다.

또 다시 내전이 발생하자 시드넘도 의회파 군대에 재입대했다. 그가 생전에 거둔 성과는 의회 의원이라는 신분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크롬웰이 사망하고 찰리 2세가 왕위에 오르면서 시드넘도 자연히 대중과 접촉할 기회를 잃게 되었다. 이때부터 그는 완전히 의학에만 몰두했다. 시드넘이 런던에 정착해 개업하던 당시에는 왕실과 귀족의 심한 배척을 받았다고 한다.

그는 지병인 통풍으로 30년 동안 고생했다. 말년에는 의사를 포기해야 될 정도로 병세가 악화되었다. 그러나 그는 매우 낙관적이고 또 유머러스한 인물이었다. “포도주를 마시면 통풍에 걸릴 것이오. 만약 마시지 않으면 통풍이 당신을 찾아올 것이오.” “통풍은 대개 부자들이 잘 걸리는 병이오. 가난한 사람 중에 더러 걸리는 경우가 있지만 우매한 사람들은 좀처럼 걸리지 않지요. 하지만 나 같은 사람은 예외라 의외로 적은 확률에 잘 들어맞는다오.” 시드넘은 꽤나 조소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던 것 같다.

오랜 기간 병마에 시달린 경험 때문인지 그의 치료방법은 환자에 대한 동정심과 배려심이 많이 배어 있었다. 그는 항상 학생들에게 “질병과 사망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 의사 자신도 병에 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환자를 대할 때 더욱 온화하고 인내심 있게 대하라.”고 강조했다.

시드넘은 히포크라테스 추종자로 체액설에 심취했는데 자연적 치유를 강조한 히포크라테스의 이론에도 뜻을 같이했다. 체내의 모든 요소가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여겼기 때문에 특히 ‘양생’을 중시했다.

1676년에 《의학의 관찰 Observationes Medicae》이란 제목의 저서를 발간했는데 이 책에서는 사람이 병에 걸리더라도 자체 저항력을 이용해 치유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의사는 해부학 실습, 생리학 실험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질병에 걸린 환자를 돌보는 자로서 환자를 유심히 관찰해 질병의 본질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해부학, 생리학 지식은 그 다음에 연구해도 늦지 않으며 물론 이러한 연구의 목적도 질병의 분석과 치료에 두었다.

이 책에는 15년 동안 발생했던 유행병의 상황과 치료방법 등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으며 질병을 증상에 따라 분류한 뒤, 치료에 임하도록 했다. 즉 질병이 발생했을 때 체내의 자체 저항력으로 치유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파악한 뒤, 치료 전후의 변화를 관찰하게 한 것이다. 그는 이러한 분류 원칙에 입각해 류머티즘, 무도병, 단독, 늑막염, 폐렴, 히스테리 등의 증상을 기록했으며 통풍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환자의 증상을 관찰해 병력을 꼼꼼히 기록하고 전형적인 증상과 기타 병리학적 과정을 정리하면서 질병의 본질을 파악하는 체계를 확립했다고 볼 수 있다.

그의 사상에 영향을 받은 각국의 의사들은 각종 질병에 대한 임상 결과를 활발히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다양한 질병의 특징과 발병과정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으며 질병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가능해졌다. 그전까지 환자를 직접 대하는 임상의사는 떠돌이 유랑의사나 이발사, 도축업자 등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은 미신, 저주 등이 치료에 더욱 효과가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생각은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의사라고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 존 태너(John Tanner)라는 의학 교수가 있었는데 그는 인체를 소우주에 비유하면서 복부는 대지, 복강의 정맥은 지중해, 방광은 대서양, 심장은 태평양이라고 비유하기도 했다.

뛰어난 관찰력의 소유자였던 시드넘은 경험과 관찰만이 의사의 유일한 지식의 원천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키나나무 껍질이 말라리아 치료에 효과가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후 이를 광범위하게 전파하기 시작했다. 당시 의학계는 말라리아 치료법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들은 체내의 오염된 체액을 배출해야만 말라리아가 나을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환자들에게 구토, 배뇨, 땀을 내도록 했다. 시드넘은 새로운 치료법이 등장해도 잘 믿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어느 날 키나나무 껍질이 열병에 특효가 있는 것을 직접 목격하게 되자 주저 없이 키나나무 껍질을 이용해 약을 개발했다. 그는 열병에 키나나무 껍질이 잘 드는 것처럼 모든 질병, 심지어 통풍, 페스트, 천연두 같은 병에도 특효약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시드넘은 성홍열과 홍역을 구별해 처음으로 ‘성홍열’을 명명한 인물로도 유명하다. 또한 최초로 아편을 환자의 통증 경감 치료제로 사용했다. 그는 ‘시드넘 적제(滴劑, 방울약)’라는 아편치료제를 발명해 심장병 치료에 이용했다. 시드넘의 아편 사랑은 매우 유별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편을 대신할 만한 약은 이 세상에 없으며 아편이 없는 의사는 절반의 의사에 불과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아편 철학자’란 별명도 이런 열정 때문에 얻은 것이다.

임상 경험을 중시한 그는 실험, 역학, 화학적 관찰의 결과를 실제 치료에 이용한 적이 거의 없었다. 과학의 진보를 부인하지 않았지만 신뢰하지도 않았다. 그는 심지어 인간의 뇌는 가장 기본적인 진리도 이해하지 못할 만큼 제한적이라고 생각했다. 이 때문에 오랜 기간 의학계의 주류를 형성했던 의학교과서를 전혀 믿지 않았으며 해부학, 생리학에도 관심이 없었다. 과학의 진보는 자신의 일, 즉 의료와는 상관없는 일이라고 치부한 것이다. 그는 오직 자신의 경험만을 믿었다. 시드넘의 의술에 감탄한 한 환자가 평상시에 어떠한 책을 읽느냐고 그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그는 아주 담담하게 ‘돈키호테’라고 대답했다. 어쩌면 ‘환자’만이 그가 읽어야 할 의학교과서였을지도 모른다.

따라서 시드넘은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었다. 의사의 본분은 환자의 병을 이해하고 치유하는 것이라고 강조했기에 그는 당시 의학계의 이단아가 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52세가 되었을 때에야 의학박사 학위를 받을 수 있었다.

1689년 12월 29일 시드넘은 런던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러나 그의 독특한 개성과 사상은 수세기 동안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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